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 [용사] 한 잔
축제 당일이 찾아왔다.
도시는 아침부터 시끌벅적했고, 아마도 본 축제는 저녁부터겠지만 그럼에도 벌써부터 사람들은 축제분위기로 한창 달아올라 있었다.
뭐, 우리 같은 외부 사람들도 눈치껏 어울릴 수는 있겠지만 딱히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냥 그 분위기만 즐기기로 했다.
“도시라고 해도 수확제하는 건 비슷하네, 그치?”
“그러게.”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하긴 하다.
여기서는 농사를 안 짓는데 수확제라니.
유니가 들은 바에 따르면 주변 마을들이 다 이 시기에 수확제를 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들이 오고가는 이 도시에서도 축제가 벌어지는 것이라 한다.
원래 그런 법인가?
맨날 시골 농촌에서만 살아서 이런 건 잘 모르겠다.
“후후, 우리도 뭔가 할까?”
“뭐를?”
“으음… 축제 구경!”
유니가 보고 싶다면 못 갈 것 없지.
우리는 그렇게 축제 속에 끼어 맛있는 것과 즐거운 것들을 구경하며 하루를 보냈다.
참 충실하고도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구경하면서 술도 조금 마시고 하다보니 저녁을 먹고 방으로 올라올 때쯤에는 우리 둘 다 약간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아하하, 에릭, 이거 봐! 술 받아왔어!”
“오오…!”
유니가 어디선가 술을 가져왔다!
우리는 조촐하게 방 안에서나마 둘이서 술잔을 기울이기로 했다.
“후후, 에릭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되는 거 알지?”
“응, 당연히 알지… 아직은 괜찮아.”
취해서 쓰러지지만 않을 정도면 되겠지.
어차피 이 방에는 우리 둘 밖에 없는데 살짝 취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도 없으리라.
나는 술을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냐?”
“괜찮아, 괜찮아.”
그러나 실컷 마시는 나와는 달리 유니는 술을 그리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유니는 안 마셔도 돼?”
“아, 나는 조금만 마실게. 너무 많이 마시면 다음 날 머리가 아파서….”
“그래? 혼자 마시니까 조금 느낌이 이상한 걸.”
왠지 나 혼자만 주정뱅이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잖아.
“그, 그래? 그럼 나도 조금만 더 마셔볼게.”
유니는 내 기분을 배려한 것인지 아까보다 조금 더 많이 홀짝이기 시작했다.
으음… 왠지 나 때문에 억지로 마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드네.
괜찮은 건가?
“응? 아, 괜찮아. 나 이래보여도 술은 제법 세거든! 우리 아빠 주량 알지?”
“아… 정말 괴물 같은 분이셨지.”
마을에서 축제가 벌어지면 항상 마지막까지 마시고 있는 게 촌장님이었다.
하긴, 그 핏줄을 이어받았으면 유니도 술에 무척 강하리라.
생각해보니 나도 그녀가 취한 모습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유니는 술에 취한 적 없어?”
“응? 음… 예전에 아빠가 엄청 강한 술을 구해오신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빼고는 거의…?”
역시 그렇구나.
생각해보면 우리 성년식 때도 유니는 우리들 중 유일하게 끝까지 취하지 않았다.
역시 그 핏줄은 어디 안 가는구나….
“에릭은 좀 조심해. 생각보다 약한 거 같던데….”
그야 그녀에 비하면 다들 약하게 보이겠지만, 솔직히 나 정도면 평균이다.
유니가 비정상적으로 센 거지 절대 내가 약한 게 아니야!
“으음… 하암.”
“응? 벌써 피곤해?”
“아… 이상하게 많이 마시면 피곤하더라.”
이게 내 주사인가?
이상하게 많이 마시면 점점 피곤해진다.
성년식 때도 나 혼자 마시다 잠들었었지.
유니는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그만 마시라며 술잔을 빼앗았다.
“아앗….”
“에릭은 이제 술 금지. 나만 마실 거야.”
