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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짐꾼-145화 (145/236)

〈 145화 〉 [짐꾼] 루엘라의 제안

“…뭐?”

생각해보니 어제 그녀는 분명 내키지 않아하는 듯 보였다.

그래도 결국 납득하고 돌아간 것처럼 보였는데….

“적어도 늙어 죽을 때까지 돈 걱정은 할 일 없게 만들어드리죠. 명예? 작위? 원한다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요. 저 루엘라의 이름을 걸고 행복한 여생을 제공해드리죠.”

“…우리가 마왕을 잡을까봐 걱정되는 건가?”

그녀가 마왕에게 충성하는 입장이라면 이는 당연한 걱정이겠지만, 솔직히 우리는 당장 저 루엘라 하나를 이길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건가?

“저도 알아요, 여러분들이 약하다는 것 정도는. 하지만 저번에도… 저희가 정말 강해서 마왕을 이겼던 게 아니죠. 여러 가지 행운이 겹쳤어요.”

루엘라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용사란 그런 존재에요. 용사가 강하든 약하든 상관없죠. 결국 내버려두면 언젠가 용사는 마왕을 이기게 되어있어요.”

“용사가 들으면 좋아할 소리겠군.”

용사의 가장 큰 불안이 그것 아닌가.

나는 너무 약해, 마왕을 이길 수 있을까 같은 불안들.

루엘라의 말을 전해준다면 분명 마음 속 부담을 덜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죠. 왜 동료들이 있겠어요? 용사는 동료들과 합쳐서 하나의 용사가 되는 거예요. 동료들이 하나둘 떠나면 용사는 용사가 아니게 되죠.”

“그러니 나보고 떠나 달라? 너희가 세상을 지배하는 걸 보면서?”

사실 누가 지배하든 평민과 그 밑의 우리 같은 떨거지들은 별 변화가 없다.

교회와 높은 귀족들은 마물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인간들을 몰살한다고 주장하지만, 암암리에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별반 차이 없다는 말도 있다.

그냥 길거리에 낯선 괴물들이 돌아다니게 될 뿐, 생활 그 자체가 뿌리째 흔들리지는 않는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 흔들릴 뿌리 자체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차피 당신은 인간들이 지고 이기고 그런 것에 관심 없잖아요? 아무튼 잘 살면 되는 거죠. 그렇죠?”

“그래서 나한테 제안한 거구만.”

내가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이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다.

나는 용사가 이기든 말든 크게 관심이 없다.

용사가 진다고 세계가 멸망하는 것도 아니고, 용사가 이긴다고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지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이기면 그저 아무런 변화 없는 이전으로 돌아갈 뿐이니까.

잃을 게 없는 이들에게는 정체보다는 미지의 가능성을 품은 혼돈이 더 나을 수도 있는 것이다.

“화려한 집, 부유한 재산, 사회적 명성. 그리고 당신을 평생 섬길 노예까지. 당신이 바라는 삶 아닌가요?”

루엘라의 제안은 그 불확실한 가능성을 완벽한 가능성으로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마차를 마련해드리죠. 오늘 밤, 둘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세요. 그리고 원하는 곳에 정착하세요. 모든 생활기반은 제가 마련해줄 수 있어요.”

루엘라는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동의하시는 걸로 이해해도 되겠죠?”

루엘라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용사의 위협을 완전하게 배제하기 위해서이리라.

파티원을 분열시켜 약화시키고, 그가 절대 마왕에게 대적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는 이유는 당연히 그녀가 마왕에게 복종하기 때문이겠지.

그러면 세라는? 세라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러면 그녀는 마왕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인가?

“음….”

“고민하실 이유가 있나요? 설마 이제 와서 이상한 사명감에 눈 떴다거나 그런 소리를 하지는 않을 거라 믿어요.”

“아니, 그건 아니지.”

그랬으면 애초에 용사의 파티원을 뺏는다는 발상 자체를 안했다.

그냥 지금 상황이 조금 이상할 뿐이다.

원래 나에게 득밖에 없는 제안은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기꾼들이 항상 이렇게 달콤한 제안을 들고 오지 않던가.

“…슬슬 대답을 들려줬으면 좋겠는데요.”

루엘라의 표정이 변하는 것이 보인다.

미소에서 분노로.

입꼬리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철컥!

그 순간 잠긴 문고리가 돌아갔다.

뭐야, 언제 잠겼지?

“주인님?”

세리아의 의아한 목소리.

왜 문을 잠갔지? 라고 묻는 듯 하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이 좋은 기회를 왜 걷어차는지 모르겠네.”

루엘라는 시간이 됐다는 걸 깨닫고 짜증을 냈다.

