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 [용사] 세라의 조언
“잘 잤어, 에릭?”
눈을 뜨니 먼저 일어나있던 유니가 웃으며 내 볼을 쓰다듬었다.
“아… 응.”
사실 별로 잘 자지는 못했다.
이상한 악몽도 그렇고, 옆방에서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나는….
나는 문득 유니를 보았다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응? 뭐가 부끄러워?”
유니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웃으며 내 시선을 다시 자기 쪽으로 향하게 돌렸지만, 나는 그녀를 볼 때마다 자꾸 어제 생각이 났다.
어제는 잠시 미쳤던 것 같다.
분명 제정신이 아니다.
그게 유니일 리 없다는 것은 내가 제일 잘 안다.
내 옆에서 자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자꾸만 듣다보니 비슷한 점이 느껴지는 것이다.
유니한테서 들어본 적 없는 신음을, 유니와 닮은 여자에게서 듣는 기분은 상당히 오묘했다.
“그… 이, 일단 옷부터 입을게.”
“알았어.”
나는 살짝 빨개진 얼굴로 다시 옷을 갖춰 입었다.
우리가 먼저 밖으로 나왔을 때, 아직 그들은 자고 있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와 유니는 먼저 아침을 먹고 잠시 거리를 둘러보기로 했다.
어차피 그들이 일어나도 준비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
그렇게 유니와 둘이 산책을 하다보니 멀리서 미리와 눈이 마주쳤다.
“앗.”
나는 그녀에게 인사라도 하려고 손을 들었지만 그녀는 우물쭈물하더니 후다닥 도망쳐버렸다.
“죄책감 가지지 마, 에릭. 어차피….”
“응, 알고 있어.”
그래도 약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역시 이제 예전 같은 반응을 기대하긴 어렵겠지.
나는 아쉬움을 담아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보지 못했지만.
그렇게 잠깐 걷고 돌아오니 어느새 그들이 일어나 아침을 먹고 있었다.
“안녕, 에릭.”
“안녕하세요.”
나는 문득 그녀들에게 어제 누가 또 있었냐고 묻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차마 물을 수가 없어 결국 언제 출발할까 같은 건조한 이야기밖에 하지 못했다.
“그거 말인데요. 아까 산책가신 사이 에아 씨가 와서 잠시 들러달라던데요.”
“그래?”
그래서 우리는 출발하기 전에 먼저 에아를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세라.”
그녀를 찾아간 촌장집에는 에아와 세라가 앉아있었다.
“왜 여기에?”
“이 마을은 중요한 곳이니까요. 게다가 제가 제 부하들을 관리하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요?”
그녀의 꼬리가 휙휙 흔들렸다.
하긴, 그녀도 음마였지.
역시 에아 뒤에는 세라가 있었던 것이다.
세라는, 마족과 인간이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걸까.
“얘기는 다 들었어요. 당신이 이 일에 협력해주었다구요?”
“아니, 뭐 협력이라기보다는….”
그냥 가만히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도 협력이죠. 제 쪽에서 다시 감사인사를 드릴게요. 고마워요.”
“…정말 그런 게 가능할 거라고 믿는 거야?”
세리아가 살짝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글쎄요, 안 될 건 없지 않을까요? 지금 저희도 이렇게 같이 앉아 있잖아요.”
“그거랑 이건 다른 문제지.”
“음… 그렇긴 하죠. 그래도 이 마을에서 우리는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걸요. 그렇죠?”
그녀가 구석에 고개를 돌리며 질문하자 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촌장님, 계셨구나….
사실 있는 줄도 몰랐다.
“저희도 딱히 어느 한 쪽이 전멸하는 걸 바라지는 않거든요.”
그렇게 말한 세라는 꼬리로 바닥을 탁탁 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아무튼 그냥 감사를 전하고 싶었어요. 이런 건 직접 얼굴을 보고 해야 의미가 있는 거니까요.”
