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 [용사] 활짝 열린 창문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유니가 없었다.
“유, 유니?”
당황한 나는 급히 일어나 그녀를 찾았지만, 유니의 모습은 방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지?
문득 어제 모습이 생각났다.
평소보다 늦게 들어온 그녀와, 그녀의 손에 묻어있던 하얗고 끈적이는….
다급히 옷을 챙겨 입고 방문을 나가기 직전에서야 나는 유니가 지금쯤 에르티나와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그렇지. 요즘 매일 그러고 있었잖아.
오늘도 내가 늦게 일어나서 유니가 먼저 나갔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 생각을 못하고 이런 상상부터 하고 있었다니.
스스로가 바보 같아졌다.
나는 한숨을 쉬고 다시 침대에 누우려다가, 나갈 채비를 마친 내 모습을 보고는 그냥 잠시 바람이나 쐬다 오기로 했다.
방문을 열고 나오자, 참 운이 없게도 저편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아린과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에릭 씨.”
“……응.”
부스스한 그녀의 머리카락은 아직 손질을 제대로 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알던 그녀는 단 한 번도 이랬던 적이 없다.
언제나 깔끔하고 단정하게 정리하고 다녔던 그녀의 머리카락은 지금은 자다 일어나서 그냥 나온 것처럼 푸석푸석했다.
“아, 못 볼 꼴을 보여드렸네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녀는 위로 뜬 머리카락을 대충 손으로 누르면서 하품했다.
“산책인가요?”
“응. 아린은….”
“후후… 듣고 싶으세요?”
“…아니.”
그녀는 쿡쿡 웃고서는 방 안을 한 번 곁눈질로 살피고는 물었다.
“혹시 저도 같이 산책해도 될까요?”
“어? 으, 응….”
갑작스런 그녀의 제안.
무심코 받아들이고 말았지만, 설마 또 저번처럼 나한테….
“이상한 짓 안 할 테니 걱정 마요. 그럼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어요? 간단히 좀 준비하고 나올게요.”
그녀는 그러면서 문을 쿵 닫고 들어가 버렸다.
갑자기 무슨 일일까.
어쩌면 어제 일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초조하게 아린을 기다렸지만, 그녀가 방 밖으로 나온 것은 꽤나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후우… 죄송해요. 좀 오래 걸렸죠?”
그렇게 말하며 방 밖으로 나온 아린은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짧아진 머리카락과 과하게 트여있는 신관복.
이제는 익숙해지고 만 그녀의 평소 차림이다.
“남자 분들과는 달리 씻는데 시간이 좀 걸리거든요. 그래도 많이 줄어든 거예요. 예전처럼 긴 머리를 관리할 필요가 없어서….”
“그, 그렇구나.”
나는 기분 좋은 듯 재잘거리는 그녀의 말에 어색하게 동의했다.
숙소 밖에 나와서도 주로 아린이 적극적으로 말을 걸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대답을 하고, 또 가끔은 그녀가 유도한 화제를 꺼내면서 그녀와 잠시 바깥을 거닐었다.
숙소 뒤에서는 유니와 에르티나가 훈련 중이겠지.
왠지 나 혼자만 노는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신경 쓰이세요? 유니에 대해서.”
유니는 훈련하고 있는데 나는 이렇게 놀고만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겠지?
아니면…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제 그 하얀 액체와 관련된 얘기라거나.
“…후후. 에릭 씨는 잘 모르겠지만 유니도 훈련하면서 자주 쉬거든요. 휴식이 없으면 오랫동안 할 수가 없어요.”
“그, 그렇지.”
“그러니 에릭 씨가 지금 이러고 있는 걸 너무 자책하진 마세요. 어차피 돌아가면 또 연습할 거잖
아요?”
아마 내가 묘한 죄책감에 쌓여있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이다.
배려는 고맙지만, 사실 내가 지금 유니를 신경 쓰는 것은 그것 때문만이 아니다.
“두 분 사이에 무슨 일 있으셨나요?”
“어?”
티가 많이 났나?
내가 잠시 우물쭈물 거리자 아린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저는 신관이잖아요. 이런 상담에는 자신이 있는데.”
“아, 아냐. 그냥… 그냥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랬어.”
내 취향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유니에게는 도저히 말할 수 없지만, 자꾸만 그 때문에 갈증을 느낀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국 이 사실을 최대한 돌려서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도무지 할 수가 없다구요?”
“응, 그… 이유는 묻지 말아줘.”
내 말을 들은 아린이 쿡쿡 웃었다.
“왜 그래?”
“…아뇨, 이상한 고민을 하는 것 같아서요.”
“이상하다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구나.
이런 걸로 고민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테니.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절대 알리고 싶지 않다는 거겠죠?”
“응.”
“그럼 끝까지 말하지 마세요. 알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으면, 그렇게 하면 되는 거예요.”
“그치만….”
내 사소한 항의에 아린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얘기하고 싶지 않은 거죠?”
“…응.”
“그럼 참으세요. 아니면 포기하고 털어놓던가요.”
단호하기 그지없는 말이지만, 아린이 말한 대로였다.
유니가 다른 남자에게 안기는 것을 보고 싶지만, 동시에 유니가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유니를 상처 입히는 것보다, 다소 부족하더라도 지금 이 상태를 유지하며 유니와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내 욕망에 이끌리며 고민하고 있었다.
“한 가지 방향을 정했으면, 끝까지 밀어붙이세요.”
그래, 이미 결론은 내렸지.
