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 [용사] 유니와 유니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오랜 휴식에서 벗어나 드디어 엘프 도시에서 빠져나왔다.
정말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다.
아마 죽기 직전까지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은 잊지 못하겠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보재.”
“에르티나 씨가?”
“응.”
에르티나는 자기가 용사 파티와 같이 다닐 수는 없다며 먼저 떠났다.
떠나기 전에 그녀는 내 손을 잡고 힘내라고 응원의 말을 남겼는데, 아무래도 그녀는 나에게서 선대 용사의 모습을 본 것 같았다.
마법사와 신관의 배신.
누군지 모를 저번 용사와 지금의 용사인 나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기였다.
“괜찮아.”
유니는 내 걱정을 눈치 챘는지 살짝 안아주며 위로했다.
“우리는 저번 용사 파티와는 다르잖아.”
그들에게는 에르티나처럼 우리를 도와주는 적 세력도 없었을 것이고, 정령사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용사를 보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들이 사명을 저버린 것도 아니지 않는가.
우리의 목표는 여전히 마왕토벌이었고, 그녀들은 호의를 보내는 대상이 달라졌을 뿐 우리와 연대가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그 때와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그럼… 출발하자.”
나는 뒤쪽을 슬쩍 바라보고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내 옆에 있는 것은 유니뿐.
세리아와 아린은 제렌 옆에 딱 달라붙어있다.
이제는 숨길 필요도 없다는 것이겠지.
앞으로 계속 이렇게 다녀야하는 것일까.
유니가 있어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많이 거북할 것 같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왕성이 있는 방향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앗, 주인님….”
“저, 저도….”
뒤에서 들려오는 말을 나는 애써 듣지 않으려 했다.
“귀 막아줄까?”
유니는 바람의 정령을 불러 내 귀를 살짝 가려주었다.
“…아냐, 괜찮아.”
그러면 다른 소리를 못 들어 위협에 둔해질 수 있다.
“알았어.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해.”
유니는 살짝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물러났다.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기는 좀 그래서 유니와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지난 며칠간 둘이서 많고도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여전히 유니와 나는 서로 할 얘기가 무척이나 많았다.
우리는 그렇게 옛날과 앞으로의 이야기를 하며 길가를 걸었다.
“에릭, 주인님이 잠깐 쉬어가재.”
“…벌써?”
해를 보니 슬슬 점심시간이기는 했다.
시간감각이 무뎌진 걸까.
아니면 유니와 지내는 시간이 즐거워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지금의 4인 파티가 만들어진 이래 이렇게 누구의 방해도 없이 단 둘이서 다녔던 적은 별로 없었으니까.
“벌써 점심시간인걸요.”
“알았어. 잠시 쉬었다가 가자.”
우리는 점심을 위해 잠시 휴식을 취하며 가져온 식량으로 허기를 달랬다.
“아, 제가 먹여드릴게요….”
“저, 저도….”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세리아와 아린이 그에게 달라붙으며 과도한 애정행각을 부리자 유니의 눈이 가늘어졌다.
“좀 자제하지?”
“식사를 하고 있을 뿐인데요?”
아린은 육포를 입으로 전달하면서 우리에게 과시하듯 보여주었다.
내 시선이 슬쩍 돌아가자 유니가 손으로 눈을 가렸다.
“볼 필요 없어.”
“유니, 에릭 씨는 어린애가 아니라구요.”
“마, 맞아. 나는 괜찮아, 유니.”
무엇보다 이렇게 가리고 있으면 식사도 못하지 않는가.
유니는 뚱한 표정으로 손을 치우고서는 자기 손에 들린 육포를 바라보았다.
“나도 먹여줄까?”
“어? 그, 그럴 필요까지는….”
“에잇.”
유니가 내 입에 육포를 밀어넣자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벌리고 그녀가 준 육포를 우물우물 씹었다.
“아하하, 에릭 귀여워.”
나를 보고 웃는 유니에게 나도 웃어주고는 그녀에게 똑같이 육포를 입에 넣어주었다.