이상하네, 정말 별로 안 마셨는데 왜 이렇게 많이 마신 것 같지?
혹시 생각보다 강한 술인가?
“으음… 확실히 좀 센 것 같긴 하네….”
유니도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원래부터 주량이 강한 편이라 그런지 딱히 마시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응? 누구지?”
“으음… 어라?”
정령을 불러 바깥을 살핀 유니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세리아랑 아린이네. 같이 마실 생각인 거 같은데?”
“둘이?”
굳이 나랑?
조금 의아했지만, 혹시 술을 통해 다시 벌어진 거리를 메우려는 생각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녀들을 초대했다.
“정말 부르려고?”
“유니가 싫다면 거절해도 괜찮아.”
내 말에 그녀는 떨떠름한 기색을 보였다.
“…불러. 내가 더 조심하면 되니까.”
마치 그녀들이 무언가 다른 일을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말투였지만, 나는 그래도 그녀들을 믿고 싶었다.
우리가 다시 가까워질 수 있기를.
“안녕하세요, 에릭 씨, 유니.”
“벌써 냄새가 진동하네.”
그녀들은 쿡쿡 웃으면서 방에 들어왔다.
손에는 이것저것 들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다 술인 것 같다.
“어디서 이런 걸 다 가져왔어?”
“주인님이 가져오셨던데? 나도 잘 몰라.”
그 남자가….
왠지 살짝 꺼림칙한데.
“또 무슨 이상한 계획을 꾸미고 있는 거야?”
유니가 나를 대신해 얼굴을 찌푸리며 그렇게 물었다.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저희는 다 같이 마왕을 타도해야 하는 입장이잖아요? 이렇게 계속 어색하게 지내서 좋을 거 하나 없으니까… 다시 좀 친하게 지내자는 뜻에서 온 거죠.”
다시 친하게라.
과연 내가 그녀들과 다시 예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너무 늦었어.”
“예전처럼 돌아가자고는 하지 않을게요. 적어도 지금처럼 두 편으로 갈라져서 다니지만 말자는 거죠.”
그녀들은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레 내 손에도 잔을 쥐어주었다.
“잠깐만, 에릭은 많이 마셔서….”
“약한 걸로 줄게.”
세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내 잔에 술을 부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아, 응….”
반밖에 차지 않았는데, 이 정도는 괜찮겠지?
슬쩍 손을 뻗기가 무섭게 유니가 잽싸게 내 잔을 낚아챘다.
“안 돼, 에릭한테 자꾸 더 주지 마.”
“그럼 혼자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으라고?”
세리아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봤지만, 유니는 대신 나에게 맹물을 따라주었다.
“더 취하면 잠들 테니까 이 정도로 해.”
그냥 물이잖아?
살짝 아쉽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나는 그렇게 그녀들과 물과 술잔을 기울였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다 같이 모여 마셨던 적은 없는 것 같네요.”
“뭐,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옛날이야기도 하고, 이런저런 화제로 대화하다보니 어느새 그 분위기에 취해 나도, 유니도, 모두 술을 잔뜩 마시고 말았다.
유니는 별로 마실 생각이 없는 것 같았지만, 끈질기게 권하는 그녀들 때문에 한두 잔 정도만 마셨는데 제법 독한 술이었는지 살짝 취한 모습이었다.
“…얼마나 센 걸 가져온 거야?”
“어머, 생각보다 술에 약하시네요.”
그녀와 술잔을 나눈 아린은 멀쩡한 얼굴이었다.
아린도 생각보다 술에 강하구나.
설마 유니가 취했는데도 그녀가 멀쩡할 줄은 몰랐다.
“후후… 아직 더 마실 수 있죠?”
“아냐, 이제 그만….”
“이걸로 따라드릴게요. 아까보다 더 약한 거예요.”
아린은 그녀에게 계속 술잔을 내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유니도 같이 마셔주는구나.
그래도 이러고 있으니 마치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 오랜만에 반가운 느낌이 든다.
“자, 에릭.”
