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 [정령사] 침묵은 결심을 부르고
우리 에릭의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 같다.
그 날 이후 어떻게든 그의 곁에 붙어서 기운을 차리게 도와줬는데,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이게 다 루엘라, 그 빌어먹을 년 때문….
피슛!
“…유니, 집중!”
“읏, 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정령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재빨리 반격을 시도했다.
물의 정령을 날카롭게.
더, 더, 더.
자아가 없는 정령은 비명을 지르지 않지만 요즘은 왠지 비명이 들리는 것만 같다.
그렇지만 스승님이 말했듯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냉혹해져야만 한다.
극한까지 날카로워진 정령을, 에르티나 스승님에게 쏘아내듯 보냈다.
쾅!
당연하게도 그 물줄기는 스승님의 흙벽에 가로막혔다.
이쯤은 예상했다.
그러나 내 목표는 뚫는 것이 아니다.
집중하면 뚫을 수 있지만, 오늘은 그걸 위한 시간이 아니니까.
나는 몇 줄기의 날카로운 물줄기를 쏟아냈다.
쾅! 쾅! 쾅!
“공격이 너무 단조로워!”
알고 있어요.
나는 그녀의 정신을 흐트러뜨리기 위한 물줄기들을 쏟아내면서 조심스레 바람의 정령을 불렀다.
자, 같이 가자.
나는 한 줄기의 물줄기에 날카로운 바람을 휘감고 쏘아냈다.
“소용 없….”
파삭!
흙벽에 물줄기가 닿기도 전에 먼저 칼날 같은 바람이 벽을 갉아 사방에 흙먼지를 퍼뜨렸다.
“앗….”
그리고 내 목표는, 그 흩어진 흙입자들이었다.
타다다닥!
흙먼지였던 것들이 에르티나의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런 식으로 접근했구나. 실용성은 낮지만 아무튼 목적은 달성했네. 좋아, 인정할게.”
“휴우….”
이 대련의 목표는 그녀에게 타격을 입히는 것.
조금 반칙 같지만, 아무튼 흙으로 ‘공격’한 셈이다.
사실 이것도 스승님이 봐준 것 같기는 하지만.
“후, 어쩌다 이런 잔꾀만 늘어가지고는.”
“헤헤.”
그녀가 나에게 다가와 머리를 콩하고 내리쳤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같이 지내다보니 그녀는 생각보다 장난끼가 많고 재밌는 사람이었다.
엘프라고는 해도 인간과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잠깐 쉬자.”
“네!”
우리는 잠시 그대로 바닥에 앉아 쉬었다.
아무 것도 안하고 있으니 문득 에릭 생각이 난다.
에릭은 지금 뭘하고 있을까?
슬그머니 정령을 불러 확인하려 하자 스승님이 말렸다.
“자꾸 그렇게 집착하면 오히려 안 좋아해. 나중에 들키면 곤란해질 걸.”
“…이미 알 걸요?”
“뭐?”
그녀는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도 아무 말도 안 해?”
“헤헤….”
에릭은 내가 하는 말을 거부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고아였던 그는 마을 내에서도 또래들의 놀림을 자주 받고는 했다.
아빠가 촌장인 나에게는 모두가 친절하게 대해줬지만, 그에게는 반대였다.
아무도 그 어린 아이를 보호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실이… 조금 안타까웠다.
“소꿉친구였구나, 너희.”
“네, 제가 먼저 에릭한테 말을 걸었어요.”
아빠는 처음에는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에릭의 타고난 착한 마음씨 덕분에 서서히 마음을 열어갔다.
물론 사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준 거기는 하지만.
우리 아빠가 뭘 좋아하는 지는 내가 제일 잘 알잖아?
“또래 아이들은 자꾸 에릭을 괴롭히기만 하고… 그래서 제가 얘기를 했죠.”
자꾸 괴롭히면 혼내줄 거라고.
덩치를 믿고 제일 나쁜 짓을 하는 아이 한 명을 따로 찾아가 잘 타이르니 그 때부터는 술술 풀렸다.
너무 심했다고 아빠에게 혼나기는 했지만, 아직도 나는 그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빠는 애들 장난이 얼마나 심한지 모르니까.
아이들에게는 말보다 더 가까운 것이 있다.
“응…? 혹시 그 타일렀다는 게… 음, 아냐. 계속해줘.”
아무튼 그 때부터는 아무도 우리 둘을 막지 못했다.
그래, 아무런 장애물도 없었다.
그 날까지는….
그 더러운 남자와 놀아나고 있을 둘을 생각하니 이가 갈린다.
나쁜 년들.
에릭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 큰 맘 먹고 자리를 양보해줬는데 이딴 식으로 상처를 줘?
에릭이 상처입을까봐 말도 못하고 고민하는 사이 일은 점점 커져만 갔고, 그 때쯤 되니 더 이상 이를 막고 자시고가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무슨 방법으로도 에릭의 상심을 막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지.
에릭이 실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적어도 그 마음의 구멍을 메꾸는 것은 당연히 내가 되어야 한다.
그야 그렇잖아?
나 말고 더 적합한 사람은 없으니까.
이왕 그렇게 할 거라면 가장 극적인 형태가 좋겠지.
그러는 편이 에릭의 상실감도 크고, 그런 만큼 나를 더 소중하게 여겨줄 테니까.
“유니, 너 역시 좀 이상한 거 같아.”
“네?”
“보통은 그렇게 생각 안 하거든.”
“…그런가요?”
역시 좀 이상한 건가?
아빠도 이거 가지고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조심해야지.
“그래서 무슨 얘기가 하고 싶었던 건데?”
“…하고 싶은 얘기요?”
그런 말은 한 적 없는데?
“무언가 고민하고 있잖아.”