우리는 서로 다람쥐처럼 볼을 부풀리며 육포를 아작아작 씹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들의 모습을 살폈다.
여자들의 일방적인 구애.
그는 당연한 듯, 편하게 앉아 그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의 손은 자연스레 그녀들의 허리와 엉덩이에 향해있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다.
차이.
왠지 나와 그 남자 사이의 격차가 느껴졌다.
그 차이는….
“에릭.”
유니가 내 돌아간 얼굴을 보고 나지막이 불렀다.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길이 있는 거야.”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나에게 그녀는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남들과 비교할 필요도, 부러워하거나 아쉬워할 필요도 없어. 알았지?”
“…응.”
“역시 에릭이야. 착해.”
유니는 그렇게 내 머리를 살짝 만져주고는 끌어안았다.
역시 유니에게 안겨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모든 고민이 무의미해지고, 그저 이대로만 있고 싶은 그런 욕망이 고개를 든다.
“이제 출발하죠.”
아린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유니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너희만 즐기고 우리는 하지 말라는 거야?”
유니가 인상을 팍 쓰며 그렇게 말하자 세리아가 쿡쿡 웃었다.
“아니, 너희 10분 째 그러고 있었잖아.”
10분?
나는 그녀들의 모습을 살폈다.
이미 짐까지 전부 들고 갈 준비를 마친 상태다.
“…흥. 가자, 에릭.”
유니는 아쉽다는 듯 입술을 씰룩이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시, 시간 가는 줄 몰랐어.”
“…나도야.”
그녀는 부끄러운 듯 내 손을 잡았다.
***
그리고 찾아온 그 날 저녁, 우리는 본격적인 식사를 위해 불을 피우고 스튜를 준비했다.
세리아와 아린은 자진해서 식사를 준비하러 갔는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유니도 데리고 갔다.
당연히 그녀는 나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지만 내가 요즘 그녀에게만 의존하는 것 같아 갔다 오라고 권해주었다.
어차피 유니는 정령으로 내 모습을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지 않는가.
결국 유니는 걱정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는 그녀들을 따라갔다.
사실 내가 이렇게까지 유니를 잠시나마 떼어놓은 이유는, 그에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렌 씨.”
“여전히 씨를 붙여주시는군요.”
그는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그녀들을 놓아달라고는, 하지 않겠어요.”
“용사님의 여자가 아니니까요.”
“그래도 제 파티원입니다. 임무수행에 방해가 된다면 제지할 정도의 권리는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잠자코 내 말을 들었다.
“아무튼 적어도… 그녀들에게 심한 짓만 하지 마세요.”
“심한 짓이라면?”
나는 이걸 직접 입으로 말하기가 부끄러워 잠시 머뭇거렸지만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그녀들을… 존중해주세요.”
“흐음.”
아린의 고백을 들었을 때는 정말 충격이었다.
그런 짓을 태연하게 하는 그도 이상했고, 이를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그녀의 반응도 이상했다.
둘 다 제정신이 아니다.
아니, 세리아도 이를 방조하거나 동참했으니 셋 다 제정신이 아니다.
“그녀들을 노예처럼 다룬다고 들었습니다.”
“흐흐, 둘 다 그걸 바라고 있으니까요.”
책임을 회피하려는 듯한 그의 발언에 나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렇더라도, 그녀들을 존중해주었으면 합니다.”
“하아….”
그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지만 유니를 의식해서인지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죠.”
비록 알맹이 없는 대답일지라도, 그의 입으로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들이 물을 긷고 돌아왔다.
“…그 말, 정말인지 지켜보겠어.”
정령으로 전부 들었음을 숨길 태도가 전혀 없는 말투였다.
제렌은 유니의 말을 듣고 씩 웃었다.
“제가 또 약속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지키죠. 아시지 않습니까?”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유니는 그를 살짝 노려보았지만, 굳이 더 입씨름을 하지는 않고 나에게 다가왔다.
“별 일 없었어.”
“응, 알고 있어.”
역시 우리 모습을 다 보고 있었나보다.
“…혹시 불쾌하다거나 그러지는 않지?”
