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 [짐꾼] 루엘라의 제안
“그래서 무슨 볼일이라고?”
나는 살짝 인상을 쓰며 그녀들을 바라보자, 문 앞에 서있는 세라와 루엘라는 문 틈새로 내부를 들여다보더니 히죽 웃으며 말했다.
“뭐, 이런저런 할 얘기가 조금 있거든요. 들어가도 될까요? 한 5분 정도는 기다려드릴 수 있어요.”
“…알았어.”
나는 문을 닫고 잠든 그녀들을 깨워 급히 옷을 입혔다.
그리고 5분이 겨우 지나갈 무렵, 창문도 열고 방도 대충 치우고 그녀들을 맞이했다.
이런 건 노예들을 시켜야하는데, 방금 일어난 터라 얘네도 정신을 못 차린 상황이다.
“자는데 깨워서 죄송해요. 늦게 주무셨나보죠?”
세라가 다 알고 있다는 듯 쿡쿡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늦게 잤냐고? 그야 그렇지.
사실 몇 시에 잤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열심히 박아대다가 잠들고 일어나니 지금 시간이었다.
“즐기는 것도 좋지만 조금은 규칙적인 삶을 사는 게 어떨까요.”
루엘라는 그런 내가 마음에 안 드는지 살짝 퉁명스러운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무슨 상관이야. 우리가 이렇게 지내겠다는데.”
눈을 반쯤 뜬 세리아가 그녀를 흘기며 대답했다.
“게으른 년들이 상대라 다행이네요. 마왕님이 쓰러질 일은 없을 테니.”
루엘라의 비아냥에 세리아와 아린의 표정이 조금은 살아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직 그녀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잊지는 않은 것이다.
“이제야 이야기할 상태가 됐네요. 고마워요, 루엘라.”
“진심으로 한 소리야.”
“네, 네. 그건 안 중요하니 넘어가자구요.”
둘은 익숙하게 서로 틱틱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아마 저 둘은 인간이었을 때도 저러고 다녔으리라.
이렇게 인간적인 모습을 보니 그녀들이 한 때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실감난다.
“아무튼,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세라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우리들의 모습을 죽 둘러봤다.
“여러분은, 여기서 끝낼 건가요 아니면 더 하실 건가요?”
“…무슨 소리야?”
그녀가 대뜸 던진 질문은 당혹스러웠다.
세리아가 눈썹을 찡그리며 되묻자, 세라는 빙긋 웃었다.
“말 그대로에요. 당신은 마법사와 신관 노예를 얻었죠. 하루살이로 먹고살던 과거에 비하면 비교도 할 수 없을만한 쾌거에요. 당신은 원한다면 평생 일 안하고 살 수도 있어요. 대신 그녀들이 돈을 벌어 당신을 먹여 살리겠죠.”
세리아와 아린은 그 말에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이미 그럴 각오가 되어있다고 봐도 되겠지.
“그럼, 여기까지만 하고 돌아가시는 건 어때요?”
그래서 나는 이 말에 혹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많이 안 좋아지셨던데요. 정령사가 당신들의 비밀을 전부 폭로한 모양이죠? 게다가 그녀의 적대심은 상상이상이었구요. 이런 상황에서 굳이 당신이 위험을 감수하고 그녀를 손에 넣을 필요가 있나요?”
“…그녀는 그 둘에 비하면 여러모로 중요성이 낮죠. 집안도 보잘것없는 농촌의 촌장 집안이고, 정령사라는 희소한 직업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 능력이 대단하지는 않아요. 당신도 그녀가 꼭 필요하다기보다는, 용사에게서 여자를 전부 빼앗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 때문에 그녀를 노리는 거 아닌가요?”
둘의 말은 가차 없었다.
세라와 루엘라는 유니의 가치를 깎아내리면서 나에게 포기할 것을 권유하고 있었다.
“이 쯤에서 만족하고 원하는 곳에 가서 여생을 행복하게 사세요. 그러면 당신의 충실한 노예들은 그 뜻을 따르겠죠. 거부하면 어때요? 당신의 명령을 더 우선할 텐데.”
