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 [용사] 진실
“너야말로 왜 이런 곳에….”
“그런 것보다 지금 당신, 무슨 짓을 하려는 거죠?”
루엘라의 말을 자르고, 세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용사를, 죽이려고 한 거죠?”
뭐지, 이 상황은.
그녀들은 나를 죽이려고 온 것이 아닌가?
아니, 적어도 루엘라는 그렇다.
그렇지만… 세라는 아닌 것 같다.
“결계를 푸세요.”
“…싫어.”
“용사님, 가서 결계를 부수세요. 당신이라면 할 수 있죠?”
“세라!”
내가 망설이는 사이 루엘라가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는… 너는 그래도 좋은 거야? 정말 그런 명령을 따르려는 거야?”
“루엘라, 저희가 누구에게 충성하는 지 잊었나요?”
제길, 대체 무슨 말이지?
무언가 둘만 아는 이야기로 그들은 다투고 있었다.
“잊을 리가 없잖아. 그래서 더 말이 안 되는 거라고….”
“받아들이세요, 루엘라.”
“크읏….”
아무튼 지금이 기회다.
나는 내 검에 신성력을 두르고는, 벽면을 그대로 베어버렸다.
벽 바깥을 두르고 있는 결계를 찢기 위해.
쨍그랑!
무언가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큿… 정말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성장하네요.”
“에릭!”
“에릭 씨!”
결계가 부서지자마자 그녀들이 우르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세리아, 아린, 유니, 그리고 에르티나까지.
마왕을 제외한 주요인물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루엘라, 그리고 세라까지. 당신들 뭐하는 짓이죠?”
“계속하실 건가요, 루엘라?”
“하아….”
그녀는 우리를 노려보고서는 얌전히 한 걸음 물러났다.
“…나는, 그런 거 인정 못해.”
루엘라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사라져버렸다.
나는 그녀가 사라진 창문으로 달려가며 그녀의 흔적을 쫓으려 했지만, 이미 그녀는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에릭! 무사해?”
“유니… 괜찮아. 싸우지는 않았으니까.”
걱정하는 그녀를 안심시키고 나는 세라를 바라봤다.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차가운 표정으로 루엘라가 사라진 창문을 바라보던 그녀는, 내 시선에 나를 돌아보고 생긋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이게… 다 무슨 일이죠?”
“제가 말해드릴 것 같나요?”
역시 이렇게 나오는 건가….
“세라, 네가 말하지 않는다면 내가 말하겠어.”
그러나 이번에는 에르티나가 옆에 있었다.
그녀는 한 걸음 앞에 나와 세라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하아… 그래요, 그럴 바에는 그냥 제가 말하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우리 방의 의자 하나를 꼬리로 슬쩍 가져오더니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들 편하게 앉아요. 조금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으니.”
우리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도 좋은 걸까?
앉아있으면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비하기가 어려운데.
“무슨 일이 있으면 제가 보호해드리죠. 걱정 말고 앉아주세요.”
에르티나까지 이렇게 말하니까… 괜찮겠지.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그나저나 여기 의자 2개 밖에 없는데, 자연스레 세라와 에르티나가 쓰고 있다.
우리는 우리 방이면서도 결국 침대에 앉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뭔가 묘하게 불편한 풍경이지만, 그렇다고 고작 이런 걸로 대화의 흐름을 끊기도 애매하고….
나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음… 아마 궁금한 건 무척이나 많겠죠? 그 중에서 뭘 먼저 설명을 드려야 할까….”
“너희 셋, 내가 보기에는 다 행동목적이 다른 거 같은데 왜 그렇지?”
세리아가 이전부터 궁금했던 점을 먼저 들고 나왔다.
루엘라는 알기 쉽다. 우리가 마왕을 죽이는 것을 저지하는 것.
마왕의 직속 부하인 만큼 당연한 행동이다.
그러나 세라와 에르티나는?
세라가 마왕을 섬기는 것은 분명해보이지만, 그녀의 행동은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점이 있다.
하물며 에르티나는 어떤가? 그녀는 사천왕이면서도 대놓고 마왕을 적대한다.
왜 마왕은 그런 그녀들을 내버려두지?
“좋은 질문이네요. 마침 지금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고.”
에르티나는 대화에 끼어들 생각이 없는지 가만히 세라만 바라보고 있었다.
세라는 싱긋 웃으며 중요한 비밀을 한 가지 풀어놓았다.
“그야 당연히, 마왕님께서 묵인하셨기 때문이죠.”
“…왜?”
왜, 자신에게 손해가 될지도 모르는 행동들을 묵인하지?
“마왕님은 당신들에게 죽기만을 바라고 있어요.”
“……뭐?”
그게 무슨 소리지?
“그 분이 새로운 마왕이 되신 후 가장 먼저 하신 것은 곧장 아무도 찾아오지 못하는 곳에 틀어박혀 향락을 즐기는 것이었어요.”
이전 마왕의 모든 재보와 힘.
그것을 얻은 지금의 마왕은 그런 사치를 누리느라 침공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정말 황당하게도, 그것이 그 사이 전쟁이 없었던 이유였다.
마족들의 왕이 자기 여자들과 놀고먹기 바빠 그런 곳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평화네요.”
이 말을 들은 아린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후후, 맞아요. 아무리 써도 끝없는 돈이 있으니, 못해볼 것이 하나도 없었죠. 정말 많은 것을 해보고, 즐겼어요.”