“되도 않는 정의감에 취한 거라면 그냥 자살하라고 권하고 싶네요.”

정의감? 아니 그런 걸로 고민하는 건 아니다.

그냥 제안이 너무 수상하잖아.

그렇지만 내가 이 제안을 고민하고 있는 것도 사실.

내가 왜 고민하고 있지?

“하아…. 어차피 정령사가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요? 괜히 욕심부리다가 죽으면 무슨 소용이에요?”

루엘라의 말도 맞다.

이미 세리아와 아린이 있으니 더 욕심 부릴 필요도 없지.

내가 유니를 손에 넣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철컥철컥.

“하아… 내일 다시 오죠. 그럼 이만.”

그러면서 그녀는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나는 창문 바깥으로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문은 갑자기 왜 잠그셨나요?”

“내가 안 잠갔어.”

“네?”

루엘라는 들어오자마자 문부터 잠그고 대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역시 이 년, 수상하구만.

세리아와 아린은 당연히 반대할 테니까, 방에 들어오는 것 자체를 막으려 한 것이다.

어차피 주인은 나고 그녀들은 내 말에 따를 수밖에 없을 텐데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용사의 귀에 들어갈까 봐?

“…주인님? 왜 그러세요?”

“신경 쓰지 마.”

나는 왜 계속 이 파티에 남아 있지?

그야 당연히 유니 때문이지만, 그 여자가 나에게 특별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하면 그건 또 아니다.

어제는 내 솔직한 감정을 담아 거절하기는 했지만, 그 이유를 파고들어가니 좀처럼 쉽게 알 수가 없었다.

“흠….”

일단은 조금 고민을 해봐야할 것 같다.

***

다음 날도 유니는 에르티나의 교육을 받으러 나갔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기 전 우리 방에 쳐들어와 엄포를 두고 나갔다.

“에릭한테 달라붙지 마. 죽여버릴 거니까.”

그렇게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유니가 경고를 하고 가자, 나는 살짝 고민했다.

그녀의 모습을 보니 정말 하고도 남지 않을까?

“세리….”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녀가 입을 탁 막았다.

“뭐야?”

그녀는 한 10분이 지나서야 대답했다.

“잘 풀리고 있는 거예요.”

그녀의 말에 아린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가 잘 풀렸는데?”

“경고를 했다는 거 자체가 그 증거죠. 유니는 에르티나와 함께 있는 동안 정령으로 우리를 감시할 수 없어요.”

“…그렇게 되는 건가?”

세리아는 자신만만하게 팔짱을 꼈다.

“감시가 가능했으면 경고도 안했겠죠. 역시 이런 쪽으로는 아직 미숙한 면이 보이네요.”

자기가 감시하지 못하는 사이 일이 터질까봐 미리 경고를 한 셈인데, 결국 그게 본인의 약점을 그대로 노출한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저희는 이대로 하면 되겠네요.”

세리아와 아린은 계획을 수정없이 그대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녀들이 떠나기 전, 나는 문득 루엘라와 했던 얘기가 생각나 잠시 그녀들을 멈춰 세웠다.

“너희는 왜 용사 파티에 들어왔지?”

예상외의 질문에 그녀들은 살짝 당황한 눈치였으나 어려운 질문도 아니었으니 그냥 순순히 답했다.

“꿈을 꿨죠.”

“에릭 씨처럼 여신의 계시를 받은 건 아니었지만… 저희가 누군가와 함께 마왕을 물리치는 꿈을 꿨어요.”

용사에게 들었는지 세리아에게 들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용사의 동료도 계시 비스무리한 것을 받는다고 했다.

용사처럼 뚜렷한 계시는 아니고, 그냥 내가 용사와 함께 하겠구나 같은 수준의 모호한 꿈이라고 들었는데 그게 이것인 모양이다.

“그거 하나 때문에 파티에 들어온 건 아닐 거 아냐. 처음에 무슨 생각을 가지고 들어왔지?”

잠시 과거 일을 회상하며 그녀들이 생각에 빠졌다.

“저는… 그냥 그 때는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운명이라고 생각했죠. 용사와 함께 마왕을 토벌하는 사명이 저에게 주어졌다고 믿었어요.”

아린은 신앙 때문에 용사 파티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용사와 처음으로 마주한 순간, 그녀는 이게 전부 신이 내린 운명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저는 뭐, 딱히 그런 믿음을 가진 게 아니었으니까…. 그 때는 그냥, 마왕을 토벌한다면 제 입지가 확실해질 거라 믿었죠. 마왕 토벌은 세상에 둘도 없을 명예니까요.”

세리아는 명예를 위해서였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대마법사를 꿈꾸던 세리아는 용사의 제안에 곧바로 응했다.

“유니는?”

“유니는 뭐….”

