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화 〉 [용사] 더 깊은 곳으로
“읏… 무, 무슨 일이야, 또?”
돌아간 것 아니었나?
나는 순간 내 검을 눈으로 찾다가, 설마 그녀가 다짜고짜 공격하지는 않겠거니 싶어서 슬쩍 시선을 되돌렸다.
“후후… 절 믿어주시는 건가요?”
“읏….”
시선을 들켰나.
왠지 부끄러운 기분이다.
“사실 당신에게만 알려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일부러 이렇게 또 찾아왔어요.”
“이상한 얘기라면, 듣지 않겠….”
“듣고 나서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내 옆에 자연스레 앉았다.
내가 슬쩍 옆으로 이동하자, 그녀도 그만큼 따라왔다.
“…따라오지 마요.”
“부끄러워요?”
왜 항상 이 여자는 이렇게 사람을 놀리듯….
나는 한 마디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하필이면 그 때 그녀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버렸기 때문에 나는 타이밍을 놓쳐 잠시 우물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저는 원래 신관이었어요. 당신의 동료가 그러했듯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다.
400년 전의 신관.
“그런데 말이죠, 교회는 생각보다 힘이 강한 집단이거든요. 역사도 길고, 그만큼 자료도 방대하죠.”
그녀가 하고 싶은 얘기가 무엇인지, 지금으로써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세라의 말이 더 이어지자 왠지 모르게 약간의 가닥이 잡히는 것 같았다.
“아마 아린도, 그런 자료들을 많이 접했을 거예요. 듣기로는 그 사이 신관들 사이에서 자료를 중시하는 풍습이 생겼다고 하더군요.”
“그리고요?”
“급하시긴, 조금 더 들어봐요. 그런데 그렇다고 치면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돌아보고 생긋 웃었다.
“400년 전 용사 파티에 참가했던 신관 정도면 제법 유명한 편 아닐까요? 왜 그녀는 제 이름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그게 무슨….”
이전 용사파티의 신관.
그런 그녀라면 분명 교회에서는 나름 유명인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 시대의 자료에도 이름이나 행적 등이 자세하게 남아있어야 할 것이다.
“그 시대의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고….”
“없는 것은 아니죠. 그럼 하필이면 저와 관련된 자료들만 전부 다 지워진 걸까요?”
무언가 이유가 있다는 말인가?
“네, 정답은 그렇다에요. 저와 관련된 자료는 전부 다 지워졌죠. 아린도 저에 대해 거의 모를 만큼.”
“…대체 왜?”
마왕의 편에 섰기 때문일까.
아니, 그 사실은 아무도 몰랐던가?
어쩌면 알고 있어서 그 사실을 전부 지워버렸을지도.
그리고 그대로 잊혀져 오늘날에는 아무도 모르는 진실이 되어버렸다거나.
“사실 제 기록이 지워진 건 제가 마족의 편으로 돌아섰기 때문은 아니에요. 뭐… 아예 관계가 없는 건 또 아니지만, 아무튼 그게 이유는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
세라는 입술에 손가락을 슬쩍 가져다대고는 장난기를 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믿음을 저버렸기 때문이죠.”
“…그렇죠.”
“응? 안 놀라네요?”
아니, 그야 인간을 배신하고 마족이 되었으니 당연한 거 아닌가?
무슨 얘기를 하나 했더니 이런 얘기였나?
“으음…? 뭔가 오해하고 있는 걸까요.”
그녀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뒤늦게 깨달았는지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마족이 되었기에 믿음을 저버린 게 아니에요. 믿음이 사라졌기에 마족이 된 것이죠.”
“…그게 무슨?”
“믿음을 잃고 흔들리는 저를 잡아준 것이 마왕님이였다는 말이죠. 아, 나쁜 남자에게 잘못 꿰여버렸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키득 웃었지만 진심으로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겠지, 그녀 또한 방향만 다를 뿐 루엘라와 마찬가지로 마왕을 섬기는 입장이니까.
“왜 믿음을 잃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어차피 제가 뭐라고 말하든 얘기할 거면서.”
“후후, 이제는 저를 잘 아시네요?‘
그녀는 슬쩍 웃어보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저희는 비밀을 알아버렸거든요.”
“…비밀?”
또 무슨 비밀?
“이 세계에 대한 비밀을요.”
세계에 대한 비밀.
그런 게… 있다고?
“뭐, 이것도 결국 마왕… 아, 저번 마왕 말하는 거예요. 그 마왕한테서 들은 내용이지만요.”
“무슨… 내용이길래?”
“후후….”