나는 그 말에 세리아와 아린을 쳐다봤다.
“…원하신다면.”
“으읏, 저는, …주, 주인님 뜻대로….”
차분하게 눈을 감는 세리아와는 달리 아린은 다소 망설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녀 또한 주인인 나의 뜻에 따르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빠지면, 남은 둘은 그대로 죽이고?”
“…파티에서 빠져나간다면 더 이상 아실 필요가 없죠.”
세라는 그렇게 말하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를 떨어뜨려 약화시킨 후 용사 파티를 전멸시킬 계획인가.
“…안 돼.”
“왜죠?”
유니가 죽을 테니까.
이유는 그것 하나면 된다.
“흐음.”
세라는 나를 보더니, 그 다음에는 내 뒤의 그녀들을 바라봤다.
“이거 참. 알겠어요.”
“그럼 계속 용사와 함께 저희와 대적하겠다는 말이군요.”
루엘라가 살짝 매섭게 눈을 뜨며 나를 노려봤다.
내 뒤에서 잠시 긴장감이 감도는 것으로 보아, 그녀들이 여차할 상황을 대비하고 있는 모양이다.
자리는 금세 적대 분위기로 변하고, 갑자기 세라는 싱긋 웃었다.
“좋아요. 그럼 좋은 걸 가르쳐드리죠.”
그녀의 말과 함께 루엘라도 세라를 흘끗 바라보더니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뭐지?
“내일부터 유니는 용사와 떨어질 일이 많아질 예정이에요.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잘 활용해보세요.”
“…대체 무슨 속셈이야?”
결국 불편해진 세리아가 짜증을 내며 끼어들었다.
“갑자기 우리를 협박했다 말았다… 아까까지는 돌아가라니 이번에는 왜 또 우리를 도와주려는 거야?”
“그거는 안 알려줄 거예요.”
세라는 농담하듯 짓궂은 아이처럼 그렇게 말했지만, 세리아의 표정은 도통 풀릴 줄을 몰랐다.
“…그래서 그 이유는 뭐죠?”
얌전히 듣고 있던 아린은 대답 듣기를 포기하고 다른 쪽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는 루엘라가 대답했다.
“에르티나가 유니를 교육시킬 거니까요. 그녀에게 정령술의 올바른 사용법을 가르쳐줄 생각이죠.”
“당신들이 데려간 거 아니었어?”
“그랬죠. 저희가 얘기 안했던가요? 그냥 이야기만 조금 하고 풀어줬어요.”
아니, 그렇게까지 노력해서 찾아 나선 주제에 고작 얘기 조금 하고 풀어줬다고?
그걸 믿으라는 말인가?
내가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걸 알았는지 루엘라와 시선이 부딪혔다.
그녀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희는 그녀를 억지로 붙잡아둘 생각이 없거든요. 에르티나가 나가고 싶다면, 그렇게 하면 돼요. 이건 저희의 방침이고, 여러분이 불만을 품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네요.”
“…아니, 뭐 우리야 적이 줄면 좋지.”
세리아는 팔짱을 끼며 그렇게 말했다.
그 말대로라면 우리에게 있어 득밖에 안 되는데 무슨 속셈인지 한 번 말해보라는 뉘앙스다.
“누구는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줄….”
“저희 방침! 이라니까요. 더 궁금한 건 저희를 이기면 알려드리죠.”
벌컥 짜증을 내는 루엘라의 말을 끊고 세라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래서 결국 뭐야. 아까 협박은 그냥 한 번 떠본 거고, 유니를 따먹으려면 지금 기회를 잘 살려보라는 거야?”
“그런 셈이죠.”
“너희도 너희 나름대로 꿍꿍이가 있고?”
“그렇겠죠?”
좀 짜증나는 대답인데.
대놓고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드러내면서도 결국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야 안 알려주는 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이 태도가 무척 거슬리지 않는가?
