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 [짐꾼] 수도와 용사
그리고 다음 날부터 수도를 향한 여정이 다시 시작되었다.
수도라.
참으로 오랜만에 들리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왕이 바뀌었다던데.”
“그 때 뵈었던 태자님이 새로 즉위하셨다죠?”
그랬나?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몰랐네.
아무래도 그 때 용사 일행과 같이 식사를 했던 태자가 새롭게 왕이 된 모양이다.
“듣기로는 마물들과 우호관계를 맺으려한다는 말도….”
“아, 그래서 그 마을이….”
이 부분은 별로 나와는 상관없다.
솔직히 나도 마물들이 좀 껄끄럽기는 하지만, 루엘라도 그렇고 세라도 그렇고 막상 의외로 만나보니 우리와 크게 다를 것 없었다.
뭐… 내 이웃이 질척거리는 슬라임이라거나 그러면 좀 기분 나쁘기는 하겠네.
“그러고 보니 요즘 루엘라가 안 오네요, 주인님.”
어느새 마물 얘기로 넘어간 그녀들의 화제는 자연스레 요즘 발길이 뜸한 루엘라로 바뀌었다.
“흠, 뭐 그녀도 자기 일이 있겠지.”
사실 그동안 매일 왔던 게 이상한 수준이다.
아니, 사천왕이라는 작자가 그렇게 한가로워도 되는 건가?
이 파티야 군인들과는 조금 다른 위치에 놓여있으니 이렇게 대륙 전역을 왔다 갔다 하면서 비교적 한가로이 보내지만, 지금도 마물들과 인간들은 전쟁터에서 열심히 피를 쏟고 있다.
사천왕은 그들의 실질적인 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존재 아닌가?
“그래도 슬슬 같은 노예 동료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는데… 조금 아쉽네요.”
“어머, 세리아도요?”
그녀들은 서로 그렇게 말하며 쿡쿡 웃었다.
용사 파티도 모자라 사천왕까지 노예라….
생각만 해도 짜릿해지는 기분이다.
“이상한 소리하지 마.”
“후후… 표정이 풀어지셨는데요?”
“주인님도 좋으시면서.”
제길, 들켰나?
나는 살짝 말아 올린 입꼬리를 내리며 근엄한 척을 했다.
그렇지만 정말 루엘라의 심리에 대해서는 잘 가늠이 안 간다.
유니의 모습일 때는 거의 다 넘어온 것처럼 보이다가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면 그렇게 큰 변화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뭐, 어차피 그녀가 들어오든 말든 중요한 건 아니다.
처음 계획에 그런 건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중요한 것은 루엘라가 내 부탁을 들어줄 것인가 하는 점인데….
요즘 오지를 않으니 물어볼 수도 없네.
나는 살짝 아쉬움을 느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
그렇게 몇날 며칠을 이동해 마침내 도착한 수도.
수도를 떠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렇다고 무언가 눈에 띄는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다들 새로 즉위한 왕을 알현하러 가느라 지금 숙소에는 나 혼자밖에 없다.
간만에 혼자 남아있으니 생각보다 심심하다.
이럴 때 세리아나 아린이 있었으면 주물럭거리면서 놀기라도 할 텐데 없으니 허전한 느낌.
옛날에는 혼자 있는 게 익숙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할 일도 없었는데.
확실히 그녀들이 내 일상에 많이 침투해버렸구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든다.
어차피 숙소에 혼자 앉아있어 봐야 할 것도 없기 때문에 나는 잠시 숙소 앞을 거닐었다.
잠시 가볍게 주변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오자 숙소 앞에 한 여자가 기웃거리며 안을 살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좀 비키지?”
“아, 죄송… 윽.”
“음?”
그 여자가 입구를 가리고 있었기에 한 마디 했는데, 그녀는 날 보더니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다.
가만, 이 여자 왠지 익숙한데.
금발에… 살짝 긴 귀.
“이름이 에르티나였던가?”
“친한 척 부르지 마시죠.”
그녀는 마지막 사천왕, 에르티나였다.
여기에 왔다는 것은, 보나마나 용사와 유니를 만나기 위해서겠지.
그들이 여기에 묵고 있는지 확인하고 있던 건가?
“…맞아요. 자리에 없는 걸 보니 잘못 찾아왔다고 생각했는데….”
틀리지는 않았다.
다만 알현하느라 자리를 비웠을 뿐.
“…그렇군요. 나중에 다시 와야겠네요.”
뭐지?