세라는 낮게 웃더니 표정을 차갑게 굳히고 말했다.
“조금, 아니, 많이 화나더라구요. 그만큼 허탈하기도 했고.”
“허탈?”
“…정말, 정말로 역겨워. 그런 무책임한 걸 우리는 신이라고 떠받들고 있었다니.”
그녀의 얼굴에서는 분노가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처음 봤을 때는 신관….”
“그런 거 당연히 연기죠. 400년 전에 소멸된 신관 자격을 그들이 무슨 수로 알아보겠어요? 기록까지 지워졌는데.”
“으음….”
그건 이해하겠는데, 애초에 왜 이런 얘기를 나한테만?
“아린에게도 좀 신경을 써줘요. 아마 이 사실을 알면 가장 충격 받을 아이니까.”
“아린을?”
“이래 보여도 제 제자 같은 존재잖아요? 저도 에르티나 만큼은 아니라도 신경을 쓴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모습 보여준 적 없으면서.
무엇보다, 그런 거라면 나보다는….
“나보다는… 차라리 그 남자에게 말하는 편이….”
“당신 동료 아닌가요?”
세라는 살짝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렇게 멍청한 얼굴로 세상만사 끝난 얼굴을 하니까 안 뺏길 여자까지도 뺏기는 거예요. 그러다가 당신 소꿉친구까지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윽….”
유니….
당장 지금도 그녀는 내가 아닌 다른 남자와 몸을 섞고 있을 것이다.
“설마 벌써 뺏겼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그녀는 살짝 한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당신도 참 어지간하네요.”
“으읏….”
“대체 이런 남자의 뭐를 보고 셋 다 좋아했던 건지.”
말 하나하나가 아프다.
반박할 수가 없어서 더욱 아프다.
“하긴… 어쩌면 그것마저도….”
그녀가 잠시 중얼거린 말에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어차피 이걸 설명하는 건 제 역할이 아니니까.”
“그렇게까지 말해놓고서 이제와서 그러면….”
“휴, 솔직히 근질근질하거든요? 당신들이 충격 받는 얼굴을 보고 싶은데.”
그녀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슬쩍 웃었다.
“사실 저는 이제 곧 가봐야 해서, 마지막으로 얘기나 해볼까 해서 왔죠.”
“마지막?”
그녀의 말에 무언가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저는 이제 다시 인간들 영토로 넘어가봐야 하거든요. 제 할 일이 있으니까.”
그녀의 할 일은 아마도, 마족과 인간이 공존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겠지.
“아마 마왕님이 쓰러질 때까지 못 돌아오지 않을까요?”
마왕이 쓰러지는 것은, 이미 당연한 일이구나.
적어도 세라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공존?”
“네, 공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인간이 마족으로 변할 수는 있어도, 그 반대는 안 되거든요. 저희가 지면… 아니, 어쩌면 모든 것이 다 끝나면 남겨진 마족들은 전부 죽거나 평생을 숨어 지내겠죠.”
뭐, 저희 잘못도 있지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꼬리를 살랑거렸다.
“아무튼 저는 저희 마족들도 평범하게 살았으면 해요. 당신들도 맨날 다른 국가끼리 치고 박고 싸우면서 잘 지내잖아요? 저희도 그랬으면 좋겠다 싶은 거죠.”
그 첫 단계가 음마와 인간의 공존이다.
그리고 서서히 그 단계는 높아질 것이고.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두 종족… 아니, 엘프 같은 소수종족도 포함하면 더 많겠네요. 다 같이 사는 세상이 도래하겠죠.”
그것이 세라의 소원이었다.
아마 그리고 이것이 루엘라와 그녀의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루엘라는 마왕의 안위만을 걱정하는데 비해, 그녀는 이미 마왕의 사후까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마왕님이 그러더라구요. 자신이 죽으면 나 없이 살아가라고. 자신을 잊어달라는 소리겠죠.”
비겁하기는.
세라는 그렇게 말하며 살짝 슬픈 표정을 지었다.
“뭐, 말이 조금 길었네요. 아무튼 오늘은 에르티나를 대신해서 찾아온 것뿐이었으니, 앞으로는 에르티나가 당신들과 함께할 거예요.”
“그녀가…?”
왜 우리랑?
“그녀가 마왕성까지 당신들을 안내할 거예요. 지금쯤 거의 다 왔겠군요.”
“안내라니….”
사천왕이 마왕성까지 안내한다라.
생각해보니 참 어이가 없는 상황이다.
“마왕님은 스스로 죽고 싶어 하는데, 루엘라는 아마 당신들을 계속 방해하겠죠? 그걸 막기 위해서예요.”
