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 [용사] 진실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으음… 아린?”
보통 이럴 때 나를 깨우는 건 세리아 아니면 아린이었다.
잠든 우리들을 교대시간에 깨워야하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그 둘 다 아니었다.
“…나야, 에릭.”
“유, 유니?”
유니가 나를 깨우고 있었다.
왜 나랑 같이 일어나야 할 유니가 나를 깨우는가?
분명… 먼저 자라고 그랬지.
설마, 설마 이 시간까지 안 자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그 동안 대체 무엇을….
“읏….”
그녀에게서 냄새가 났다.
평소에 나는 그녀의 향이 아니다.
그런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역한 이 냄새는… 남자의 냄새다.
내 것이 아닌 다른 남자의 냄새.
“……이제 우리 차례야.”
“으, 응….”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이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평소보다 훨씬 진하게 나는 이 냄새를,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렇게까지 그녀에게서 남자… 그것도 밤꽃 같은 냄새가 날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후우, 후우.”
손 끝이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흥분인가? 아니면 분노?
“나갈… 게.”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유니의 표정을 살폈으나 그녀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마치 나를 피하듯, 고개를 슬쩍 돌려버린 것이다.
우리는 말없이 천막을 나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말끔한 바깥 풍경이 우리를 반겼다.
“미리 치워뒀어. 보기 안 좋으니까.”
“고, 고마워.”
그렇다면 왜 평소에는 안했던 걸까?
그런 의문이 순간 들었지만, 생각해보니 그녀가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이렇게 준비한 적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니는 그렇다면 그들이 천막으로 돌아가고, 이 상황을 정리할 시간까지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설마 세리아나 아린이 교대하러 들어와서 유니만 깨우고 갔을 리는 없다.
적어도 둘 중 하나를 깨운다면 날 깨웠지 그녀를 깨우지는 않았으니까.
그럼… 역시 유니가 날 먼저 재우고 지금까지 자지 않았다고 봐야하는 걸까?
자세히 보니 살짝 피곤해보이는 거 같기도 하다.
“유니, 혹시 피곤해?”
“어? 아, 아냐, 나는… 나는 괜찮아.”
유니는 내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란 것인지 말을 더듬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이 뒤로 잠시 대화가 끊기자 머뭇거리며 유니가 말을 걸었다.
“…그렇게 보여?”
“조금….”
“그렇구나.”
유니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나는, 보고야 말았다.
고개 숙인 그녀의 머리 뒤쪽에, 살짝 눌러붙은 하얀 무언가를.
두근.
심장이 다시 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내 것은 아니다.
그럼, 그럼 역시… 유니는 그 남자와….
“…에릭.”
“읏, 후우… 후우….”
어디까지 한 거지?
온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역시 끝까지 해버린 걸까?
아니면, 아니면 아직 거기까지는 아닌가?
제발 후자이기를 바라면서도, 속으로는 전자를 바라는 내가 있었다.
사랑하는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안기며 허덕이기를 바라는 뒤틀린 성벽.
나는… 이 성벽 때문에 그녀를 희생시키고 만 것이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슬프면서 동시에 흥분되었다.
“커졌어. 혹시… 하고 싶은 거야?”
“유니, 읏….”
하고 싶다.
당장 그녀를 껴안고 내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오직 나만 남길 수 있는 표식을… 남기고 싶다.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아, 아냐. 다음에… 다음에 하자.”
내 상상이 맞다면 그녀는 지금까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 남자와 강제든 합의든 어떠한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그들이 돌아갈 때까지 그것을 계속해 지금 나를 깨운 것이라면… 지금 유니에게 필요한 것은 수면이다.
“그보다 피곤하지 않아? 잠깐 눈이라도 붙이는 게 어때?”
“에릭….”
그녀는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바보 같은 말이었다.
그 말을 하는 것부터가, 이미 둘이 같은 시간대에 깨어있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인데.
“…읏.”
유니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그녀는 내가 화를 내기를 바라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왜 그런 남자와 몸을 섞은 것이냐고, 유니는 나의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해주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다 알면서도…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면 정말로 그녀가 더 이상 외도를 저지르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면 더 이상 내가 흥분하지 못할 것 같아서….
“미안해. 그럼 잠시만….”
“응, 잠시 쉬어.”
유니는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그녀의 올려다본 시선 끝에 내가 있었다.
“에릭, 사실 나….”
“괜찮아. 다 괜찮으니까… 우선은 잠시 쉬어.”
아직, 아직 밝히지 말아줘.
정말 미안하고 끔찍한 말이지만… 나는….
“후우….”
눈을 감은 유니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나는 그렇게 한숨을 쉬었다.
대체 나는 왜 이런 성벽을 갖게 된 것일까.
세리아나 아린이 유도한 것이라 봐야 하는가?
영향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단지 그것 때문만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해보였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이 문양이라거나.
나는 슬쩍 팔을 걷어 그곳에 새겨진 문양을 바라보았다.
거의 보이지 않는 꽃 두 송이와, 이전보다 조금은 작아진 꽃 한 송이.
작아진 유니의 꽃은, 그 줄어든 만큼 다른 곳에서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문양은 어떻게 되었을까?
