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 [용사] 위기와 침묵
사천왕의 위치를 몰라 포기하기로 했던 계획이 금세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어쩌면 지금, 둘도 없는 기회가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혼자서는 도저히….
“마침 좋은 기회 아닌가요? 여기에는 제가 흑마법을 쓸 다른 제물도 없고, 사람들에게 자랑하기도 좋은 수도의 한복판이죠.”
그녀는 마치 자신을 가져가라는 듯 가슴에 손을 올리고 나를 향해 몸을 내밀었다.
“자, 저를 죽이고 그 시체를 가져가고 싶지 않으신가요?”
“…어차피, 죽지도 않잖아.”
세리아에게 들었다.
루엘라의 지금 육체는 거짓이고, 그녀의 영혼은 다른 곳에 담겨져 있다고.
“그녀에게 들으셨군요? 맞아요. 이 육체는 죽어도 제 영혼은 죽지 않죠.”
그렇게 말하며 루엘라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붉은 보석이 장식된 목걸이였다.
그 목걸이의 줄을 손에 쥔 채 그녀가 목걸이를 늘어뜨렸다.
“그럼 이거라면?”
“…그건….”
“제 영혼을 담은 목걸이랍니다. 원래는 마왕님께 선물로 드렸는데, 얼마 전에 다시 받았거든요.”
…농담이겠지?
“진짜에요. 이걸 부수면, 저는 정말로 죽게 된답니다.”
“…그런 걸 왜….”
내 말에 루엘라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내기를 할까요.”
“…안 할 거야.”
잠깐 흔들릴 뻔했지만, 속으면 안 된다.
저게 진짜라는 보장도 없고, 갑자기 이렇게 나에게 유리한 제안을 할 리도 없다.
분명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저랑 승부를 겨뤄보죠. 당신이 이기면 제 육체를 베고 이 목걸이를 가져가세요.”
“윽… 지, 지면?”
“지면 당신의 목숨을 거둬… 가고 싶지만, 특별히 살려줄게요.”
그게 뭐야?
나는 그녀를 죽여도 되지만, 그녀는 나를 죽이지 않겠다고?
나를… 우습게 보고 있는 건가?
마치 놀리는 듯한 그녀의 말에 검을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도 알고 싶거든요, 지금의 당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만약 저보다 강해지셨다면… 마왕님도 무사하진 못할 테니….”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
이것도 연기인가?
아니, 그렇다기에는 무언가 진심이 느껴진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사실 제안이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 마음을 먹은 이상, 당신은 동의할 수밖에 없어요.”
“큭… 비겁한….”
“후후, 이제 와서 적에게 비겁을 따지시나요?”
그래, 에르티나와 세라 때문에 최근 분위기가 묘하게 물러지기는 했지만 사천왕은 우리의 적.
…이런 기회가 찾아오면 반드시 놓쳐서는 안 된다.
“장소도 딱 좋네요. 그렇지만 너무 시간을 끌면 동료들이 찾아와버리겠죠?”
“…….”
정 안 되면 그녀의 말처럼 시간만 벌어도 된다.
유니나 아니면 다른 여자들이라도. 누구든지 내 부재를 알게 되면 찾아와 줄 것이다.
유니의 정령술을 쓰면 내 위치는 쉽게 찾아내겠지.
“자… 신성력이라고 했던가요? 그 힘을, 어디 보여주시죠.”
“큭…!”
이제 피할 수 없다.
설마 단 번에 죽어버리지는 않겠지.
나는 칼끝에 신성력을 두르고는 그녀에게 뛰어들었다.
터엉!
그러나 그녀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방어막인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분명 무언가가 있다.
“읏… 이 정도 거리에서도 영향이 오네요.”
루엘라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손짓하자, 내 몸이 무형의 방어막에게 밀려 뒤로 물러났다.
내 검은 그녀에게 닿지도 못한단 말인가?
이래서야 이길 가능성조차 생기지 않는다.
뚫어야 한다.
방어막을 반드시…!
“크윽…!”
양손에 쥔 검으로 허공을 찌르니 무언가에 걸려 더 이상 앞으로 전진하지 않는다.
이걸, 반드시 뚫어야 한다.
검에 덧씌워진 신성력이 점점 짙어지고, 그럴수록 조금씩 검이 앞으로 전진한다.
