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 [용사] 둘의 관계
유니에게 성과가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3일 뒤의 일이었다.
“이제 첫 발걸음은 뗀 것 같대.”
유니는 살짝 기쁜 듯 으쓱거리며 말했다.
이 모습은 영락없는 평소의 유니 같은 모습이었다.
요즘 차갑고 냉정한 그녀의 일면을 많이 접해서 그런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나는 그 때 그녀의 다른 면모를 보면서 어느 쪽이 진짜 유니인가 고민을 했었다.
혹시 내가 알고 있는 유니는 전부 꾸며낸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것만큼은 아니길 바랐고, 정말 그런 것이라면 나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와 하루 종일 붙어 지내면서 느낀 점은 역시 유니는 유니라는 것이다.
어딘가 맹한 구석이 있고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그녀의 모습이 숨길 수 없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게다가 유니 본인도 말하지 않았던가.
이건 전부 연습의 산물이라고.
그녀의 그 차갑고 냉정한 모습은 유니의 연기였다.
약한 사람으로 비치지 않기 위한 그녀의 갑옷.
마을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끌기 위해 필요했을, 그런 만들어진 모습이었다.
“사실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하지만… 스승님 말로는 한 발짝 떼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스스로 걸어갈 수 있다고 하시더라구. 아무래도 계속 봐주시지는 않는 것 같아.”
“그렇네. 그 분도 자의는 아니라고 해도 일단 사천왕이고… 우리도 계속 여기서 머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 우리도 슬슬 출발해야한다.
지출하는 경비도 생각하면….
경비?
그러고 보니 경비는 어떻게 되고 있지?
“경비? 아직은 세리아가 관리할 텐데…. 그러네, 계속 그녀에게 맡겨둘 수는 없겠지.”
유니는 심각한 표정으로 내 말에 동의했다.
“세리아가 이제 공정하게 돈을 관리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아린도 안 되고.”
…그럼 유니가 직접 하려는 건가?
“으으… 근데 나 돈 계산은 약한데 어쩌지….”
그러나 유니는 울상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래, 우리 둘 다 계산에 약했다.
아니, 그냥 머리 쓰는 것 자체에 약했다.
괜히 세리아와 아린이 파티의 참모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게 아닌 것이다.
하필이면 그녀 둘이 전부 넘어가버리는 바람에 다소 곤란하게 되었지만….
“내가 어떻게든….”
“내가 얘기해볼게.”
유니가 각오를 다지고 그렇게 말하려 하자, 나는 먼저 선수를 쳤다.
“…에릭이?”
“응. 계속 유니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잖아.”
안 그래도 이런 것에 약한데.
자꾸 유니에게만 부담을 지우는 것도 미안하다.
“난… 정말 괜찮아, 에릭. 에릭이야말로 괜히 그런 마음고생 안해도….”
“아냐. 나도 계속 유니에게 의존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했거든. 이건… 이건 내가 얘기해볼게.”
“……정말 괜찮은데.”
유니는 작게 중얼거렸지만, 정말 이대로라면 유니에게 모든 걸 의존하고 사는 한심한 남자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알았어. 에릭이 하고 싶은 걸 막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 그 얘기랑 같이 슬슬 이동해야한다고도 전하고 오자.”
에르티나가 유니의 지도를 더 봐주지 않게 된 시점에서 우리가 이 도시에 남아있을 이유도 사라졌다.
다시 마왕성으로 향할 때가 된 것이다.
“…그래도 역시 불안하니까 나도 같이 갈게.”
“알았어.”
사실 나도 혼자서 들어가기는 좀 겁이 났던 터라, 유니의 말이 꽤 안심되었다.
“아, 그런데 조금 이따가 가자.”
“어? 왜?”
“…지금 들어가기는 조금 그러네.”
바로 가서 얘기하고 오려고 했는데, 유니가 살짝 굳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기에 우리는 시간이 더 지나고 난 뒤에야 그들의 방을 찾았다.
들어가자마자 보기 험한 꼴을 볼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 그들은 평범하게 자리에 앉아있었다.
“휴우….”
“하아….”
세리아와 아린이 한숨을 쉬기는 했지만, 그걸 제외하면 특별할 것 없는 평소대로의 분위기였다.
“의외네요, 에릭 씨. 직접 오실 줄은 몰랐어요.”
“…중요한 얘기니까.”
“저번에도 중요한 얘기 아니었어?”
세리아는 히죽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이 도시에 더 머물 것인지 아니면 출발할 것인지.
그것을 정할 때, 나는 유니를 대신 보냈다.
그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리아는 그 점을 지적했고, 그녀의 말이 사실이기도 했기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마.”
유니가 팔짱을 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자 그제야 본론을 얘기할 수 있었다.
“…그래, 무슨 얘기 하러 왔는데? 이제 슬슬 출발한다고?”
“응.”
“어디로 가려고?”
세리아의 말에 나는 살짝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마왕성 쪽으로….”
말하면서도 살짝 부끄럽다.
우리 실력에 마왕을 잡을 수는 있을까?
당장 사천왕도 못 이기는 판국인데.
“그래, 슬슬 갈 때가 되기는 했지.”
