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 [용사] 위기와 침묵
아세일라를 떠나면 그 다음은 수도다.
수도에서부터 다시 마왕성까지의 거리가 지금까지 온 거리와 비슷하니 대략 절반은 온 셈.
과연 우리는 얼마나 강해졌을까.
마왕을 이길 수 있을까?
“에릭, 그 쪽으로 간다!”
“윽…!”
오크 한 마리가 내 쪽으로 달려들어 몽둥이를 휘둘렀다.
쾅!
나는 급히 신성력을 검 위에 입히고 오크의 공격을 검으로 막았다.
그러나 신성력을 덧씌운 검은 오히려 몽둥이를 반으로 베어버렸고, 힘으로 밀어붙이던 오크는 몸의 중심을 잃어버리고 내 검을 향해 휘청거렸다.
“아, 안돼…!”
급히 검을 물리려고 했지만, 그보다는 오크의 몸이 내 검에 닿는 것이 더 빨랐다.
“크이이익!”
그리고 오크는, 내 검에 닿자마자 마치 본래 액체였던 것처럼 흐물흐물하게 녹아 사라져버렸다.
내가 어찌할 도리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윽….”
나는 강해졌다.
마물들에게 이 힘은 거의 천적과도 다름없다.
막을 수 없는 힘.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죽어버린다.
망설일 틈도 없이 그들은 제멋대로 달려와, 내가 공격도 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죽어버렸다.
“수고했어, 에릭. 이번에도 깔끔했네.”
“후후… 많이 강해지셨는데요?”
상황이 종료되자 세리아와 아린이 다가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오크의 위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응.”
용사라는 내 역할을 생각하면 마물을 더 빠르게 죽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좋은 일이겠지.
그렇지만 그들이 너무 가볍게 죽어버리는 지금 상황이 나에게는 도무지 적응되지가 않았다.
“에릭… 고생했어.”
“고, 고마워.”
유니가 옷에 묻은 피를 물의 정령으로 털어내며 싱긋 웃었다.
그녀가 싸우는 모습을 잠깐 지켜봤는데… 이 쪽도 일방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령이 조종하는 날카로운 물줄기가 그대로 오크의 몸 안에 파고들더니, 온 몸에서 피를 흘리며 순식간에 죽어버렸다.
섬뜩하기 그지없는 공격이었다.
만약 저게 나나 다른 사람들에게 향하는 순간에는….
그럴 일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상상하게 된다.
“그럼 우린 부산물을 수거하고 있을 테니 잠시 쉬고 있어.”
세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원래 제렌의 일이어야 할 부산물 수거를 아린과 둘이서 했다.
정작 그는 전투의 처음부터 끝까지 멀찍이 떨어져 구경만 하고 있었을 뿐이다.
원래부터 그에게 전투를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자꾸 거슬리는 모습이었다.
“신경 쓰지 마.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냐.”
“…응.”
유니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무릎 위에 나를 앉혔다.
“에릭, 요즘 정말 많이 강해졌네. 히히… 그만큼 내가 좋다는 거지?”
“앗… 가, 간지럽히지 마….”
유니는 내 허리를 살살 간지럽히며 웃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맞장구 쳐주는 수밖에 없었다.
강해진 것도 맞고, 유니 덕분에 다룰 수 있는 힘이 더 커진 것도 맞지만….
그 이유는 유니가 생각하는 것과 달랐다.
내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허덕이며 안긴 유니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나는 흥분해버린다.
아세일라를 떠난 뒤로는 그 모습을 본 적이 없지만, 이미 며칠간의 경험은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버렸다.
유니와 관계를 맺을 때도, 자꾸만 머릿속에 그녀의 신음이 떠오른다.
현실에서는 듣지 못하는, 그녀의 신음이….
“휴우… 다 모았어요, 주인님!”
“여기 넣어둘게요.”
세리아와 아린은 그녀들의 주인에게 종알종알 말을 걸며 부산물을 배낭에 넣고 정리했다.
잠시 마물을 만나 지체되기는 했지만, 다시 앞으로 나아갈 때다.
나는 셋의 뚜렷한 상하관계를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며 다시 전진했다.
수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
우리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지만, 그 짧은 시간 사이 수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소식은 역시 왕이 바뀌었다는 것 정도일까.
우리도 만찬회에서 만났던 그 왕태자가 어느새 왕위에 올랐다.
수도에 들린 우리들은 그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보고해야만 했다.