내 마음을 읽고 있나?
“그런 건 아니지만… 뭐 대충 비슷하다고 해두죠. 아무튼 그럼 전 이만.”
“잠깐.”
나는 물어볼 게 있어 그녀의 팔을 덥석 잡으려 했지만 에르티나는 팔을 확 빼면서 나를 피했다.
“…루엘라에 대해 묻고 싶은 거라면 저는 몰라요. 그보다 왜 그런 게 궁금하시죠?”
제길, 뭔 수로 내 마음을 읽고 있는 거지?
이거 뭐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이겠네.
“저는 이만.”
그녀는 냉랭하게 말을 끊고서는 물러났다.
그대로 곧장 가버릴 것 같았던 그녀는 갑자기 자리에 멈춰서더니 나를 돌아보며 짧은 말을 남겼다.
“당신은 잘못된 판단을 하지 마시길.”
이를 끝으로 그녀는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다.
잘못된 판단이라.
무엇을 말하는 거지?
이미 세리아를 뺏은 것부터가 잘못된 판단이라고 볼 수도 있을 테고, 아니면 앞으로….
앞으로는 뭐가 있을까.
유니를 뺏는 것?
어쩌면 별 의미가 없는 말일지도 모른다.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머릿속 한 구석에서는 계속 그녀의 말이 맴돌았다.
알현하러 갔던 그들은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다.
그리 잘 풀리지만은 않았는지 표정이 살짝 어두웠는데,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실적이 없어서 조금 까이고 온 모양이다.
사천왕 중 하나를 잡았는데도 그 뒤로는 소식이 없으니 귀족놈들이 많이 불안했던 모양.
단순히 불안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우리의 상황이 많이 묘했다.
아마 지금 상황을 제대로 아는 놈이 있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지지 않았을까?
파티는 두 그룹으로 사실상 찢어진 상태고, 양 쪽 모두 사천왕들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게 용사 파티라고?
생각해보니 웃기기 짝이 없다.
“에르티나를 죽인다거나?”
세리아가 던진 농담에 유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듣기로는 그녀를 스승님으로 여긴다고 했다.
적에게 스승님이라….
뭐, 적을 따먹는 내가 뭐라 할 처지는 아니지만.
“농담이야.”
세리아는 굳이 더 불을 피우는 대신 쓸데없이 그녀를 자극하지 않기로 했는지 한 발 물러섰다.
결국 이 임시회의도 별 소득 없이 끝났다.
이 파티로 거둘 수 있는 소득이라 해봐야 마왕을 잡거나 사천왕을 잡는 정도인데, 아직 마왕성까지는 거리가 멀고, 사천왕을 잡기에는 그닥 가능성이 높아보이지 않는다.
셋 중 만만한 상대가 있기라도 한가?
***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수도에서도 유니의 훈련은 계속되었다.
이럴 거면 그냥 아예 합류를 하지 뭐 하러 따로 떨어져서 쫓아오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용사가 혼자 남아있다는 사실은 잘된 일이지.
나는 아침부터 세리아와 아린을 데리고 놀다가 보내주었다.
루엘라가 있었으면 용사를 골려먹기라도 했을 텐데, 없으니 대신 용사의 상태라도 살펴봐야겠지.
그녀들을 보내고 잠시 침대에 누워 낮잠이라도 자려고 했는데, 그녀들이 급하게 되돌아왔다.
“주, 주인님! 용사가 없어요!”
“응?”
방에 없다고?
“산책이라도 하나보지.”
“주변에도 없어요.”
“멀리 간 거 아냐?”
“…한 번 찾아볼게요.”
둘은 약간 찝찝한 표정으로 다시 나갔다.
생각해보면 용사가 멀리까지 나가는 일은 없었는데.
설마 무슨 일이 생겼다거나… 아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문득 루엘라에게 부탁했던 내용이 생각났다.
설마?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잠깐 쉬자.”
“하아, 하아… 네.”
밖에서는 에르티나와 유니가 연습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조금 더 멀리에서 하더니, 수도에는 마땅한 자리가 없는지 바로 앞 마당에서 하고 있다.
“…뭐야?”
에르티나가 나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용사가….”
“에릭이 왜?”
역시 유니는 에릭을 언급하니 곧장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내 말에 불안함을 느꼈는지 잠시 정령을 불러 주변을 확인하고는 살짝 당황했다.
“자리에… 없네?”
“잠시 산책이라도 갔겠지. 너무 신경쓸 것 없….”