“아, 고마워.”
나는 무심코 세리아가 내민 잔을 들고 마셨다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화끈한 감각에 흠칫 놀랐다.
“이거….”
“후후, 유니에게는 비밀이야.”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유니는 아린에게 붙잡혀 정령으로 나를 살필 틈이 없는 것 같았다.
더 마시면 정말 취할 텐데….
“나랑은 안 마셔주는 거야?”
“……이 잔만이야.”
“고마워.”
나는 생긋 웃는 그녀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제법 도수가 높아 보이는 잔을 쭉 들이켰다.
그로부터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드물게도 조금 취한 유니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녀의 주사도 나와 비슷하게 잠드는 것인 듯 했다.
아린은 자꾸만 꾸벅꾸벅 조는 그녀를 깨우다가, 어느 순간이 되자 자게 내버려뒀다.
물론 이를 확인하는 지금의 나도, 이미 반쯤 졸고 있지만….
“에릭?”
“…응.”
“피곤하면 여기까지만 할까?”
“……응.”
세리아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일어나다가 잠시 비틀거렸다.
“으음… 나도 좀 많이 마셨나보네.”
“세리아도 그냥 거기 계세요. 제가 불러올 테니.”
불러와…? 누구를?
“아린, 왜 이렇게 멀쩡해?”
“저는 축복이 있으니까요.”
“뭐야 그거, 비겁….”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아무래도 축복으로 취기를 전부 없애버린 것 같은데, 부러운 방법이다.
아, 나도 쓸 수 있나 그러면?
아니, 이제 와서 둘의 기술을 쓰기는 힘들겠지.
막혀버린 그 기술들을 억지로 쓰려고 해봐야 서로만 아플 뿐이다.
나는 밑으로 내려오는 눈꺼풀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다가, 결국에는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
“으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키니, 벌써 주변은 아침이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걸 보니 그녀들이 옮겨준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나는, 문득 내 허리에 누군가 감겨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니….”
유니가 알몸으로 내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지금 보니 나도 옷 한 벌 걸치고 있지 않다.
설마 취한 상태로 유니와 해버렸나?
슬쩍 이불을 들춰 유니를 바라보니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잠든 그녀의 다리 사이로 젖은 흔적이 흥건하게 남아있었다.
“으응…?”
그 바람에 유니도 잠에서 깼는지 멍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아, 에릭….”
그녀는 나를 바라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어제 너무 좋았어….”
그러면서 유니가 나를 세게 안았는데, 무엇을 했는지 기억 못하는 나로서는 조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뭘 했더라…?
그 대답은 유니가 정신을 차린 오후가 되어서야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정말 기억 안 나? 평소와는 달리 너무 잘해서 약간 이상할 정도….”
유니도 말하다가 이상한 점을 느꼈는지 입을 다물었다.
“…유니?”
“나… 나 잠시 나갔다올게.”
유니는 창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금방… 금방 돌아올 테니까.”
유니의 다급한 태도에서 나도 무언가 불안한 점을 느꼈다.
평소보다 더 잘했다고?
일단 나는 어제 유니와 했던 기억도 없을뿐더러… 술에 취했다고 갑자기 기술이 좋아졌다거나 그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설마 우리가 술에 취해 잠든 사이에….
“읏….”
나는 서서히 일어나려는 내 자지를 손으로 꽉 눌러 막으려 했다.
이런 걸로 서버리면 정말 최악이다.
더 이상… 억제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그렇지만 내 머리와 가슴은 서로 따로 움직이는 것인지, 내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발기해버렸다.
평소보다도 더 심하게.
머리와 가슴 사이에서 한참을 갈등하던 나는 서서히 손을 밑으로 내렸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하고 그만두자.
유니도 곧 돌아올 테니까.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지.
그러니까… 딱 한 번만.
그렇게 나는 유니가 돌아올 때까지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며 발기한 내 자지를 가라앉히는데 애썼다.
그러나 내가 몇 번이고 사정하고 제정신을 되찾았을 때까지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