“흐음… 마지막 사천왕도 깨어났단 말이군.”
그는 그렇게 말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 때 봤던 털털한 성격은 여전했지만, 이제는 한 나라의 왕이라는 자리에 올라서 그런지 예전보다는 말을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네, 저희도 행방을 알 수는 없어서… 우선 마왕성으로 향하기로….”
역시 이런 자리는 긴장된다.
넷이 모여 열심히 짜낸 시나리오대로 읊고는 있지만,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도 나오면 어떡하지?
“그래, 그대들을 믿고 있겠네. 그런데 말이지… 그 사천왕 중 하나를 그대들이 잡지 않았던가?”
“아, 네….”
“다들 불안에 떨고 있네. 남은 사천왕들이 자신들의 터전을 침범할지 않을까 하고.”
요컨대 왜 아직도 다른 사천왕을 잡지 못했는가? 라는 말이다.
나올 것이라 예상했던 질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못 잡았던 것도 사실이고, 쉽게 이길 것 같은 상대도 아니었기에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조만간 좋은 소식을 들려드릴 수 있도록….”
말하면서도 살짝 양심에 찔렸다.
그 사이 몇 번이고 그들과 마주하지 않았는가.
특히 세라와는 단 둘이 남아 이야기까지 했다.
당연히 이런 얘기를 그들 앞에서 할 수는 없었지만, 그 때문에 외부인들이 볼 때 우리의 여정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흐음… 나로서는 그대들이 잘 하리라 믿고 싶네. 다만 모두의 인내심이 그렇게 깊지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줬으면 좋겠군.”
“네….”
그 뒤로도 시시콜콜한 얘기가 더 오갔지만, 다행히도 예상했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보고를 마쳤다.
어쩌면 그렇게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있기에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그들의 입장에서 별동대 같은 우리보다는 군대를 움직이는 전쟁 쪽이 더 급할 테니까.
우리의 존재는 그 정도였다.
용사라는 전설에 기대 기대를 받고는 있지만, 전폭적으로 신뢰하기에는 다소 미심쩍은 소규모 파티.
그나마 해체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사천왕 처단이라는 큰 업적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러나 그것도 슬슬 수명이 다한 것 같았다.
“…역시 우리가 무언가 더 하긴 해야 할 것 같네.”
“그렇지만 남은 사천왕들이 어딨는지 모르잖아.”
세라는 아직 그 마을에 있을까?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상주하는 건 아닌 것 같지만, 에아 같은 관리자들을 통하면 그녀의 위치를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들은 왕실과 조약을 맺고 시험적으로 진행되는 계획이다보니 쉽게 건들기도 애매하다.
“루엘라는 어디 있는지 모르고… 에르티나는 어때?”
“읏….”
에르티나.
그녀는 우리에게 협력적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사천왕 중 하나다.
아마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을 것이고, 유니를 도와줄 만큼 협력적이니 기회를 이용하면 그녀 하나 죽이는 것쯤은… 가능하지 않을까.
세리아는 그렇게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유니의 표정이 급격하게 안 좋아졌다.
“…농담이야. 우리에게 협력적인 사천왕을 굳이 죽일 필요는 없지.”
결국 에르티나를 제외하면 루엘라, 세라 밖에 남지 않는데, 둘 중 하나를 죽여야만 하는 걸까?
누가 봐도 인간이 아니었던 그 해골 사천왕과는 달리, 그녀들은 인간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실제로 한 때는 인간이나 엘프였고.
그런 그녀들을 내가 죽일 수 있을까?
그건… 그냥 사람을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는 것 같은데.
“사실 이렇게 말은 해도 당장 그녀들을 죽일 수 있는 건 아니지. 어디있는지도 모르잖아?”
그래, 결국 여기서 열심히 떠들어봤자 지금 당장 행동에 옮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회의는 별 소득 없이 끝났다.
우리는 수도의 여관에 방을 잡고 잠시 여독을 풀었는데, 역시나 에르티나가 다시 우리를 찾아왔다.
“확실히 실적이 중요하기는 하지요. 그런 게 없으면 저들은 당신들이 어떤 고생을 했는지 전혀 알아주지 않거든요.”
에르티나는 은근히 쌓인 것이 많았는지 감정이 실린 목소리로 그들을 비난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당신들의 목적지는 마왕성이잖아요? 실적을 위해 사천왕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보다 마왕을 처단하는 것이 더 중요한 임무에요.”