그러나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10년이 넘어 100년이 다 되어가니 더 이상 그들에게는 안 해본 것이 없었다.
“네,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한 거죠.”
그 때마다 어떻게든 새로운 것을 해보고, 또 질리고.
질리면 다른 것을 찾고, 또 질리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보니 남은 것은 단 하나밖에 없었어요.”
죽는 것.
마왕이 되어 불로불사의 몸을 가진 그를 죽일 수 있는 것은, 여신의 축복을 받은 나밖에 없었다.
“그럼….”
“네, 이 모든 것은 마왕님의 마지막 유흥이에요.”
이 모든 여정이…
아니, 이 전쟁 자체가 그저 마왕의 유흥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저 따분해졌다는 이유만으로 시작한 전쟁?
“그 분이 저희에게 내린 마지막 명령은, 용사를 죽이지 말 것. 이것뿐이었어요.”
“…웃기지 마!”
그 말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일어난 것은 세리아였으나, 그 말이 그녀 혼자만 화가 났다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모두는 그녀의 말에 분노하고 있었다. 세리아는 우리를 대표했을 뿐.
“그럼 뭐야, 이게 전부… 전부 그 놈의 놀이라고?”
“물론… 아니, 우선은 그런 걸로 해두죠.”
세리아의 주먹이 분노로 떨렸다.
무언가 석연찮은 말이었지만,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쓰기에는 지금 들리는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럼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마물들은, 전부 그것 하나만을 위해 죽어간 건가요?”
“맞아요.”
아린이 눈을 감았다.
“그럼, 그럼 스승님이 절 도와주는 것도….”
“저는 마왕을 용서할 수 없어요.”
에르티나는 우리와 비슷한 분노를 띄며 그렇게 말했다.
“저도 여러분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런 건… 이런 건 말도 안 됩니다.”
이 기회를 통해 에르티나의 과거를 들을 수 있었다.
마왕성 앞에 도달할 당시, 그녀는 이미 지금의 마왕과 강제로 몸을 섞은 상태였다.
비록 마음까지 빼앗기지 않았다고는 하나, 그녀 혼자의 힘으로는 용사를 배신한 셋을 이길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용사와 함께 그의 사천왕으로 개조당해버렸고….
“잠깐, 용사도…?”
“당신들이 쓰러뜨렸죠?”
우리가 쓰러뜨린 사천왕….
그 해골을 말하는 것인가.
우리 모두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용사님은… 인간이 아니게 된 이후로 급속도로 정신이 붕괴되셨어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온 그가 결국 인간을 죽여야만 하는 마족의 편이 되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신 거겠죠.”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 우리의 선배를 죽인 것이다.
“읏….”
충격적인 진실에 내 몸이 떨리자, 유니가 내 손을 잡아주었다.
“유니….”
그녀의 체온 덕분에,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저는 도망쳤어요. 강제로 사천왕 같은 것이 되어버렸지만, 용사님이 무너지고 사치와 향락에 잠긴 그들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스스로 봉인되는 길을 선택했고….”
그녀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다.
“저를 데려간 루엘라와 세라가 말해주더군요. 마왕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제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더 이상 방해하지 않겠다고.”
그래서 에르티나는 사천왕이면서도 대놓고 마왕을 적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왕 본인이 그것을 바라고 있으니까.
“…뭐, 저희를 욕하시고 싶다면 얼마든지 하세요. 다 맞는 말이니까.”
“……그럼 너와 루엘라가 태도가 다른 건?”
세리아의 말에 세라는 살짝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그 분을 보내드리고 싶어요. 그것이 마왕님의 바람이라면, 신하이자 연인이었던 자로서 보내주고 싶거든요.”
세라의 생각이 그러한 반면, 루엘라는….
“그녀는 인정하지 못한 거죠. 마왕님이 죽기를 바라지 않는 거예요.”
죽게 내버려달라는 그의 말을 들어주고 싶지 않은 루엘라.
그 또한 마왕에게 충성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으음….”
충격적인 사실들이 잇달아 쏟아졌다.
궁금했던 부분들이 덕분에 깔끔하게 풀리기는 했지만, 덕분에 더 답답해졌다.
이 여정이 전부 그의 계획대로였단 말인가….
“그래서, 이런 걸 다 말해주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물어봤잖아요?”
“…이렇게까지 다 말해줄 이유는 없었을 텐데.”
세리아의 말대로, 우리가 상황 설명을 요구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이렇게 자세하게 속속들이 알려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냥 의견 불일치로 다툼이 있었다 정도로만 하고 넘겨도 됐을 것을, 왜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해줬지?
“…같은 처지인 여러분들이 안타까워서 그랬을지도요.”
“원래 저렇게 남이 충격 받는 걸 보기 좋아하는 여자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어머, 누가 보면 오해하겠네요.”
“그렇다고 틀린 말도 아니지.”
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니, 한 때 존재했을 그녀들 간의 유대가 느껴졌다.
사천왕이 되고 갈기갈기 찢겨버렸지만, 시간이 자연스레 치유해준 그녀들의 유대.
“아무튼 얘기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요. 더 질문 있나요?”
주어진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질문을 할 겨를이 없었다.
우리 모두가 침묵에 잠기자, 세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마왕성까지 잘 부탁드려요.”
탁.
세라는 그렇게 말하고 나가버렸다.
“유니, 훈련은… 내일 계속 하자.”
에르티나도 그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
자리에 남은 우리들은 그녀들이 했던 애기를 곱씹으며 진실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하아….”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한숨이, 방 안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