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 [짐꾼] 사천왕과 짐꾼
“그래서 잘 되고 있는 거야?”
“네… 그래도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기는 해요.”
다리 사이를 자극하는 내 팔을 꼭 껴안은 채 아린이 말했다.
등 뒤로는 세리아의 안마를 받으며 나는 그녀들의 보고를 들었다.
유니를 내 손아귀에 넣는 가장 좋은 방법.
그것은 유니가 아닌 용사를 공략하는 것이다.
지금 유니는 경계심이 극도로 올라가 있는 상태.
나나 그녀들이 유니에게 접근하면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가 그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면, 그녀에게 영향을 미칠 인물을 공략하면 되는 것이다.
“에릭 씨는 원래 밀어붙이는 것에 약하니까… 흐응… 당장 저희를 쫓아내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이지만, 그는 이 지경이 되어서도 여전히 관계가 이전처럼 되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본인도 잘 알겠지만 그래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한다.
여러모로 모순된 말이지만, 그게 용사였다.
“용사는 어떻게 됐지?”
“주인님과 에릭의 차이를 인식시켜줬죠. 조금은 신경을 쓰고 있을 걸요?”
용사도 나처럼 문양이 있다.
그 말은 내가 세리아나 아린과 섹스할 때처럼 둘도 섹스를 하면 문양끼리 반응이 나타난다는 뜻.
둘의 기술은 그리 좋지 않을 테지만, 섹스에서 오는 만족도는 무척 높을 것이다.
“후후… 하지만 그건 너무 미적지근하죠.”
아린이 내 생각을 읽었는지 키득 웃으며 말했다.
그래, 어차피 그래봤자 초보자 둘이서 어색하게 관계를 맺는 정도다.
이성이 마비되고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그런 강렬한 쾌락은 겪지 못하겠지.
“에릭은 모르겠죠. 그런 세계가 있다는 걸.”
당연하다. 아직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러니 서서히 깨닫게 해준다.
남녀 간의 진짜 관계가 무엇인지를.
중요한 것은 그가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
“유니는 알고 있을 거예요. 정령으로 몇 번이든 봤을 테니까.”
아마 에릭과 맺는 관계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본 기준은 이미 우리에게 맞춰져버렸으니까.
“함부로 엿보면 벌을 받는 거죠.”
아쉬움. 그녀에게는 분명 아쉬움이 생길 것이다.
아마 그러면 유니는 용사를 어르고 달래서 그를 성장시키려고 하겠지.
그러나 이미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느낀 용사는 스스로 성장의 한계를 그어버릴 것이다.
유니가 만족하지 못할 만큼.
“저희는 기다리면 돼요.”
경계심이 잔뜩 오른 유니는 이미 독을 삼켜버렸다.
남은 것은 조금씩 그것이 퍼져가기를 기다릴 뿐.
뭐, 물론 손 놓고 있을 생각만은 아니지만.
“그럼 슬슬 갔다 올게요.”
나는 그녀들을 놓아주었다.
유니가 용사에게서 떨어져있는 이 시간이 우리에게는 가장 좋은 기회다.
세리아와 아린은 한 번씩 나에게 입을 맞추고는 열기를 띤 얼굴로 방을 나섰다.
홀로 남은 나는 가만히 앉아 곧 찾아올 손님을 기다렸다.
“…정말로 생각 없나요?”
“없어.”
창문 밖에 걸터앉은 루엘라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 여자가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닌데도요? 그 계획이 정말 잘 먹힐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루엘라는 내가 매몰차게 거절한 그 날 이후로도 꾸준히 나를 찾아와 포기하고 이만 떠나갈 것을 권유했다.
이렇게 그 쪽이 급한 모습을 보일수록 우리는 더 느긋해지는데, 그녀는 그런 사소한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모양이다.
“괜한 욕심 부리다가 다 잃지 말고, 이쯤하고 물러가는 편이 좋을 텐데요.”
“같은 소리 지겹지도 않냐?”
그 말에 그녀는 살짝 뚱한 표정을 짓더니 주변을 둘러보고 내 방 안으로 완전히 들어왔다.
“뭐야?”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방 안을 휙 둘러보더니 자기 몸을 가리켰다.
“그래서 접근방식을 한 번 바꿔보기로 했죠.”
“뭐?”
“설득이 안 먹힌다면… 보상은 어떨까요?”
“무슨 보….”
그러자 그녀의 몸이 쫙하고 갈라지더니 다시 뭉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모습에 나는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는데, 그녀가 조금이라도 그 모습을 더 오래 보여줬으면 분명 질렀을 것이다.
“이런 거죠.”
순식간에 다시 살이 붙은 그녀는 유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뭐야? 그, 흑마법 어쩌구….”
“수복에는 타인의 피와 살이 필요하지만, 겉모습 뿐만이라면 별 대가 없이 쉽게 바꿀 수 있죠.”
그녀는 유니의 얼굴과 체형을 똑같이 따라한 뒤 나에게 접근했다.
“원한다면… 제가 그 아이의 역할을 해드릴 수도 있어요. 어때요? 이러면 괜찮지 않나요?”
“…그렇게까지 우리가 위협인가?”
