〈 205화 〉 [용사] 마침내
혼자서 잠에 든 어느 날 밤, 눈을 뜨니 이상한 곳에 있었다.
적어도 우리가 머물던 숙소는 아니다.
높은 천장과 기다란 복도, 그리고 벽면을 장식하는 종교화까지.
여기는 교회다.
갑자기 웬 교회?
나는 분명 텅 빈 여관에서 잠을 자고 있었을 텐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금세 알 수 있었다.
꿈이구나.
교회랑 나는 거의 인연이 없다시피 한데, 굳이 꿈속에서 이런 공간에 내가 있을 이유가 뭐가 있을까?
혹시, 여신님이라거나?
무언가 계시 같은 것을 내려주는 것일까?
어디로 가야할지는 잘 모르지만, 내 몸이 향하던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니 어느 샌가 나는 거대한 예배당에 들어왔다.
수많은 의자와, 그 가장 앞에 놓여있는 여신상.
여신상 밑에는 어떤 여자가 한 명 뒤돌아 서있었다.
“기도하실래요?”
“…장난치지 마세요.”
그 여자는 세라였다.
그래, 결국 또 그녀의 장난에 말려들었구나.
저번에 분명 본인의 입으로 신을 저버렸다니 어쩌니 하더만.
이것도 분명 나를 놀리려는 생각이리라.
“장난?”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러고 보니, 날개도 꼬리도 없네.
“그게 아니라면 예배당에는 무슨 볼일이시죠?”
“어, 그게….”
뭐지? 장난이 아닌가?
혼란스러워졌다.
자세히 보니 세라는 맞는데 무언가 조금 달랐다.
지금보다 조금 앳되어 보인다고 해야 하나, 무언가… 조금 달랐다.
“설마 저를 보러 오셨나요? 후후… 그 많은 감시는 어떻게 뚫고 들어오셨나 몰라.”
“네?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아니, 역시 세라가 맞다.
저 말투와 표정. 누가봐도 그녀 본인이다.
그렇지만….
“저에게 할 말이 있는 거라면, 여신님께 기도를 먼저 드려주세요. 여신님이 당신을 불쌍히 여기어 저와 대화해도 괜찮다는 허락을 내려주신다면, 그 때 다시 생각해보죠.”
“아, 안 해주시면?”
“그대로 돌아가 주세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가 나름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보니.”
나는 얼떨결에 그녀를 따라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람.
“눈도 감으셔야죠.”
결국 눈도 감았다.
아니, 그럼 내가 여기서 사천왕인 그녀와 대화하게 해달라고 여신에게 빌어야한다는 말인가?
뭔가 이건 좀….
“무의미한 짓이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네?”
세라의 말에 눈을 떠 보니 이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가 보였다.
“왜 그래요?”
“방금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
“…저는 아무 말도 안했는데요.”
방금 무의미 어쩌구 하지 않았나?
“앗, 설마 여신님이? 혹시 여신님의 목소리를 들으신 거예요?”
갑자기 그녀가 제멋대로 이상한 상상을 하더니 흥분한 기색으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아, 아뇨, 그건 아닌데….”
“기도 하다가 목소리를 들었다면서요! 분명 여신님이에요! 와아, 정말 듣는 사람이 있기는 하구나!”
“아, 저기….”
세라 같되 세라 같지 않은 이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하나 고민하던 중, 멀리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라! 곧 출발할 거야!”
“앗, 네! 곧 가요, 용사님!”
용… 사?
“전 이만 가봐야겠네요. 다음에 꼭 여신님의 목소리가 어땠는지 들려주세요. 꼭이요!”
그러더니 그녀는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정말 바보 같지 않아요?”
이거다. 방금 들었던 그 목소리.
방금까지 내 옆에 있던 세라와 지금 들리는 이 세라의 목소리는 아주 미세하게 달랐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예배당의 의자 중 하나에 그녀가 앉아있었다.
“세라….”
“방금 보신 건 인간 시절의 저에요. 용사… 아, 당신 이전의 용사죠. 그 분과 함께하던 시절의 저.”
“인간 시절….”
그래서 조금 앳되어보였던 거구나.
“그 때의 저는 아직 아무 것도 몰랐죠. 그래서 저렇게 열심이었던 거예요. 용사한테도, 여신에게도….”
그녀는 앞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윤이 날 듯 반짝거렸던 여신상은 어느새 녹이 슬어 있었다.
“혹시 에르티나가 당신들에게 무언가 더 얘기를 했나요?”
“아, 아뇨, 그냥… 생각이 정리되면 말해주겠다고….”
그 말에 세라는 허탈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본인은 아마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했을 거예요. 그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던 여자니까.”
“대체… 뭐를 말하는 거죠?”
에르티나와 세라가 쉽게 말해주지 못하는 것.
도대체… 대체 더 어떤 비밀이 남아있다는 말인가?