“에릭 씨가 용사가 되었으니 그냥 따라갔다고 하던데요. 짝사랑 상대였으니까요.”

유니는 사랑 때문이었다.

그 맹목적인 집착이 잠든 정령사의 소질을 개화시키고, 스스로를 용사의 동료에 적합한 존재로 만들었다.

결국 그녀들은 각자 명예, 신앙, 사랑 때문에 용사 곁에 있던 셈이었다.

용사는 아마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말하자면 책임인 셈이다.

루엘라는 나보고 같잖지도 않은 정의감이라고 했지만, 그렇지 않다.

나에게 그런 게 없다는 건 스스로가 제일 잘 안다.

그럼 나는 왜 여기 있지?

“주인님은 왜 이 파티에 들어오셨죠?”

내 질문을 읽은 듯 세리아가 나에게 질문했다.

“네가 뽑았잖아.”

“그야 주인님이 먼저 손을 들었으니까요.”

세리아는 살짝 웃으며 그렇게 답했다.

기억난다.

그 때는 데론에서 모든 걸 다 잃고 쫓겨나듯 떠나 이름 없는 시골마을에 도착한 때였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짐꾼 역할을 하면서 하루 벌어먹고 살았는데, 어느 날 세리아가 짐꾼들을 불러놓고 사람을 구했다.

나는 그 때 유일하게 손을 들었다.

“왜 손을 드셨죠?”

“딱히 이유는 없었는데.”

정말 별 이유 없었다.

그냥 용사 파티면 오래 해먹을 테니 한동안 일거리 안 찾아도 되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들어오고 나서야 왜 다른 놈들이 지원을 안했는지 알았지만, 뭐 그땐 그랬다.

“지금은요?”

“지금은….”

지금은 짐꾼 역할도 애매해졌다.

일당을 주는 게 세리아인 시점에서 이제 의미도 없다.

실제로 세리아가 나한테 일당을 주는 일도 사라졌고.

필요하면 언제든지 쓸 수 있다.

이제는 짐꾼이라는 역할도 모호하고, 나는 그냥 용사의 여자들이나 빼앗아 호의호식하는 쓰레기가 되었다.

나 자체는 파티에 있든 말든 별로 상관이 없는 인물인 것이다.

내가 빠지면 같이 딸려올 세리아와 아린이 중요하지.

그런데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잖아?

나는 왜 남아있지?

“유니를 따먹어야하니까.”

그렇지.

고민할 거 뭐있는가?

충동적으로 최음약을 그녀들의 물에 탔을 때부터 이미 나는 충동만으로 살아오고 있었다.

“주인님다운 대답이네요.”

세리아는 그 대답에 쿡쿡 웃었다.

“그럼 저희는 주인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러 가볼게요. 그거면 대답이 되지 않을까요?”

살짝 눈웃음을 짓는 걸 보니 루엘라의 방문을 눈치 채고 있었던 걸까?

정확하게는 몰라도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았을지 모른다.

“세리아한테 역할을 뺏긴 기분이에요.”

아무 말도 못했던 아린이 툴툴거렸다.

“착각이야. 가자, 아린.”

아린은 입술을 비죽 내밀고서는 나를 바라봤다.

“이런 건 원래 제 전문이거든요. 고민거리는 원래 여기서 제가 제일 잘 들어주니까 앞으로는 꼭! 저한테만 말해주세요. 알았죠?”

아린은 내 당부를 받고서야 방을 나섰다.

그녀들의 얘기를 듣고 나니 확신이 선다.

그래,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지.

마왕을 잡든 말든, 명예가 생기든 말든, 돈을 주든 말든 다 알 바 아니다.

지금 내 목표는 유니를 함락시키는 것이고, 내가 파티에 남아있을 이유는 그거면 충분하다.

잠시 뒤, 창문을 넘어 루엘라가 안으로 들어왔다.

“생각할 시간을 드렸으니 이제는 대답을 들을 수 있겠죠?”

“덕분에 간만에 고민을 좀 했지.”

내 말에 루엘라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가끔씩은 그 굳은 머리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죠. 마차는 언제 준비해드릴까요?”

“아니, 안 갈 거야.”

그 말에 루엘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왜죠? 굳이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남아있을 이유가 있나요?”

“유니가 남아 있잖아.”

“제가 더 좋은 길을 제시하는데도요?”

나는 루엘라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루엘라는 똑똑한 여자다.

무엇이 더 이득이고 무엇이 더 불리한지를 잘 아는 여자.

그러니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원래 나는 머리 대신 좆으로 사는 새끼거든.”

유니를 내 밑으로 굴복시킬 때까지, 나는 멈추지 않는다!

내 당당한 선언에 루엘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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