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화 〉 [짐꾼] 유니가 둘
복도에서 나와 유니가 관계를 맺은 뒤로, 3일 정도가 지났다.
용사는 그 다음 날 이 도시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유니의 훈련에 진전이 있었을까? 이런 단기간에 의미 있는 성장을 이루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훈련을 열심히 할 동기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어차피 마왕은 죽기만을 바라고 있는데.
그와 격렬한 전투를 벌일 것도 아니라면, 열심히 수련할 필요가 있는가?
그 대답을 찾지 못한 채로 그들은 도시를 떠났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도 유니는 종종 우리를 찾아왔다.
“나는 에릭을 위해서….”
“그래, 용사를 위해서지.”
유니는 옷을 벗기 전 반드시 그렇게 말했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으로 보아 우리에게 하는 말이라기 보다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았다.
목적을 잊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되뇌이는 듯한 말.
유니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자, 그럼 오늘도 시작할까?”
“…….”
유니는 여전히 적극적이지 않다.
그야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용사를 위해서라는 좋은 핑계도 있는데 굳이 못할 것도 없잖아?
뭐, 그렇지만 고작 그런 것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유니의 정신을 흔들 필요는 없겠지.
그녀는 지금도 충분히 불안정해보인다.
특히나 마왕에 대한 얘기를 들은 지금은 더더욱.
“…너는, 마왕을 죽이고 싶은 거야?”
“뭐?”
문득 유니가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내 앞에서 다리를 벌리기 직전에 나온 말이었다.
어쩌면 별 의미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다리를 벌리는 것이 두려워서 잠깐의 시간끌기로 하는 말일지도.
그렇지만 그녀가 던진 말은 내가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마왕을 죽이고 싶냐라.
솔직한 심정으로는 내 알 바 아니다지만, 굳이 그렇게 말해서 좋을 것은 없을 테고.
내 노예들이 마왕을 죽이는 것을 바라고 있으니 나도 이왕이면 마왕을 죽이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정도의 인식이다.
“뭐, 너희들과 비슷하겠지.”
“확실하게 말해줘.”
왜 이렇게까지 내 대답을 요구하지?
혹시 뭔가 이유가 있나?
나는 잠시 고민해봤지만 그녀가 무언가를 노리고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냥 듣고 싶은 것이다.
나 또한 그들과 같은 목적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쩌면 이 사실은 용사와 나 사이의 유일한 공통점일지도 모르고.
그래서 찾는 것인가?
내가 용사와 계속 파티를 맺을 수 있는 이유라던가 뭐 그런 것을?
조금 알쏭달쏭하네.
그래도 대답은 그녀가 바라는 대로 해줘야겠다.
“마왕은 죽는 편이 좋겠지.”
완전히 없는 마음에 지어낸 소리는 아니다.
그녀들이 바란다면,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큰 해가 되지도 않는다면 굳이 그것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
“…그래, 그거면 됐어.”
“왜 물어본 거지?”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뭐를?
“네가… 아니, 말 안 할래.”
유니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금세 입을 다물었다.
뭐야?
지금 장난치는 건가?
“그딴 식으로 말해놓고 입을 다물겠다고?”
그렇지만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아무래도 입을 다문 그녀에게 무언가 벌이 필요할 것 같다.
나는 그녀에게 두 발로 돌아가기 힘들 정도의 자극을 선사했다.
그녀를 돌려보내고 눈치 챈 것이지만, 우리가 앉아있는 모닥불 뒤편에 누군가 왔다간 듯한 자국이 남아있었다.
사람의 엉덩이가 깔고 앉아 납작해진 풀더미.
당연히 나나 그녀들이 저곳에 가서 앉아있었던 적은 없다.
그렇다면 저기에 앉아있었을 사람은 아마도….
루엘라.
그녀가 여길 왔다간 것인가?
우리들 중 아무도 그녀를 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때… 뭐라고 말했지?
아무래도 조금 느낌이 안 좋은데.
그리고 그 예감은 마족의 영토에 발을 들이고서 현실이 된다.
***
“그러면 곤란하죠.”