내렸는데도 나는 계속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러네. 고마워.”
“후후… 별 거 아니에요. 누구라도 다 이렇게 대답할 걸요.”
그렇지만 그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하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지.
나는 아린에게 솔직하게 고마움의 인사를 전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겠지만, 유니를 슬프게 하는 것이라면 끝까지 말 안 하는 편이 좋겠네요.”
“그, 그렇지.”
그런데… 정말 그녀는 모르고 있을까?
저번에 유니가 보여줬던 태도로 보아 무언가를 눈치채기는 한 모양이지만, 과연 그녀가 어디까지 알았을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었다.
마지막의 내 진심이 전해졌다면 좋을 텐데….
나는 아린과 헤어지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앞마당이 조용하길래 슬쩍 봤더니, 에르티나가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일찍 끝냈어요. 오늘치 목표는 달성했거든요.”
그런 식이었나?
아무튼 일찍 끝났다면 잘 된 일이다. 유니는 방에 있겠지.
“휴, 마당을 원래대로 되돌리느라 시간이 좀 걸렸네요. 내일도 잘 부탁한다고 유니에게 전해주세요.”
“아, 네….”
그녀는 나에게 작별인사를 하고는 돌아갔다.
나도 빨리 돌아가자.
유니가 기다리고 있겠지.
방문을 열려고 문고리를 잡았는데 왠지 문이 제대로 잠겨있지 않았다.
유니가 문을 제대로 못 닫았나?
이런 일은 거의 없는데 별 일이네.
“유니, 잠시 산책하고 돌아왔….”
휘이잉.
잠시 으스스한 바람이 불었다.
“아, 왔어? 미안, 조금 춥지?”
유니가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바람의 정령을 부리고 있는지 방 안에 평소보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상관은 없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잠시 냄새를 지우고 있었어.”
…냄새?
“응. 왠지 오늘은 유독 냄새가 심한 거 같아서.”
그랬던가?
나는 느끼지 못했는데.
“후후, 그야 에릭은 거의 하루 종일 방에 있으니까 익숙해진 거지.”
그, 그런가?
듣고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냄새 안 나지?”
“응, 딱히….”
“그럼 됐어. 이제 닫을게.”
그녀는 바람의 정령으로 열렸던 문을 다시 닫고 정령을 돌려보냈다.
“얼굴이 조금 빨가네?”
“아… 그, 그래?”
유니는 내 지적에 잠시 당황하며 얼굴을 매만지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을 멈칫했다.
“…응, 그렇구나.”
“유니?”
“아냐. 그보다… 조금 이르지만 할래?”
이렇게 일찍?
하긴, 그동안은 유니가 늦게 들어와서 늦게 시작했을 뿐이지 딱히 우리가 밤에만 사랑을 나누는 것도 아니다.
“…조, 좋아.”
내 성벽은 묻어두기로 했다.
그러니 유니와 보내는 이 시간을 최대한 만끽하자.
“…이리 와.”
나는 유니에게 다가갔다.
***
“후우, 후우….”
“에릭, 좋았어?”
나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쉬고 있었다.
두 번 정도 사정했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이었다.
“…응.”
사실 약간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므로 나는 그렇데 답했다.
그녀도 분명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구나.”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내 머리를 꾹 눌렀다.
유니가 누르면서 옆으로 머리를 살짝 돌린 탓인지, 내 머리가 벽면으로 돌아갔다.
아무 것도 없어야 할 하얀 벽면.
그곳에는 무언가가 누렇게 눌어붙어 있었다.
“어?”
“…왜 그래?”
나긋나긋한 목소리.
순간 충격으로 굳어버린 나에게, 유니는 귓가에 입을 가져다대고 속삭였다.
“혹시 이상한 거라도 본 거야?”
“…….”
당연히, 내 것은 아니다.
물을… 뿌린 걸까?
아니, 그냥 물은 이렇게 눌어붙지 않는데….
그럼, 이건….
이 정액은…….
두근두근.
두 번 사정하고 완전히 지쳐버린 줄 알았던 내 몸이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한 번 더 할 수 있어?”
“아… 응.”
“그럼 해줘.”
“응….”
나는 끓어오르는 내 욕망을 그녀에게 쏟아 부었다.
“하악, 하악….”
“흐읏, 흐으… 에릭….”
나는 거세게, 유니를 괴롭히듯 강하게 그녀의 몸을 유린했다.
“유니, 나….”
“응, 좋아.”
그녀가 목을 살짝 꺾자 나는 거칠게 유니를 밀어붙이면서도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에 입을 맞췄다.
까득!
“하읏…!”
“후웃, 후우….”
유니는 아파하지 않는다.
그저 나를 살짝 들뜬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뿐.
“…아프지?”
나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놓아주며 물었다.
“아니… 요즘에는 살짝, 기분 좋아지는 것 같아….”
아픈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아마 이 말은 유니의 배려이리라.
나는 그녀의 배려에 살짝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다시 그녀의 어깨를 깨물었다.
“으읏….”
그녀의 어깨에서 피가 한 줄기 흘러내릴 무렵, 나도 마지막 남은 내 한 줄기 정액을 사정했다.
“하아, 하아….”
“후우….”
이젠 정말로 지쳤다.
나는 그녀의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벽면을 향해 돌아간 내 머리를, 유니는 계속 쓰다듬었다.
“이제 조금씩 알 것 같아….”
“…뭐를?”
“에릭에 대해….”
나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 에릭.”
그녀는 내 머리를 계속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항상 에릭의 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