“아….”
그랬지.
에르티나 스승님은 거의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관찰력이 높았다.
나도 의식적으로 잊으려 했던 그 고민을, 그녀만의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꿰뚫어본 것이다.
“그게….”
나는 이것을 말해야하나 잠시 고민했다.
아무리 그녀가 우리를 도와준다 하더라고 그녀 또한 사천왕….
“나는 유니 편이야.”
“…그랬죠.”
하긴, 어차피 그녀에게는 숨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나는 살짝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 조언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으음… 용사가 뭔가 숨기고 있는 거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네…. 저는 다 괜찮다고 했는데 말을 안 해줘요.”
분명 나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나한테까지 이렇게 입을 굳게 다물고 있을 수가 없다.
“원래 사람은 누구나 하나쯤 비밀이….”
“에릭과 저는 없어요.”
“아니, 누구라도….”
“없어요.”
에르티나가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알았어. 그런 걸로 하자. 아무튼 지금까지는 그랬더라도 앞으로는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거지.”
“그럴 리가….”
“그렇지만 실제로 지금 그렇잖아?”
그녀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그가 지금 나에게 비밀을 갖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니까.
“아무튼 둘이 웬만한 비밀을 다 털어놓을 사이인데도 말을 못한다는 건, 그만큼 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겠지.”
“그런 게 어딨어요? 전 다 이해할 수 있는데.”
“글쎄… 말하면 네가 상처받을 내용이라거나?”
내가 상처받을 말을 에릭이 할 리가 없지.
그렇지만 생각이라면?
나를 상처 입히는 생각 정도라면 에릭도 하지 않을까?
어쩌면 괜히 내 눈치를 보며 말만 안하고 있을 뿐 불만이 쌓인 상태라거나?
설마 그럴 리가.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루엘라 그 녀… 여자 때문에 고민하는 것 같은데, 그거랑 저랑은 아무런 관계도 없잖아요.”
“년 맞으니까 말 안 가려도 돼.”
“아, 그랬죠 참.”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이럴 때마다 그녀가 적이 아니라 친구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네가 모르는 접점이 있을 수도 있지.”
“접점….”
나는 에릭에 대해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아마 본인 다음으로 잘 알지 않을까? 어쩌면 내가 에릭보다 더 잘 알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그런 내가 생각하기에 루엘라에게 진 에릭은 무척 분할 것이다.
분하고,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겠지.
분명 더 강해져야겠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최근 더 열심히 수련에 임하는 것 같아 보였다. 잘 되지는 않는 것 같지만.
그렇지.
에릭은 힘을 더 길러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 에릭은 신성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고 있으니 분명 그 쪽이겠지.
그리고 그 신성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수상하게 가슴만 큰 가짜수녀 세라가 말한 대로 흥분이 필요한데.
흥분… 나에게 상처….
“뭔가 알아냈어?”
“으음… 아직 잘 모르겠어요.”
나랑 하면 기분 좋을 거 아냐.
그러면 그것만으로도 강해지니까 충분한 거 아닌가?
설마 별로 기분 좋지 않았다거나?
아니, 그 반응이 연기일 리는 없는데.
…그 남자에 비하면 확실히 얌전한 반응이기는 하지.
그렇지만 그건 그냥 성격 차이일 것이다.
에릭은 그렇게 천박하게 반응하지 않으니까.
“스승님, 혹시… 남자는 좋아하면 무슨 반응을 보이나요?”
그래, 에르티나는 전대 용사와도 연인이었다고 하니 분명 좋은 대답을 들려줄 것이다.
적어도 전대 용사는 그 남자보다는 에릭을 더 닮았겠지.
“응? 그야 보통….”
그렇지만 그녀가 해준 얘기도 왠지 그 남자의 반응과 더 닮은 것 같았다.
…설마 진짜로 별로였던 거야?
“왜 그래? 표정이 안 좋은데.”
“…혹시 에릭이 저랑 하는 걸 안 좋아하는 거면 어떡하죠?”
“응? 그건 아닐 거야. 좋아하는 거 같던데.”
그녀의 말에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대체 그걸 다 어떻게 아는 거예요?”
“아, 정령들을 활용하면 신체반응 같은 것도 감지할 수 있거든. 오랫동안 관찰하다보니 대충 무슨 감정을 품으면 이런 반응이 나오는 구나 하는 게 느껴지더라고.”
이거다!
이거면 나도 에릭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호, 혹시 그거… 저도 배울 수 있을까요?”
“어? 가능은 한데… 굳이 이런 걸 배울 필요는….”
그녀는 말해주고 싶지 않아하는 것 같았지만, 내가 열심히 조르자 결국 못이기는 척 알려주었다.
이런 건 어릴 때부터 아빠한테 많이 해봐서 익숙하지.
아무튼 덕분에 새로운 기술을 배웠다.
이거면 나도 에릭이 얼마나 흥분했는지 알 수 있겠지.
안 그래도 요즘 살짝 반응이 더 둔해진 것 같기도 한데.
이걸로 확인해 보자.
…비교대상도 있어야겠지?
그 셋 정도면 적당할 것 같다.
그들도 흥분하면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고, 그걸로 기준을 잡으면 에릭이 나와 사랑을 나눌 때 얼마나 흥분하는 지 알 수 있겠지.
부디 기우로 그치기를 바란다.
만약… 만약 내가 생각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 때는….
“내 정신 좀 봐.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유니, 네가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그렇잖아.”
“헤헤, 미안해요. 내일 더 열심히 할게요.”
“하아… 오늘 못한 몫까지 할 거니까 각오해.”
“네!”
그녀와 오늘의 훈련을 마무리 한 뒤, 나는 그녀에게 배웠던 것을 되새기며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그들과, 에릭을 비교해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