유니는 문득 내가 이 사실을 불쾌하게 여길지 걱정되었는지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응? 아냐, 괜찮아.”
내가 유니를 거부할 리가 없는데.
어릴 때부터 나는 유니가 하는 말이나 행동에 불만을 가진 적이 없다.
그녀는 항상 나를 위해서 행동했으니까.
“…응, 다행이다.”
유니는 그런 나를 보며 왠지 아슬아슬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저녁시간도 지나고 밤이 다가오자 우리는 불침번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그냥 두 팀으로 나눠 번갈아 서죠. 그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는 당당하게 자기편과 우리 편으로 시간을 나누자고 제안했다.
“…알았어요.”
마음에 안 들지만, 어차피 개인 단위로 쪼개봤자 이제는 별 의미가 없겠다 싶었다.
“그럼 처음은 저희들이 서죠. 두 분은 좋은 시간 보내십쇼. 시간 맞춰 불러드릴 테니.”
“읏….”
그의 은근한 말에 나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유니는 뭐라 대꾸하는 대신 나를 슬쩍 끌어당겨 같이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에릭, 어떻게 할 거야?”
“순서 말이야?”
우리가 마지막 불침번을 선다고 하면 나와 유니, 둘 중 누가 먼저 할지를 정해야 한다.
“그냥 같이 서면 되잖아.”
“아, 그러네.”
나는 당연히 평소대로 혼자 설 것을 고민하고 있었지만, 유니의 말대로 이제는 둘이 같이 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 그렇지, 응….”
나는 이 사실이 왠지 두근거리게 느껴져, 얼굴이 달아올랐다.
“…후후, 그럼 즐거움은 그 때를 위해 남겨두자.”
그렇게 말하며 유니는 침낭 안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그래, 일단은 자자.
유니와는 조금 뒤 불침번 때 다시 볼 테니까.
나는 그녀를 안고,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
“으음….”
문득 눈이 뜨였다.
무언가가 나를 깨운 느낌이 들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 둘밖에 없었다.
착각이었나?
고개를 돌리니 유니가 내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
그녀가 나를 깨웠다거나 그러지는 않은 것 같다.
바람 소리 같은 걸 듣고 깨버린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누우려고 했는데, 바깥에서 희미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제렌이 그녀들이랑 하고 있는 거겠지.
신경 쓰지 말자.
나는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흐읏, 흑….”
세리아의 소리다.
“꺄흑…! 흣, 흐읍….”
이건 아린의 목소리.
무언가 고통을 받고 즐거워하는 것 같다.
내가 그렇게나 말을 했는데, 역시 들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나보다.
“…후읍… 쥬읍… 쥬릅….”
이건… 누구지?
세리아나 아린은 아니다.
무언가를 빨고 있는 소리 같은데, 이 작은 소리가 왜 이렇게 정확하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쮸읍… 츄릅, 츕….”
그 목소리는 분명 제3자의 것이지만, 왠지 모르게 낯설지가 않았다.
저 밖에 누가 더 있단 말인가?
아니, 착각이겠지.
분명 세리아나 아린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는데, 자꾸만 그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분명 익숙한 소리 같은데….
한 번 나가서 확인해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내 착각이겠지만… 그래도 왠지 찜찜하다.
나는 유니가 새근새근 잠든 것을 확인하고 천막을 걷으려다가, 무언가 나를 잡아당기길래 멈칫했다.
유니가 잠든 채로 내 옷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깬 건가?
아니, 여전히 자고 있는 채다.
아무리 그래도 자고 있는 유니와 자는 척하는 유니를 구분 못할 내가 아니다.
이건 분명 자고 있는 거다.
그런데도 그녀는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나를 저지한 것이다.
“…알았어.”
왠지 확인하지 말라는 유니의 메시지 같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천막 입구를 다시 닫았다.
그래, 그 모습을 본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분명 이 소리는 내가 그녀들의 목소리를 잘못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위화감은 남아 있지만, 나는 그 불편한 감정을 애써 무시하고 다시 눈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