확인해보고 싶지만, 유니가 어깨까지 덮는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확인해볼 수도 없다.
이걸 들췄다가는 그녀가 일어나버리겠지.
나는 살짝 손을 올려 유니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면서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서로 달라붙어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쓸어내리는 내 손은, 자꾸만 서로 엉긴 그녀의 머리카락에 부딪혀 멈추고 말았다.
그렇게 며칠의 새벽이 지나고, 우리는 다음 마을에 도착했다.
***
“…싸우셨나요?”
“아, 아뇨.”
“안 싸웠어요.”
간만에 나타난 에르티나가 가장 먼저 한 말은 이것이었다.
그녀가 보기에는 이 분위기가 싸운 뒤의 어색함으로 비치는 걸까?
“서로가 가까워진 만큼 싸울 일도 많아지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조금 자제해주세요. 이제 곧 마족의 영토에 들어섭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요.”
그녀의 말대로, 이 도시 다음부터는 마족의 영토다.
즉 이 도시는 일종의 국경 최전선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이 도시는 요새 같은 느낌이 더 강했다.
도시에 민간인보다 군인이 더 많은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이 도시의 영주와도 한 번 대면을 했는데, 그는 우리에게 행운을 빌어주면서 부디 좋은 소식을 들려달라며 우리에게 부탁을 했다.
직접 전투를 치루는 입장인 만큼, 하루라도 빨리 이 전쟁이 끝나길 바라는 것이겠지.
그것은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유니는 다시 에르티나와 수련을 하러 나갔고, 홀로 남은 나는 방 안에서 연습에 힘쓰고 있었다.
한 차례의 신성력 운용을 마치고 잠시 쉬고 있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엇….”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무언가에 붙들린 것처럼 이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내려다본 내 몸에는, 무언가 새까만 넝쿨 같은 것이 휘감겨 있었다.
이건… 대체?
“늦어요. 너무 늦어요.”
곧 익숙한 목소리가 창가에서 들렸다.
이 목소리는….
청록빛 머리의 루엘라가 창문 밖에서 이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설마 이렇게 대놓고 습격을 하다니…!
그 동안 없었던 일이라 무심코 방심했던 모양이다.
그래, 이곳은 마족의 영토 바로 앞인데!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넝쿨의 단단함을 확인해봤다.
굵고 단단하다.
그렇지만 부수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나는 신성력을 두르고 힘을 주어 단숨에 그것을 끊어냈다.
우드득! 찌직!
“이걸 한 번에… 역시 점점 강해지고 있군요.”
“무슨 속셈이지? 여기서 나를 죽일 생각이었나?”
나는 옆에 뉘여있던 검을 재빨리 집어 들었다.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당신을 죽여서라도 마왕님을….”
마족의 영토 코앞까지 도착한 걸 보니 불안함이 들었던 것일까.
루엘라는 마왕이 죽을 것을 염려해 나를 미리 처리하려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이길 수 있나?
그러나 저번과는 상황이 다르다.
옆방에는 세리아나 아린도 있고, 바로 밑에는 유니와 에르티나도 있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나를 공격하겠다고?
“그거 아시나요? 지금 이 방은 그 어떤 소리도 새어나가지 않게 결계를 쳐뒀어요. 당신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오지 못한답니다.”
“그런 결계는 찢어버리면 돼.”
듣고 보니 무언가 마력으로 된 막이 이 방을 뒤덮고 있다.
이것이 그녀가 말한 결계인가?
어차피 그녀들이 이 결계를 눈치 못 챌 리가 없다.
분명 밖에서도 그녀들이 무언가 하고 있을 터.
빠르게 결계를 찢고 그녀들과 합류해야겠다.
“제가 그 동안 당신을 가만히 놔둘 것 같나요?”
“그 때와는… 다를 거야.”
자신은 없지만, 허세를 부리며 그렇게 대답했다.
루엘라는 그런 내 모습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더 위험해지기 전에 미리 싹을 뽑아야….”
나를 죽일 생각인가.
나는 어떻게 하면 그녀의 공격을 막으면서 동시에 결계도 찢어버릴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내가 신성력으로 결계를 찢어버리는 그 빈틈을, 그녀는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하게 이기기 위해서는 내가 결계를 찢고 우리 파티원들과 합류해야만 한다.
우리는 서로의 동작을 감시하며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긴장상태를 유지했다.
그런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누군가 방문에 대고 노크를 했다.
똑똑.
“…대체 누가?”
루엘라는 순간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계가 깨진 것인가?
아니, 깨지지 않았다. 무언가 마력이 이 방을 감싸고 있는 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면 저건 누구지?
루엘라도 예상하지 못한, 제 3의 인물은…?
똑똑.
“아무도 없는 거죠? 그럼 저 들어갈게요?”
덜컹!
잠겼을 터인 문을 열고 들어온 제3자는… 세라였다.
그녀는 꼬리를 살랑거리면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엘라를 바라봤다.
“어머, 신기하네요. 왜 빈 방에 루엘라와 용사가 있을까요?”
“……세라.”
사천왕이 둘씩이나?
왠지 사태가 더욱 심각해질 것만 같아 나는 검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