들어간다. 뚫린다.
먹힌다…!
쨍강!
무언가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에 앞으로 훅 쏠렸다.
루엘라의 영역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이 기회!
나는 그녀를 향해 재빨리 뛰어들었다.
정말로 뚫을 줄은 몰랐는지 살짝 놀란 눈치였지만, 루엘라는 대비해뒀는지 곧장 자신의 팔에서 검은 스태프를 꺼내 휘둘렀다.
콰앙!
발밑의 흙더미가 폭발했다.
갑자기 튄 파편 때문에 시야가 가려지고, 내 돌진도 힘을 잃었다.
쿠웅!
그리고는 다시 무형의 충격파가 나를 덮쳤다.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맞은 일격이라 나는 그대로 뒤로 한 바퀴 구르고 말았다.
“휴우… 그래도 조금은 하시네요. 위협이 안 되기를 바랐는데….”
루엘라는 여전히 나를 동등한 적수로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저렇게 나를 평가하는 것 자체가 나를 본인보다 낮게 평가하고 있다는 증거다.
지금 상황 자체가 마치 그녀가 나를 시험하는 기분이 든다.
내가 위험한 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느낌.
약하다면 나를 적으로 여기지도 않겠다는 건가?
그건 너무나도 분하다.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려다가 또 방어막이 나를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필요한 강도는 아까 익혔다.
그것보다 조금 더 강한 신성력으로, 나는 방어막을 단번에 찢어버렸다.
“앗….”
루엘라가 놀라는 지금, 나는 다시 그녀를 향해 뛰었다.
폭발은 터지기 전에 먼저 뛰어서 넘어버리고, 루엘라가 다시 마법을 쓰기도 전에 먼저 머리를…
베려던 찰나, 사람 모습을 한 그녀를 보고 아주 잠깐 망설임이 들었다.
그녀도 한 번 목을 베면 그대로 죽어버리지 않을까?
아니, 어차피 이 육체는 죽어도 죽지 않는…
퍼억!
“크윽!”
“팔자 좋으시네요. 그렇게 고민이나 하고.”
뭐에 맞은 거지?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무언가 둔탁한 것에 맞고 밀려났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던 나는 재빨리 자세를 잡고 일어났다.
“휴우… 됐어요. 더 알아보는 건 시간낭비겠네요.”
“뭐, 뭐라고?”
여전히 대치상태를 유지하며 나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멈칫했다.
“당신은 저를 죽이지 못하는군요.”
“그, 그렇지는….”
잠깐의 고민을 들킨 건가?
아냐, 나는 할 수 있다!
“못 해요. 방어막도 치지 않을 테니 한 번 공격해보시죠.”
“큭, 그런다고 못할 줄 알고…!”
나는 그녀에게 뛰어들어 검을 휘둘렀다.
처음으로 한 공격은 그녀의 팔에 막혔고, 검은 안개 같은 것을 둘둘 만 그녀의 팔에는 내 신성력이 미치지 않았다.
반응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몸이 조금씩 흐물흐물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그뿐.
곧장 피부가 재생하고, 신성력이 다시 그 피부를 녹이면 또 재생했다.
그렇게 흘러내렸다 다시 합쳐지는 과정이 반복되는 그녀의 피부는, 무척이나 징그러워보였지만 그다지 타격이 커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했다.
직접 공격하지 않는 한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는 없을 것 같다.
두 번째 공격은 아까처럼 망설임 없이 휘둘렀지만 루엘라가 가볍게 피해버렸다.
세 번째도, 네 번째도, 그리고 이어지는 몇 번의 공격들도 그녀는 회피하거나 그 검은 안개로 전부 막아버렸다.
“아시겠나요? 그 공격도 제 육체에 닿아야 의미가 있는 것이죠. 지금 이대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큭, 으아악!”
붕붕.
내 공격은 허공만을 가로질렀다.
“후후… 약해요.”
“크으윽!”
내 검을 한 손으로 막고, 그녀는 남은 한 손으로 내 가슴을 살짝 밀었다.
톡.
살짝 뒤로 밀린 나는 주춤거리며 칼을 내렸다.
정말… 의미가 없는 건가?
“일단 그 힘 자체가 부족하네요. 고작 이런 걸로도 막히니….”