마족의 영토에서 목적지를 곧장 마왕성으로 잡은 우리들 앞에, 갑작스레 그녀가 나타났다.
수많은 마물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루엘라는, 조용한 적의를 불태우며 우리를 가로막았다.
마왕은 우리가 그에게 당도하기만을 바라고 있을 텐데, 아무래도 루엘라는 그의 명령을 어겨서라도 그를 지키고 싶은 모양이다.
세리아가 이걸로 빈정거리자 루엘라가 울컥하며 화를 냈다.
“닥치세요! 당신 따위에게 그딴 말을….”
“그냥 얌전히 보내주지 그래.”
그 동안의 조교로 길이 든 그녀에게 한 말이었지만, 루엘라는 순간적으로 폭발할 듯한 눈동자를 나에게 향했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시, 그녀는 애써 억누른 침착한 눈동자로 나를 보며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했다.
“당신도, 마찬가지야.”
역시 들은 것인가?
내가 유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했던, 마왕은 죽는 것이 좋겠다는 말.
분명 그녀가 들은 것이리라.
내가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직접 몸을 움직인 것이겠지.
뭐야, 이러면 설마 내 탓인가?
아니겠지.
내가 차일피일 약속을 미루고 있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을 테니, 어차피 언젠가는 일어날 일….
잠깐, 이래도 내 탓이네.
드물게도 아주 약간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그야 저 마물들의 군세를 보면 제아무리 냉혈한 사람이라도 무언가 드는 생각이 있지 않겠는가?
이거 이길 수 있나?
나는 그들의 반응이 궁금해서 한 번씩 돌아보았는데 당혹스럽게도 모두의 눈빛은 동일했다.
이길 수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맞붙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러면 나도 참가해야 하나?
이런 전투는 해본 적이 없는데. 내가 해본 것이라고는 뒷골목에서 주먹질 좀 해본 것이 전부다.
“이길 수 있나?”
과연 지금의 용사는 루엘라를 이길 수 있는가?
그는 대답하는 대신 검을 꽉 쥐었다.
“…노력해보죠.”
내 말이 마음에 안 드는 듯 했지만 그래도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의 짧은 외침을 시작으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녀들이 밀려오는 마물들의 공세를 막고, 용사는 루엘라를 막는다.
나는 최대한 끼어들지 않으려고 했지만 가끔 마물들이 나에게도 접근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앗, 주인님! 죄송해요, 빠져나갔어요!”
“괜찮아!”
최대한 아린이 묶어두고는 있지만, 수가 좀 되다보니 이렇게 빠져나가는 놈도 가끔은 발생하기 마련.
나는 세리아가 알려준 열마법으로 몬스터를 금세 녹여버렸다.
“크와아악!”
아니, 바로 안 죽잖아?
기겁하며 옆으로 도망치니 몸을 틀어 나에게 뛰어오려던 오크가 풀썩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려졌다.
“후우….”
놀래라.
이 녀석들은 이런 전투를 매번 해온 건가?
옆에서 자주 보기는 했지만 당사자가 되니 느끼는 기분이 제법 다르다.
용사는 잘하고 있나?
그는 루엘라와 맞붙느라 주변을 제대로 살필 여유가 없는 듯 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얼핏 보기에는 용사가 더 유리해 보이는데….
정말 괄목할만한 성장이다.
그 짧은 시간 내에 저렇게 강해졌다는 말인가?
그 원천이 나에게 유니를 뺏기는 흥분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조금 우습기도 하지만, 저 힘만큼은 비웃을 수 없는 진짜였다.
“…좋아요, 그럼 여기서 끝을 내죠.”
어느새 둘 사이의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
진심으로 상대하려는 루엘라와, 검에 흰 불꽃을 일으키며 그녀를 노려보는 용사.
잠시 루엘라의 표정에 동요가 일었다.
“그건….”
조금 의아한 반응이었지만, 나는 곧 그들에게서 눈을 돌려야만 했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어느새 그 많은 마물들을 정리한 그녀들이 나에게 달라붙은 것이다.
“괜찮아. 안 다쳤으니까. 가서 저거나 좀 어떻게 해봐.”
“앗, 네!”