세라는 싱긋 웃고는 잠시 에아를 바라봤다.
“당신은 잘 하고 있어요. 이대로만 해주세요.”
“네, 네…!”
에아는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라고 할지, 어울린다고 해야 할지.
세라와 그녀의 부하들은 관계가 좋아보였다.
그에 비하면 우리들은….
“아참, 그리고 이건 겸사겸사 물어보는 건데, 혹시 루엘라 보셨나요?”
“응?”
갑자기 루엘라는 왜?
“이상하게 요즘 얼굴 보기가 힘들어서 말이죠, 혹시 뭔가 아시나 해서….”
“그걸 왜 우리한테 물어?”
세리아가 팔짱을 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것도 그러네요.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세리아의 말대로다.
왜 우리한테 묻지?
아니, 그보다 세라도 모른다는 건 사천왕들끼리도 서로의 위치를 잘 모른다는 건가?
“뭐, 루엘라니까 알아서 잘 하겠죠. 아무튼 고마워요. 제 볼일은 이걸로 끝이랍니다.”
세라를 본 순간 무언가 심각한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긴장했던 우리들은 맥이 탁 풀려 허탈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아무 일 없으면 그게 제일 좋은 거지.
“아, 그런데 당신과는 할 얘기가 있는데 잠시 남아줄래요?”
세라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바라봤다.
나 혼자만…?
“안 돼.”
“해코지 하려는 거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유니는 잔뜩 경계심 품은 얼굴로 나를 끌어안았다.
“과보호야, 유니.”
“시끄러. 저 여자는 적이잖아.”
그녀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세라를 찌릿 노려봤지만 그녀는 살짝 웃기만 했다.
“괜찮아, 유니. 별 일 없을 거야.”
“에릭….”
그렇지만 나는 그녀의 얘기가 듣고 싶었다.
무슨 얘기를 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는 우리에게 뚜렷한 적의를 비치지는 않았으니까.
유니는 나를 혼자 남겨두고 싶지 않아했지만 결국 내 의사를 존중해주었다.
모두가 다 퇴장하고 둘만이 남자 세라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솔직히 안 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마지막이야.”
“후후, 그래요.”
세라는 웃으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그 여자는 정령으로 듣고 있으려나요? 가급적 안 들었으면 하는데요.”
“그건 나도 어떻게 할 수가….”
“뭐, 어쩔 수 없죠.”
별로 중요한 사항은 아니었는지 세라는 가볍게 넘겼다.
“어쨌든 이렇게 갑자기 당신 혼자만 부른 이유는, 알려드릴 게 있어서 그래요.”
“알려줄 거?”
세라는 마치 나를 평가하듯이 훑어보고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에르티나에게 들었는데, 신성력… 이라고 부르는 힘을 연습하고 계신다면서요?”
“아, 응….”
에르티나. 그녀가 이 얘기를 세라한테 했을 줄은 몰랐다.
그녀 입장에서는 세라도 적 아니던가?
“잘 되가나요? 왠지 아무런 발전도 없이 끙끙거리고 있을 것 같은데.”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순간 잘 되고 있다고 말할까 싶었지만 솔직히 빈말로도 그렇다고 할 수는 없었다.
처음 발현했을 때와 비교해서 나아진 게 하나도 없으니까.
“잘 안 되는 게 당연해요. 가르쳐줄 사람도 없고, 그 감각도 생소하기 짝이 없으니. 그래서 제가 좀 조언을 드리고 싶은데.”
“…왜 그걸?”
적인 그녀가 이런 걸 왜 알려준다는 말인가?
내 의심에도 세라는 태연했다.
“저희를 도와준 대가, 라고 해두죠. 어때요, 필요 없나요?”
“……일단 얘기는 들어보죠.”
그녀의 도움은 수상하기 짝이 없지만, 지금은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지금의 나는 지푸라기라도 붙잡아야하는 상황 아닌가.