으음….
솔직히 조금 미묘한 심정이다.
사천왕의 공격을 다른 사천왕이 막으면서 우리를 마왕성까지 안내해주겠다니.
뭐랄까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후후, 제 생각도 그래요. 마치 시작과 끝만 정해져 있는 연극 같죠. 용사의 탄생과 마왕의 죽음만 정해져있고, 그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각본처럼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세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꼬리만 살랑거리며 말없이 나를 바라봤는데, 일부러 그런 것인지 자꾸 꼬리가 내 머리 근처를 휙휙 돌아다녔다.
“아무 것도 없어요?”
“네?”
“저 이제 돌아가면 한 동안 못 볼 텐데, 작별인사라던가 뭐 그런거 없냐구요.”
“그런 걸 제가 왜….”
적이라기에는 미묘하지만, 그렇다고 사이좋게 작별인사를 건넬 만큼 친하지는 않은 애매한 사이.
나는 무슨 반응을 보여줘야 하는 것일까?
“흐응… 그럼 제가 할까요?”
“뭐, 뭐를….”
그녀가 갑자기 내 어깨를 잡았다.
그러더니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 어어…?
갑자기 이게 뭐지?
나는 당황해서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쪽.
무언가가 내 입술에 닿았다.
설마 이건…?
내가 새빨개진 얼굴로 살짝 눈을 뜨자,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새카만 어둠뿐.
이게 뭐지?
“아하하하! 지금 기대했죠? 이거 당신 연인이 알면 꽤 화를 내겠는데요.”
톡.
그 검은 무언가가 내 코를 건드렸다.
아, 이거 꼬리구나.
나는 그녀와 입을 맞춘 것이 아니라 꼬리와 입을 맞춘 것이다.
“무, 무슨 짓을…!”
“꼬리에 하는 키스는, 복종의 의미에요.”
“이, 이런 장난은….”
그녀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계약이기도 하죠.”
“계약?”
“뭐, 좀 고리타분한 얘기이긴 하지만요. 인간들은 손으로 문을 두드리잖아요? 들어가도 될까요, 하면서.”
그러면서 세라는 손으로 허공을 두드렸다.
마치 노크하듯이.
“저희는 꼬리로 물어보는 거죠. 제가 들어가도 될까요?”
“…어디로?”
어디로, 들어간다는 말인가?
“당신의 꿈으로.”
“꿈….”
“그리고 당신이 입을 맞춤으로써, 저는 허락을 받아낸 거죠.”
“따, 딱히 허락한 적은….”
이건 내가 허락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나를 속인 것 아닌가.
물론 정말로 화가 난 것은 아니지만, 이게 계약이라면 일종의 사기 계약이다.
“정말 싫으시다면 가지 않을게요.”
그녀의 꼬리가 휙휙 흔들렸다.
“…꿈에서 무슨 짓을 하려고….”
“후후, 기대되시나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기 꼬리를 만지작거리더니 나와 입을 맞춘 부분을 슬쩍 쓰다듬었다.
“읏….”
부끄러워서 내 얼굴이 빨개지자 그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참고로 제 꼬리는 아무나 쉽게 못 만지거든요? 운 좋은 줄 아세요. 사천왕의 꼬리에는 황금보다도 귀중한 값어치가 있으니까요. 좋은 경험 한 거예요.”
“그, 그런 경험 필요 없어요.”
“후후… 혹시 모르죠. 언젠가 도움이 될지도.”
그녀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이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그러게요? 아하하!”
자기가 말해놓고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녀가 웃었다.
“아… 그럼 슬슬 갈 때가 됐네요. 마왕님이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들리면 성공한 것으로 알고 있을 게요.”
“…돌아가요.”
안녕히, 라는 말은 붙이지 않았다.
마지막에 한 장난 때문에 그럴 마음이 싹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꿈이라니….
왠지 부끄럽다.
“후후… 꿈에서 다시 볼 수 있겠죠? 부디 끝을 낼 수 있기를 바랄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문을 닫고 돌아가 버렸다.
세라가 돌아간 뒤로도 방에서는 그녀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한동안 그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겨우 문을 열고 머리를 식혔다.
유니가 돌아올 때까지.
***
“하앗, 하아….”
“유니….”
제 몸 하나도 제대로 못 가누는 상태로, 그녀가 비틀거리며 돌아왔다.
그녀의 온몸에서는 정액냄새가 났지만, 나는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나, 나 돌아왔어.”
“…어서 와.”
그녀는 살짝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