“바로 갈게요!”
지금은 나보다 루엘라를 잡는 게 먼저.
그녀들도 긴급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곧장 그에게 달려갔다.
유니는?
그야 말할 것도 없이 마지막 마물을 처리하자마자 그에게 달려갔다.
“끝이야, 루엘라.”
어느새 그녀를 포위한 용사가 그렇게 말했다.
이렇게 보니 제법 용사다운 모습이다.
그렇지만 어차피 그녀에게 이 육체는 얼마든지 수복이 가능한 것이니, 이것으로 정말 죽는다고는 볼 수 없으리라.
“…이렇게 된 이상, 죽여서라도….”
마왕의 명령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아마 그것은 용사를 죽이지 마라 정도의 단순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그렇다면 조금 억지를 부려 보면 죽이지만 않으면 일단 그의 명령을 어기지는 않았다는 뜻.
그러나 루엘라가 지금 각오하고 있는 것은, 분명 마왕의 명령에 반하려는 짓으로 보였다.
마왕의 명령을 직접 어겨서라도, 반드시 용사를 막아내겠다는 그녀의 집념이 느껴진다.
그녀가 그런 의사를 표현한 순간, 내 옆에서 또 다른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하아, 결국….”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그녀는, 또 다른 사천왕 세라였다.
그녀는 나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채, 그대로 나아가 무언가 수상한 마법을 발동시키려 하는 루엘라의 몸을 굳혀버렸다.
“…세라.”
루엘라가 일그러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사천왕끼리의 대립.
어디가서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둘은 마왕의 마지막 명령에 대해 의견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결국 불리한 쪽은 결국 루엘라였기에 그녀는 잠시 머리를 식히더니 곧 돌아갔다.
“당신은 나중에 보죠.”
사라지기 전 남긴 말은 분명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거 참, 앞으로 한동안은 혼자 못 다니겠네.
세라는 루엘라를 대신해 우리들에게 사과를 했고, 그 성의의 뜻으로 주변 마을까지 안내해주기로 했다.
“아무도 없잖아.”
그러나 그 마을이라는 것은 당연하게도, 사람 하나 살지 않는 무인촌이었다.
세라 말로는 죽일 생각이 없었는데 자기들이 오해해서 죽자살자 덤벼들었단다.
뭐… 나라도 오해했을 거 같기는 한데.
우리는 그녀가 내어준 여관의 3인실 방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어차피 아무도 없는 곳이라 더 넓은 곳을 써도 되겠지만, 세라가 직접 건네준 것이다 보니 거절하면 왠지 화낼 것 같아 그대로 왔다.
잠시 쉬고 있다 보니 왠지 등이 따끔따끔했다.
루엘라인가.
“잠시 나가있어 줄래?”
“네?”
“아… 알겠어요.”
고개를 갸웃하는 아린과 달리 세리아는 대충 상황을 눈치 챈 것 같았다.
결국 세리아가 아린을 데리고 방을 나서자, 혼자 남은 내 방에 자연스레 다른 인물이 들어와 앉았다.
“왜 맨날 창문으로 들락날락거리는 거야?”
“그야 지금은 세라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 루엘라는, 평소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희의 약속에 대해, 다시 얘기를 할 때가 온 것 같군요.”
그래… 이제는 피할 수가 없겠군.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설마 갑자기 화내면서 날 죽여버리는 건 아니겠지?
지금은 좀 침착해진 것 같지만, 저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를 용서했다거나 그런 물러터진 감정이 들어있지는 않다는 것을.
똑똑.
그런데 이 어색하고도 불편한 상황 속에서, 낯선 노크소리가 우리 둘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뭐야?
“…나야.”
유니였다.
아니, 이런 시간에 벌써?
용사와 같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들어갈게.”
잠깐, 이러면 루엘라는 어쩌고?
그녀를 돌아보니 루엘라도 살짝 당황한 듯 했다.
“뭐해요, 빨리 돌아가라고….”
끼익.
그러나 그녀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유니가 잽싸게 문을 열었다.
“응?”
“읏….”
그렇게, 유니와 루엘라가 내 방에서 대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