그녀는 자기 팔에 모였던 검은 안개를 흔들어 흩어버렸다.
흩어진 안개들은 다시 그녀의 몸 안에 스멀스멀 들어가 합쳐졌는데, 아마도 그녀의 몸에서 나온 무언가로 보였다.
“구경 잘 했어요. 슬슬 동료들이 오는 것 같으니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죠.”
“기, 기다려…!”
그러나 내 외침에도 불구하고 루엘라는 높은 벽을 가볍게 뛰어 넘어가버렸다.
“에릭!”
다급한 유니의 외침이 골목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내 앞까지 뛰어와 넘어진 나를 일으켜 세웠다.
“에릭! 괜찮아? 어디 다쳤어?”
“아, 아냐, 나는 괜찮아….”
“루, 루엘라가… 그녀와 싸웠지?”
정령으로 급히 확인한 것인지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확인했다.
“에릭!”
“에릭 씨!”
그녀의 뒤를 이어 세리아와 아린, 그리고 제렌까지 따라 들어왔다.
“어떻게 된 거야?”
“그게….”
나는 대략의 사정을 그녀들에게 전달했다.
“루엘라가 갑자기 왜….”
“확인, 하려는 것 같았어. 그… 내가 위협이 되는지 못 되는지….”
그 결과는, 아마도….
“…몸 성히 살아있다는 건, 그럼….”
“세리아!”
세리아가 정답을 말하려는 것을 아린이 급히 막았다.
“…아냐, 나도 알고 있으니까….”
만약 내가 위협이었다면 어떻게든 손을 썼겠지.
나에게 아무런 조치도 가하지 않고 물러났다는 것 자체가, 그녀의 평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는 마왕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
나는… 여전히 약하다.
“더… 강해져야해.”
“에릭….”
유니가 복잡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유니가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세리아, 아린도 같이 있었다면?
의미 없는 가정이다.
중요한 건 내가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는 사실 뿐이니까.
“…돌아가자.”
힘이 필요했다.
더 강한 힘이.
유니는 돌아가는 내내 나에게 말을 걸며 위로해줬지만, 내 시선은 그녀가 아닌 내 앞을 향해있었다.
세리아와 아린, 그리고 그 가운데에 선 제렌.
힘이 필요하다.
더 많은 신성력으로 루엘라의 방어를 압도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내 힘의 원천은….
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에릭….”
아니,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
절대로.
그렇지만 내 마음 속 어딘가에서는 더러운 욕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
“역시 아직도 신경 쓰는 거야?”
유니는 내 볼에 손을 올리며 걱정스레 물었다.
아마 내가 오늘 제대로 그녀를 만족시켜주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내가 생각해도 형편없는 시간이었다.
“미안.”
“아냐…. 에릭이 나쁜 게 아니잖아.”
유니는 지금 분위기상 더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느꼈는지, 나를 더 조르는 대신 옆에 얌전히 누웠다.
“…많이 부족했어?”
“응.”
결국 그녀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그렇게나 훈련을 거듭했는데도 부족하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더 강한 힘.
더 강한 신성력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지금 이상으로 흥분을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잠시 유니를 바라봤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상상.
그러나 도저히 그것만큼은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 말은… 그 말만큼은 절대 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왜 그런 상황에 흥분을 하고 마는 것인지.
“…역시 이대로는 부족해?”
“아, 아냐… 그….”
사실이었다.
적어도 지금 추세로는 절대 그녀를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부족하구나.”
그렇지만 내 어설픈 연기로는 그녀를 속일 수 없었다.
유니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나에게 물었다.
“에릭은… 어떨 때 가장 기분 좋아?”
“나, 나는….”
가장 기분 좋았을 때.
그건 분명 유니와 맺어졌을 때다.
“후후… 정말? 기쁘다.”
유니는 내 대답에 해맑게 웃었다.
“그렇지만… 그게 다는 아닌 거지?”
“…….”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떻게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를 배신하는 그런 말을.
“괜찮아. 나는 에릭이 무슨 취향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해해줄 수 있어. 그러니 말해줄래…?”
절대… 말할 수 없다.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유니가 나에게 어깨를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물었다.
“으응….”
유니는, 나의 연인이다.
유니는, 빼앗길 수 없다.
“…에릭.”
굳게 입을 다문 나를, 유니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