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 [짐꾼] 복도에서
용사 파티의 다음 목적지는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인간과 마족 사이의 경계선 앞에 위치한 도시였다.
여기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본격적으로 마족 영토이기 때문에, 아마 준비를 단단히 하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럴 예정이었는데….
“결계?”
“주인님, 조심하세요! 뭔가….”
내 품에 안겨있던 그녀들이 벌떡 일어났다.
“뭐? 무슨 일이야?”
일어나자마자 옷을 급하게 주워 입던 그녀들은 용사의 방에 낯선 결계가 쳐졌다고 알려주었다.
“모르는 마법인 걸로 봐서는 아마 루엘라 같은데, 가서 봐야겠어요.”
“갑자기 이렇게 습격을 해올 줄은 몰랐네요.”
루엘라가 용사를?
갑작스러운 일이지만, 그 이유는 왠지 모르게 짐작이 간다.
그녀는 마왕이 죽는 것을 바라지 않으니까, 내가 약속을 지킬 시기가 점점 미뤄지자 참지 못하고 용사를 공격한 것이리라.
이러면 정말 용사가 죽어버리나?
마왕이 승리하는 결말로?
누가 이겨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끝이 나면 나도 여러모로 곤란하므로 그녀들을 따라 나섰다.
방 밖으로 나오자 금세 유니와 에르티나가 급하게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누가 이런 짓을…!”
“루엘라군요.”
감정이 격해진 것으로 보이는 유니와 대조적으로 에르티나는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같은 사천왕이 알아보는 것을 보니 이건 루엘라의 짓이 맞는 모양인데….
그렇게 사정이 급했나? 지금 당장 용사를 죽여 버려야 할 정도로?
“읏, 안을 볼 수가 없어….”
“그러려고 만든 결계니까요. 바깥에서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는 것보다 안에서 부수는 게 더 빠를거예요.”
즉, 용사가 스스로 깨고 나와야한다는 말이다.
세리아가 열심히 마법을 해제해보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그리 잘 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으읏… 이런 마법이….”
손도 못 댄다는 사실이 억울했는지 세리아의 표정이 조금 험악해졌다.
“에릭 씨….”
“에릭….”
아린과 유니도 걱정하는 표정으로 결계 내부를 바라보았다.
저 안에서, 둘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벌써 결판이 났을지도 모른다.
쨍그랑!
그러나 결계가 유지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치 힘이 약한 유리로 된 것 마냥, 결계는 금세 박살나버렸다.
“에릭!”
유니가 제일 먼저 달려갔다.
그녀를 쫓아 우르르 들어간 우리들은, 곧 그 안에서 용사와 루엘라, 그리고 그 둘을 중재하는 것 같은 세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세라?
그녀는 왜 또 여기 있지?
“루엘라, 그리고 세라까지. 당신들 뭐하는 짓이죠?”
에르티나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아….”
루엘라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졌음을 깨달았는지, 우리들을 거세게 노려보고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는, 그런 거 인정 못해.”
이 말을 남기고는 창문 밖으로 떨어져버렸다.
용사가 재빨리 창문으로 뛰어나갔지만 이미 도망쳐버린 모양.
“큭….”
용사는 분하다는 듯,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우리는 당연히 사정 설명을 요구했다.
루엘라가 도망친 지금, 상황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세라였고, 그녀도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가 설명해준 것은 단순히 사정설명만이 아니라, 조금 더 근본적인 설명이었다.
마왕의 행동 목적, 그리고 사천왕들의 태도.
그 모든 것들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들과 같이 그 얘기를 듣고 우리 방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내가 잘 이해를 못했는데, 결국에는 그 마왕이 죽고 싶어서 이런 짓을 벌인 게 맞는 거지?”
“오래 살아서 권태가 왔다라… 참 어이가 없는 말이네요.”
세리아는 마음에 안든다는 듯 팔짱을 꼈다.
그럴 만도 하지.
대륙 전체가 전화에 휩싸인 이유가, 고작 할 거 다해보고 지겨워서?
도대체 어디까지 이기적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하긴, 그러니까 마왕 같은 걸 하고 있지.
“그러면 마왕을 잡는가 못잡는가는 사실 큰 문제가 아니겠네요. 어차피 마왕은 우리에게 죽을 생각인 것 같으니.”
불로불사에 가까운 그를 죽일 수 있는 것은 여신이 내렸다는 용사의 능력 뿐.
그래서 용사를 죽이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그래서 수도 때도 저희를 죽이지 않았던 거고….”
루엘라가 우리를 죽이지 못했던 이유.
“세라나 에르티나가 호의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겠네요.”
세라와 에르티나가 우리를 돕는 이유.
전부 마왕이 묵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르티나 같은 경우는 마왕에 대한 강력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지만, 어차피 본인도 용사에게 죽는 것을 바라고 있기에 그녀를 내버려두고 있다.
세라는 마왕의 마지막 소원을 위해 자신을 죽게 내버려달라는 그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중이고, 루엘라는 이를 인정 못하는 상황.