그 때 세리아와 아린이 다시 돌아왔다.
“주인님! 주변에도 없어요.”
“조금 멀리 나가봤는데도 안 보이네요.”
에르티나는 그녀들을 언짢게 바라봤지만, 유니는 그녀들의 말에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에릭이 없다고?”
“주변에 안 보이는데?”
“정령으로 찾아봐요.”
유니가 급히 정령을 보내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에르티나는 그런 유니의 모습을 보고는 한숨을 쉬고 도와주겠다며 유니보다 더 먼 곳의 정령들을 불러일으켰다.
“…루엘라?”
“응?”
왜 그 이름이 나오지?
“유니, 상황이 많이 안 좋네요. 용사가 루엘라와 싸우고 있어요.”
“……네?”
유니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당황했다.
루엘라와? 용사가?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구나.
나도 놀라기는 했지만, 금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용사와 한 번 붙으라는 내 부탁.
그것은 슬슬 용사를 한 번 더 흔들기 위한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심적으로 용사를 몰아붙이기 위해 필요할 뿐인 일.
설마 여기서 루엘라가 정말로 용사를 죽여버리거나 하지는 않겠지.
…않겠지?
유니와 내 여자들이 그를 도우러 떠나자, 이 자리에는 나와 에르티나만이 남았다.
“이상한 짓을 꾸몄군요.”
이 여자한테는 뭐라고 말을 못하겠네.
내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그는 인간의 희망이에요. 왜 당신의 그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그를 희생시키려고 하죠?”
글쎄.
그렇게 물으니 나도 딱히 할 말은 없네.
인간의 희망이라.
거창한 것 같지만 여신의 선택을 받았다면 정말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와 같이 다니면서 느낀 것은, 그가 선택받은 초월적인 용사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남자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보는 그는 용사도, 영웅도, 천재도 아닌 그냥 에릭이라는 평범한 남자였다.
그래도 그는 용사니까.
그래서 용사라고 불러주기로 했다.
“당신은 더러운 사람이군요. 그보다도 더….”
그?
그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저번 용사? 아니면 마왕?
“그래요, 인격은 중요하지 않죠. 어차피 모든 것은 이미….”
그녀는 슬픈 듯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내 얼굴을 처음으로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마음에 안 드네요.”
뭔데?
자꾸 이상한 소리만 중얼거리더니 결국에는 내 욕이다.
“신경 쓰지 마요.”
그따구로 말하면 신경이 안 쓰이겠냐?
이거 참, 같이 있기 불편한 년이네.
“…후우. 저도 여기 있을 필요는 없겠죠. 유니가 찾으면 먼저 돌아갔다고 전해줘요. 그럼.”
그녀는 나와 있기가 싫었는지 뚜벅뚜벅 걸어가 사라져버렸다.
영 마음에 안 드는 년이구만.
***
용사는 아무런 부상 없이 돌아왔다.
그 대신 루엘라도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은 모양이지만, 뭐 애초에 그녀는 다쳐도 별 상관없는 몸이니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루엘라에게 진 경험이 생각보다 충격이었는지 그의 눈은 탁했다.
그래도 뭐, 다시 이걸 기반으로 삼아 더 강해지겠지.
적어도 이런 걸로 포기할 놈은 아니니까.
어차피 내 목적은 그가 더 유니에게 의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유니에게 더 의존하면서, 동시에 나에게 안기는 유니의 모습을 보고 더욱 흥분하도록.
그러다가 무슨 계기가 생기면 스스로의 성벽을 자각하고 자신의 손으로 유니를 넘기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며칠 뒤, 나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아.”
“엉?”
복도에서 우연히 유니를 마주쳤다.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갑자기 그녀가 이상하게 시비를 걸길래 순간 짜증이 나서 불만 있으면 우리 방으로 찾아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나온 대답이 이거다.
“좋다고. 어차피 다들 안에 있지?”
“…무슨 생각이야?”
갑자기 이제 와서 이게 무슨 행동이지?
나는 잠시 고민해봤지만 부족한 내 머리로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결국 나는 내 노예들의 지식을 빌리기 위해 방으로 돌아왔다.
유니를 데리고.
“어….”
“유, 유니?”
아린의 손거울을 보며 몸단장을 하고 있던 둘이 그녀를 보더니 당황했다.
역시 그녀들도 예상치 못한 사태였던 것인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잠시 뒤에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에릭을 흥분시키기 위해서, 도움이 필요해.”
아무래도 더 자세한 얘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다.
대체 무슨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