“…좋아. 이제 알았으니까 돌아가. 더 할 말 없지?”
그렇지만 그녀들의 말을 이미 들어버린 이상, 우리는 유니의 부재를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무슨 제안을 했으면 거절하기라도 했을 텐데.
이렇게 사실만을 알려주고 가만히 방치하는 건, 제안보다 더한 유도였다.
“제 할 말은 이걸로 끝인데. 루엘라, 할 말 있어요?”
루엘라는 말없이 잠시 나만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한 마디 했다.
“…됐어.”
“뭐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일어났다.
“가죠, 세라.”
“그래요. 다음에 또 봐요. 그 때 유니가 곁에 있을지 말지는 여러분 노력에 달렸겠지만.”
그러고서는 둘 다 가버렸다.
“정말 이 얘기 하나 알려주려고 온 거야?”
“…그런가 본데요.”
이게 굳이 둘 다 나설 만큼 중요한 일인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
다음 날, 방 밖이 소란스럽길래 슬쩍 살폈더니 유니가 에르티나를 따라 밖으로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세라와 루엘라가 말했던 대로, 그녀가 유니를 꾀어낸 것이다.
아마 에르티나는 진심이겠지만 결국 이게 그녀들의 계획이라는 것을 에르티나는 알까.
“진짜 갔네.”
“쥬읍… 쥽, 저희도, 흐믑, 뭔가 할까요?”
열심히 무릎 꿇고 내 자지를 빨던 아린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지금이라면 에릭은 혼자 있을 텐데, 허락만 해주시면 가서 살짝 흔들고 올게요.”
세리아는 침대에 앉아 무릎을 꼬고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유니를 떨어뜨릴 방법.
그녀들은 이를 위해 에릭을 이용하자고 제안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거지?”
“에릭을 흔들어서… 자신감을 잃게 만드는 거죠.”
자신감을 잃은 용사가 스스로 그녀를 포기하도록.
이것만 들어서는 허무맹랑한 소리 같은데.
“가능해?”
“가능하게 만들게요.”
“좋아. 가봐.”
“고마워요, 주인님.”
세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자지를 빠는 아린의 엉덩이를 찰싹 쳤다.
“그만 빨고 일어나.”
“흥읏…! 그, 그치만….”
아린은 아쉽다는 듯 나를 바라봤지만, 지금은 대계를 위해 소소한 즐거움을 포기할 때다.
나는 둘 다 보내줬다.
“갔다 올게요, 주인님.”
“나, 나머지는 갔다 와서…!”
둘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에릭의 방으로 건너갔다.
말은 잘 한다만, 과연 그렇게 쉬울까?
뭐, 너무 욕심부릴 필요는 없다.
세라와 루엘라의 말대로 이미 둘을 손에 넣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다. 정 안되면 무리해서까지 추구할 필요는 없겠지.
“착한 아이들이네요, 그렇죠?”
그렇지.
주인인 내가 교육을 잘 시켜서 이렇게 순종적인….
“뭐야, 시발.”
“이제야 혼자 남았군요.”
내 침대에 루엘라가 앉아있었다.
“추가로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나는 당장 문 열고 꺼지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나갈 여자는 아닐 것 같았다.
그래, 대충 듣고 빨리 보내자.
“또 뭔데? 어제 얘기 다 한 거 아니었어?”
“그녀 앞에서는 할 수 없는 얘기라서요.”
뭔 얘긴데?
“미안하지만 나한테 쓸데없는 참견할 거면….”
“포기하고 돌아갈 생각, 정말 없어요?”
이 얘기는 이미 끝난 거 아니었나?
문득 그녀의 말의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잠깐, 그녀라고?”
그녀들이 아니라?
세리아와 아린을 말하는 게 아니었나?
“네, 세라 앞에서는… 제대로 얘기를 할 수가 없었거든요.”
세라에게… 비밀인 사항?
“세라는 그냥 단순히 떠보기로 해본 소리였겠지만, 전 아니에요.”
그러면서 루엘라는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둘을 데리고, 전장에서 물러나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