“음, 확실히 둘의 행동이 엇갈릴 만도 하네요. 어쨌든 둘 다 마왕에게 충성하는 입장이니까….”
루엘라와 세라 모두 마왕에게 너무 충성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반응을 보여준 것이다.
그의 소원을 들어 죽게 내버려둘 것인가, 아니면 그의 소원을 어겨서라도 그가 살아남는 것을 볼 것인가.
문득 이 상황에 나를 대입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다.
“내가 만약에 너희에게 날 죽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내 질문에 둘 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주인님의 소원이라면… 이루어드려야죠.”
세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고,
“네? 그, 그건… 장난이라도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아린은 질색하면서 몸서리를 쳤다.
사천왕들에게 대입하자면 그녀는 루엘라에 가까울 것 같다.
“흐음… 뭐, 당장 너희들도 이러는데 그녀들이 그런다고 이상할 건 하나 없겠지.”
뭐, 아무튼 꽤 충격적인 소리였지만 잘 됐다.
이제 루엘라가 나한테 약속 어쩌구 하면 해줄 말이 생겼군.
“어쨌든 중요한 건 유니니까.”
“후후, 그렇죠. 이미 몸까지 내어버렸으니 남은 건 마음뿐이네요.”
중요한 분기는 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녀의 정신이 몸을 따라 함락되기를 기다릴 뿐.
물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을 생각은 없다.
마왕을 잡기 전에 어떻게든 유니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하니까.
***
그 날 저녁, 유니가 우리 방을 찾아오자 나는 그녀를 데리고 방 밖으로 나왔다.
“…무슨 생각이야?”
“자, 하던 거 계속 하자고.”
내 말에 유니의 행동이 순간 굳었다.
“여, 여기서…?”
“후후, 꽤 짜릿한 경험이랍니다, 유니.”
노출에 관해서는 선배라고 할 수 있는 아린이 그녀에게 한 마디 말했다.
“미쳤어? 이, 이러면 에릭한테 다 들리잖아…!”
“그리고 나오면 바로 볼 수 있겠지. 자, 뭐해, 벗어야지.”
“이, 이런 곳에서….”
복도에서 하면 그 소리가 용사에게 안 들릴 수가 없다.
참다못한 그가 방문을 열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면, 그 때 그는 모든 것을 다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는 문을 열까?
“걱정 마, 여기 손님은 우리뿐이니까.”
굳이 이런 최전선까지 놀러올 사람은 없다.
손님은 우리뿐이고,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들킬 일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이런 건….”
“용사를 흥분시키고 싶은 거 아니었나?”
“으, 으읏….”
유니는 한참을 주저하더니 불안한 눈으로 세리아와 아린을 돌아보았다.
“…아, 아무도 못 올라오게….”
“당연하죠.”
“그건 막아줄 테니 걱정 마.”
어차피 올라올 사람이라고 해봐야 여기 여관 주인뿐인데, 어차피 그 정도는 세리아나 아린 하나만 있어도 상관없다.
뭐… 설령 올라온다고 해도 평범한 사람인 그가 뭐라도 할 수 있겠는가?
“으읏… 에, 에릭이 이걸 보면….”
“아마 안 나올 걸.”
나오는 순간 모든 것이 다 깨진다.
나와서 말없이 구경만 한다면, 그건 유니를 스스로의 손으로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설마 용사가 그렇게까지 멍청하지는 않을 터.
하지만 밖에 나와 용사가 유니를 구출해내면 이 연극은 여기서 끝이다.
더 이상 유니는 외도를 하지 않을 것이고, 용사는 더 이상 예전 같은 흥분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유니도 마찬가지일 테고.
따라서 용사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만히 앉아 그녀의 신음을 듣는 것 뿐이다.
문만 열면 바로 진실과 마주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는 것.
그것이 용사가 취할 유일한 해답이다.
“으읏… 에릭….”
유니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 그럼 시작하자고. 옷부터 벗어.”
“……관계 몇 번 맺었다고 다 이긴 것처럼 굴지 마.”
“크크, 그렇게 보였나?”
하긴, 이긴 것처럼 구는 것도 이상하지.
이미 이겼으니까 말이야.
“흐읏, 으읏….”
유니는 벌써부터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옷 밑단을 잡고 위로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걷어 올린 그녀의 옷 아래로는, 그녀의 가슴 한 가운데가 흥분으로 인해 빳빳하게 서있는 상태였다.
“큭큭….”
“읏, 으읏….”
그 점을 지적당하자 유니는 볼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그렇게나 원했으면서 아닌 척 하기는.”
“다, 닥쳐….”
유니는 스스로에게 분노한 표정으로 가슴을 슬쩍 가렸다.
이제는 거리낄 필요가 없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가슴을 움켜주었다.
“하읏…♥”
그녀는 나를 보고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순간적으로 새어나온 신음은 그녀의 진심이 어느 쪽에 있는지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