“오래 쉬었죠. 다시 하루 종일 걷게 되겠네요.”
그러나 의외로 그녀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놀란 눈을 하고 있었는지 세리아와 아린이 나를 보며 웃었다.
“왜? 우리가 할 일도 내팽개칠 줄 알았어?”
“저희는 동료잖아요?”
그래… 비록 마음은 떠났어도 여전히 그녀들은 우리의 동료인 것이다.
“마왕성이라… 이길 수 있겠죠?”
“그러길 바라야지.”
“어쩌면 생각보다 약할지도 모르잖아요.”
“후후… 그랬으면 좋겠네.”
그녀들은 그런 농담을 하며 전의를 내비쳤다.
제렌은 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 그저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사실 그와 대화를 나누기는 여전히 부담스러워서 나로써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럼 내일부터 출발하는 거지? 준비해야겠네. 알았어, 내일보자.”
세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자기 몸을 제렌에게로 기울였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급히 말했다.
“아, 아직 하나 더 있어!”
“…뭔데?”
아주 잠깐이지만 그녀가 혀를 차는 걸 들었다.
…그녀는 아직 우리의 파티원으로만 남아있을 뿐, 나와의 감정적인 교류는 이제 끝난 것이다.
“…여행 경비, 이제 우리가 맡을게.”
유니가 담담하게 뱉은 말에 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 못 미더워서?”
세리아는 살짝 비웃는 듯한 미소로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할 수 있겠어?”
“할 거야.”
“그냥 내가 하던 대로 할 테니 내버려두는 게 어때?”
세리아와 유니가 팽팽하게 서로를 노려보았다.
계속 이어질 것만 같았던 둘의 신경전은 결국 세리아가 한숨을 쉬면서 끝이 났다.
“알았어. 그럼 이제 우리는 안 건드릴 테니까 경비는 너희가 관리해.”
“돈은 어딨어?”
“가방 안에.”
그렇게 말하며 세리아는 방구석에 놓인 가방을 가리켰다.
제렌의 가방이었다.
“…왜 저기에 보관하는데?”
“걱정 마. 안 건드렸으니까. 보관하기 편한 곳에 옮겼을 뿐이야.”
유니는 살짝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지만, 세리아는 웃기만 할 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가자, 에릭. 챙겨서 빨리 나가자.”
“아, 응….”
그들은 가방을 가져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유니는 내 손을 잡아 나를 일으키고 가방을 열어 돈을 찾았다.
“…가슴….”
“흐읏… 하아….”
가방의 내용물을 뒤적이는 우리의 뒤로, 불쾌한 소리가 들렸다.
“저런 더러운 장난에 놀아나지 마, 에릭.”
“아, 응….”
역시 저 소리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았나 보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장난을 친단 말인가?
나는 애써 그 소리를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며 가방을 뒤졌다.
“세리아, 오늘은 제가 먼저….”
“방해하지 말고… 의자나….”
그렇지만 귀를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자꾸만 신경 쓰였다.
먼저? 뭐를 먼저 한다는 거지?
“흐움… 흡, 하앗….”
짜악!
“흐읏….”
대체 뭐지?
불쾌함 이전에 궁금증이 앞서기 시작했다.
“에릭.”
“아, 응!”
유니는 내 시선이 돌아가는 걸 귀신 같이 눈치 채고는 다시 나를 불렀다.
“찾았어.”
그녀는 가방 안쪽에서 돈주머니를 찾았다.
“이제 가자. 쟤네 하는 짓에 어울려줄 필요 없어.”
유니는 주머니를 들고는 일어났다.
“흐응… 흡… 가는 거야…? 좀 더 있다가 가도 되는데….”
유니는 내가 뒤를 돌아보지 않게 나를 붙들고 그대로 문밖으로 데려갔다.
“에릭 씨….”
탕!
유니는 나를 곧장 데리고 나와서는 바로 문을 닫았다.
“…유니.”
“하아….”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나를 꼭 끌어안았다.
“저기서 화를 내면, 오히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셈이야. 이런 건 그냥 무시하는 게 좋아.”
“응….”
“아직 늦지 않았어, 에릭.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우리끼리….”
“…….”
그녀의 말에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유니는 그렇게 잠시 나를 안고 있다가, 다시 풀어주며 말했다.
“…정말 괜찮겠어?”
“마왕만… 잡으면 되는 거잖아. 그거면 돼.”
그래. 마왕을 잡을 때까지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신경 쓰지 말아야한다.
“에릭….”
유니는 무언가 더 말을 하려다가 입 안으로 삼키고는 말없이 내 손을 잡았다.
“가자. 오늘은 이 도시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잖아.”
그녀는 나를 데리고 방 안으로 돌아갔고, 우리는 평소보다도 더 오랫동안 사랑을 나누었다.
***
그렇게 다음 날이 찾아왔다.
우리는 짐을 챙겨 다시 한 번 마왕성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멤버도 그대로고, 나머지 사천왕들도 건재하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 속으로는 너무나 많이 바뀌어버렸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겉으로는 용사 파티였고, 적어도 아직은 모두가 마왕을 토벌해야한다는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
마왕토벌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