“…그렇지만 지금의 실력으로 마왕을 잡을 수 있을지….”
“가능해요.”
마왕을 아는 사천왕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보니 신뢰성이 느껴졌다.
…적에게 듣는다고 생각하니 다소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왠지 많이들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마왕도 왕이에요. 굳이 왕이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죠.”
그야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마왕은 아무래도 다른 왕들과는 다르지 않는가.
마왕이 나타나면 마물도 늘어난다.
마왕이 사라지면 마물도 점차 줄어든다.
우리들처럼 왕이 죽으면 다음 왕이 곧바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왕을 대신할 인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무작정 마왕 하나만 죽이기 위해 우리 용사 파티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오로지 마왕 하나만 죽이면 끝나는 전쟁.
그것이 이 전쟁이다.
“…그래요. 여러모로 다른 면이 많지요. 그래도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더 자세하게는 얘기할 수 없지만….”
에르티나는 무언가의 제한 때문에 자세하게 얘기해주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녀의 확신 덕분에 조금은 희망이 생긴다.
“그래서, 유니. 계속 할 거지?”
“네!”
아직 그녀에게서 더 배울 것이 남았는지, 유니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자. 용사님도 지금대로만 하시면 돼요. 많이 좋아지셨네요.”
지금대로….
그러기 위해서는 더 흥분해야한다.
흥분하려면….
나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
유니가 다음 날 에르티나와 훈련하러 나가자,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곧장 여관을 나왔다.
물론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이곳은 아세일라가 아니기 때문에 그곳에서 일어났던 것과 똑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나온 까닭은, 정말 기분전환 때문인 것일까.
“잘 부탁드립니다!”
“응, 잘 부탁해.”
마땅한 공간이 없었는지, 에르티나와 유니는 숙소 앞마당에서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름 사천왕의 일원인데 이렇게 적진 한가운데서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다소 위화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아마 왕궁의 귀족들이 에르티나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입에 거품을 물겠지.
나는 묘하게 불편한 심정을 품으며 시선을 돌렸다.
숙소의 바깥,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골목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이번에 고작 두 번째 방문인 나에게 수도의 길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미로였다.
그렇지만 수도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 이러 복잡한 길목은 동네 놀이터와도 같은 곳이겠지.
나라면 들어갈 엄두도 못 낼 골목에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그 중 한 사람의 모습이 이상하게 눈에 띄었다.
땋은 갈색머리의 여자.
무척이나 익숙한 모습이다.
나는 무심코 시선을 돌려 유니의 모습을 확인했다.
유니는 이곳에 있다.
그러면 저 반대편에 있는 유니는 대체…?
도플갱어.
그리고 실적.
나는 잠깐의 망설임 끝에 도플갱어 유니를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진짜 유니와 다른 동료들을 불러도 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들을 부르기도 전에 내 발이 먼저 움직였다.
나는 내 몸의 움직임에 따라 곧장 그녀를 뒤쫓았다.
내가 그녀를 향해 접근하자 도플갱어는 나를 피해 도망쳤는데, 마치 나를 유인하듯 자꾸만 아슬아슬한 간격을 유지하며 도망쳤다.
“허억, 허억….”
너무 깊게 들어왔나?
대충은 길을 외워뒀지만 살짝 불안해진다.
저 골목으로 숨어들어갔는데….
나는 그녀를 쫓아 골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막다른 골목!
마침내 그녀를 몰아넣었다.
막힌 벽 앞에서 유니가 나를 홱 돌아봤다.
“후후….”
“너, 누구야?”
이 여자는 유니가 아니다.
그렇다면 분명 마물…!
나는 검을 재빠르게 꺼내들었다.
“강인한 눈이네, 에릭.”
“…유니인 척 하지마.”
“후후….”
유니는 나를 보고 웃었다.
나를 깔보는 듯한 눈빛에 살짝 마음이 흔들렸다.
유니가 나를….
“그래요, 저는 유니가 아니죠.”
갑자기 유니의 모습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더니 그녀의 모습이 다른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액체처럼 흘러내렸다가 다시 뭉치며 사람의 모습을 한 그것은, 수도에서 만났던 악연이자 우리의 적 중 하나인 루엘라의 모습을 하며 내 앞에 나타났다.
“저는 당신들이 애타게 찾는 적, 루엘라랍니다.”
루엘라?
왜 그녀가 이런 타이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