“그 힘… 당신이 신성력이라고 부르는 그 힘은 쉽게 말하면 항아리에 담긴 물이에요.”
“응?”
무슨 말이지?
“그 안에 담긴 양만큼만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죠. 그러니 많이 채워둘수록 더 많은 힘을 쓸 수 있어요. 알기 쉽죠?”
“그럼 어떻게….”
“어떻게 채우는가, 그게 궁금하죠?”
그래, 그녀의 말대로라면 그것이 관건이다.
일단 신성력을 효율적으로 다루는 것도 급하지만, 당장 그 양을 늘릴 수만 있다면 비효율적이더라도 양으로 압도할 수 있다.
정작 그 토벌 대상인 세라에게서 듣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 점은 나중에 생각하자.
“흥분이에요.”
“…흥분?”
내가 생각하는 그 흥분…?
“네, 알기 쉽게 말하면 섹스하면서 흥분하는 그런 종류의 흥분을 말하는 거죠.”
“섹… 읏.”
나는 그 말에 벌떡 일어났다.
얼굴까지 새빨개진 걸 본 세라는 깔깔 웃으면서 계속 말했다.
“당신이 흥분할수록 그 힘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거죠.”
“…왜, 왜 그런 게….”
이 힘은 여신님이 준 능력이 아니던가?
왜 이런 이상한 조건이 달려있는 거지?
“후후… 물론 굳이 성적 흥분일 필요는 없죠. 처음 발현했을 때도 성적으로 흥분한 건 아니었잖아요? 그렇지만 가장 효율이 좋고 빠른 방법은 역시 섹스에서 오는 흥분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그 말은 지금 유니와 더 관계를 맺을수록 강해진다는 건가?
“그 정령사와 하셨나요?”
“…….”
“하셨는데도 별로 강해진 것 같지 않다면 한 번 잘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하면 내가 더 흥분할 수 있을지….”
“피, 필요 없어.”
유니와 함께하는 그 순간이 나에게는 가장 행복하다….
“행복과 흥분은 다르죠.”
아니, 나는 유니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흥분…….
정말 그런가?
“후후… 그런데 그거 아세요?”
세라는 그렇게 말하며 혀로 슬쩍 자기 입술을 핥았다.
“사람들은 보통 바람을 필 때 가장 흥분하더라구요….”
스윽.
그녀의 꼬리가 어느새 내 허벅지를 더듬고 있었다.
세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필요하시다면 제가 약간의 도움을….”
쨍강!
그 말을 하자마자 촌장 집의 유리창이 깨져버렸다.
“후후, 더 놀리면 쳐들어오겠네요.”
“유니….”
역시 듣고 있었구나.
아니, 그래도 이렇게 남의 집 창문을 깨버리면….
“그럼 전 무서우니까 이만 가볼게요. 잘 생각해봐요, 새 용사님. 내키지 않는 건 알지만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을지도?”
“자, 잠깐만!”
그녀가 뒷문으로 나가려 하기에 나는 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어머, 벌써 하고 싶으신가요? 그녀가 빤히 보고 있는데?”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그녀의 말에 급히 변명을 하고는 묻고 싶었던 것을 겨우 물어보았다.
“…왜 이렇게까지 우리를 돕는 거죠?”
“후후….”
그녀는 그 말에 웃기만 할 뿐 대답해주지 않았다.
“당신은… 우리의 적이고, 저희는 마왕을… 그….”
“네, 죽여야겠죠. 당연히 알고 있어요.”
세라는 그렇게 말하며 나한테 불쑥 다가왔다.
“저희는 사천왕. 마왕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을 제일 가는 행복으로 여기고 그 분만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랍니다. 물론 저희끼리도 조금씩 생각하는 건 다르지만요.”
그러더니 그녀는 다시 나에게서 두 발짝 멀어졌다.
“그 뿐이에요. 그럼 이만.”
그녀는 뒷문을 열고 훌쩍 나가버렸다.
나는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고민하며 유니가 집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멍하니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