“별 거 아니에요. 그냥… 구원이라거나, 기적, 뭐 이런 것들이 전부 허황된 얘기라는 것을 깨달은 것뿐이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내 팔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능력, 누가 준 거라고 생각해요?”
내 팔… 이 신성력과 그녀들의 힘을 따라하는 이 능력을 말하는 건가?
“그야 물론 여신님이….”
“후후.”
그녀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설마 아니라고?
그럼, 그럼 대체 누가…?
“세상이 당신에게 너무 잔혹하게 돌아가는 거 같지 않아요?”
세라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바라봤다.
“당신을 사랑하던 여자들은 하나둘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는데, 그 남자는 원래라면 당신들과 함께 할 일도 없었던 사람이고, 하필이면 이상한 성벽까지 생겨 마지막 남은 연인도 스스로의 손으로 떠나보내고 있죠.”
“떠, 떠나보내다니, 나는….”
“진심으로 그녀가 끝까지 당신만을 바라볼 거라 생각하는 거예요?”
그 말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유니는… 아직도 나를 예전처럼 순수하게 사랑해줄까?
“참 기구한 운명이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또한 당신과 비슷한 운명을 겪었어요.”
“그라면….”
“당신 이전의 용사죠.”
그도 나와 비슷한 운명을….
“아마 그 전에도 그랬을 거예요. 시작은 알 수 없지만, 오래전부터 계속….”
그렇게 말하더니 그녀는 일부러 꼬리로 의자를 툭툭 치면서 내 정신을 환기시켰다.
“그래서 선배인 제 입장에서 말씀 드리자면요. 슬슬… 무언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네요.”
“무, 무언가라니….”
“너무 스스로를 자책하지 마요. 어차피 그건… 전부….”
그녀의 말이 점점 늘어지는 듯 하더니 자세하게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다.
“어머… 벌써 끝….”
시야마저 조금씩 흐려지는 와중에, 그녀가 천천히… 나에게 다가온다.
“…불쌍한… 선물….”
선물?
그리고는 무언가 따뜻한 것이, 내 이마에 닿은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도 꼬리로 나에게 장난을 치는 걸까?
그렇지만, 그렇다기에는 그 감촉이 너무나도…….
***
“읏….”
다시 눈을 뜬 곳은 익숙한 우리의 숙소였다.
이 여관에서 두 번째로 좋은 방.
과하게 넓은 그 침대에는, 오직 나만 누워있었다.
왜 나만 있지?
유니는…?
설마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단 말인가?
나는 그녀가 원래 누워있어야 할 자리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사람의 온기가 닿은 적 없는 침대는 차가웠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무언가… 무언가 무척이나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것만 같은 예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가보았다.
우리밖에 없는 이 건물은 음산했지만, 적어도 사람의 온기가 있는 방이 둘 있었다.
우리 방과, 그의 방.
살짝 으슬으슬한 것으로 보아 아직 아침이 다가오기에는 시간이 제법 많이 남은 것 같았다.
새벽은 여신의 시간… 이었던가.
그리 오래 잠들고 있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문득 빛이 새어나오는 것 같아 옆을 바라보니 옆방의 문이 열려있었다.
이 여관에서 제일 좋은 방.
그와… 그의 여자들이 묶고 있는 방.
그곳은, 아직 불이 켜져 있었고 그 안에서는 희미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 방으로 다가갔다.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그 신음소리는 더 커졌다.
“아흣, 흐윽…♥”
남자에게 매달리듯, 신음을 내는 여자.
“하아, 하아….”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한 달콤한 신음.
나는 그 목소리를, 부정할 수 없이 잘 알고 있다.
더 이상 다가가는 것이 두렵다.
내 두 눈으로 진실을 확인하는 것이 무섭다.
그렇지만… 나는 보아야만 한다.
누구를 위해서?
아마도… 나를 위해서.
나는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이 고양감을 품고 천천히, 천천히 다가가 열린 문 사이로 방 안의 풍경을 훔쳐보았다.
불이 켜진 그 방에는, 거대한 침대 위에 세리아와 아린이 새근새근 잠들어있고, 그녀들 사이에 무척이나 익숙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하긋… 흐으… 거기, 거기는… 아흣….”
그는, 어떤 여자를 안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그 여자의 뒷모습밖에 확인할 수 없었다.
갈색 머리.
그리고… 땋지 않고 풀어헤친 머리.
살며시 드러난 어깨에는 무척이나 익숙한, 그렇지만 조금은 탁해진 장미가 보였다.
“크흐.”
내 인기척을 눈치 챘는지 그가 나를 보며 웃었다.
“뒤를 돌아봐.”
그녀가 자기가 안고 있는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가, 나를 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에, 에릭….”
“……유니.”
그녀는, 나의 소꿉친구이자 단 하나뿐인 나의 연인이었다.
“흐긋♥ 하, 하지 마… 그, 그만…! 흑, 흐급….”
그녀는 그에게 매달린 채 애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