“모든 불안의 싹은 제거하고 싶으니까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정말로 그게 목적이라면, 왜 진작에 우리 모두를 죽여 버리지 않았는가?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왕궁에서도, 아세일라에서도, 혹은 우리가 방심한 모든 찰나의 순간들에서 그녀는 우리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이지 않았다.
대체 왜?
“죽이지 못하는 거군.”
“…….”
그 말에 유니, 아니 루엘라가 잠깐 멈칫했다.
“그래서 자꾸 설득만 하고 이렇게 직접 나서는 거지. 우리를 직접 죽일 수는 없으니까. 제 발로 떠나가도록 유도할 수밖에 없고… 누군가 시켰나?”
사천왕에게 명령할 수 있는 존재라면… 마왕밖에 없을 텐데.
마왕? 마왕이 시켰다고?
마왕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지 않나?
“후….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거였으니 상관없겠죠. 그래요, 그 말대로 저는 당신들을 직접 죽일 수 없어요. 정확하게는 죽여서 그 분의 진노를 사고 싶지 않은 거지만.”
루엘라는 유니의 모습으로 손가락을 살짝 입에 물면서 나를 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유혹하려는 건가?
그렇지만 유니 모습으로 저러고 있으니 좀 어색한데.
“…그렇지만 저는 언제든지 그 모든 걸 포기하고 당신들을 죽여 버릴 수 있어요. 그 분에게서 멀어지는 것보다, 지금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보다 저에게는 그 분의 안위가 더 소중하니까.”
“그래서 나한테 몸을 대주겠다고? 완전 창녀의 마음가짐이구만.”
내 비아냥에도 그녀는 꿈쩍 않았다.
“저희한테 그런 유치한 비난은 통하지 않아요. 저희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경험했으니까요.”
루엘라는 그렇게만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루엘라는 유니가 되어있었다.
“그러니까… 그런 사소한 수작은 다 잊고 지금에 집중해요, 제렌 씨….”
나는 내 품에 안긴 그녀를 바라보며 쌀쌀맞게 말했다.
“주인님이라고는 안 부르나?”
“…연기라고는 해도 제 주인은 한 분 뿐이라.”
“이래서야 아무 느낌도 안 들잖아.”
그 말에 유니, 루엘라는 키득 웃었다.
“그러면 제 입에서 주인님 소리가 나오게 열심히 해보시죠. 그런 거 좋아하잖아요?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건방진 말.
유니답지 않은 말이지만, 나를 안은 그녀에게서는 익숙한 냄새가 났다.
유니의 향.
유니의 냄새다.
지금의 그녀는 누가 봐도 유니와 닮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유니로 착각할 수밖에 없으리라.
착각.
나는 거기서 에릭을 함정에 빠뜨릴 더 좋은 방법을 찾았다.
“루엘라.”
“여기 그런 여자는 없어요.”
“…유니.”
“네에?”
루엘라는 나를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결국 네가 원하는 건 용사가 마왕을 잡지 못하게 만들라는 거지?”
세리아와 아린을 데리고 파티에서 이탈하라.
즉, 용사 파티가 전력을 낼 수 없게 만들라는 소리다.
“후후, 생각이 달라지셨나요? 좋아요.”
“그럼 나를 도와. 내가 유니까지 빼앗아서 전력을 확실하게 줄여주지.”
“저에게 뭘 시키려구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똑같이 씩 웃어주었다.
“그렇게만 있어줘.”
***
“흠… 재밌는 계획이네요.”
내 계획을 들은 루엘라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잠시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점이 변수지만… 시도해 봐서 나쁠 건 없어 보여요.”
“그렇겠지?”
지금까지 봐온 용사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럭저럭 가능해보인다.
“…그런데 잘 할 수는 있어?”
“절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죠? 제 걱정은 필요 없어요.”
루엘라는 당당하게 자기 가슴에 손을 올리며 그렇게 선언했다.
지금 모습을 보면 좀 불안불안한데.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보다 우리 파티원들과는 대조적으로 큰 가슴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이 몸에 손대면 약속이고 나발이고 바로 죽일 거예요.”
“…다른 몸은 상관없다는 건가.”
이해가 안 가는 사고방식이다.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본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들은 전부 가상에 불과하죠. 저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어요.”
“…그래봤자 다른 남자랑 했다는 사실은 남잖아.”
“제 몸이 아니라 가짜 몸에 남는 거죠. 아무 문제없어요.”
아니, 뭔가 좀 이상한데….
“신경 쓰지 마요. 평생 주어진 모습으로밖에 살지 못하는 당신들은 모르는 얘기니까.”
“뭐, 그래….”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좋아요. 제안에 응하죠.”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대신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정령사까지 빼앗고 나면 당신은 용사와 협력하지 마세요.”
“좋아.”
어차피 누가 이기든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얘기고, 여생만 무사히 살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게다가 뭐, 정 안 되면 이런 구두약속 따위 얼마든지 깨도 그만 아닌가.
“만약 어기면 저와 목숨 걸고 싸워야 하니 그리 아시고.”
“…그래.”
루엘라와 싸우는 것은…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원래 이런 건 급해지면 뭐라도 생각나는 법이다.
나는 그런 딴 생각을 품으며 루엘라가 내민 손을 마주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