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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짐꾼-142화 (142/236)

〈 142화 〉 [용사] 용사와 정령사

아침부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우리는 그 바람에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떠버렸고, 알몸으로 몸을 맞대고 누워있는 상대의 모습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아, 유니, 사람이….”

“어차피 세리아나 아린이겠… 아니네?”

투덜거리던 유니는 말을 멈추고 벌떡 일어났다.

“에릭… 에르티나 공주가 왔어.”

“어?”

정령을 통해서 문밖을 살핀 것인지, 유니는 그렇게 말했다.

급하게 옷을 갖춰 입고 창문을 열어 뜨거운 방안의 열기를 빼낸 후 우리는 그녀를 맞이했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냄새라던가 그런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기는 했을 것이다.

에르티나가 들어오자마자 코를 움찔거렸으니까.

나는 잘 모르는 사람에게 들켜 부끄러웠지만,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잘 지내고 계시는군요. 다행이에요.”

에르티나가 꺼낸 인사는 다소 생뚱맞았다.

“어… 가, 감사합니다….”

인사를 받긴 받았는데, 지금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녀는 사천왕 아닌가?

그것도 아마 자의가 아니었을 테지만, 우리는 세라와 루엘라가 그녀를 데리고 사라지는 것을 봤다.

그럼 눈앞의 그녀는 대체 뭐지?

설마 그녀들이 다시 풀어주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궁금하신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 설명을 드리죠. 그보다 좀 앉아도 될까요?”

그러면서 에르티나는 나와 유니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대뜸 바닥에 앉았다.

“고마워요.”

…허락도 안 했는데?

뭐 거절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먼저 앉고 고맙다고 말하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여러분들이 허락하신 걸 보고 앉은 거랍니다. 거절하는 사람과 허락하는 사람은 몸동작에서부터 차이가 나거든요. 저는 여러분들이 말로 하기 전에 그 신호를 읽었을 뿐이죠.”

“그, 그렇군요.”

대체 그걸 누가 아는가?

당황스러운 답변이었지만 정령사인데다가 사천왕이라고 생각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니, 근데 대체 왜 여기에?

“제가 여기에 찾아온 것은, 당신들을 도와드리기 위해서예요.”

또 내가 말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답해버렸다.

“도와줘? 당신이?”

유니는 살짝 매서운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이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못 믿으시는 것도 이해해요. 사천왕은 마왕에게 충성하는 존재여야 하고, 당신들의 사명은 마왕을 처단하는 것이니 모순되죠.”

그러면서 그녀는 유니가 뭐라고 더 말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저는 사천왕이 아니에요.”

“세라와 루엘라가….”

“아니에요.”

단호한 대답.

우리는 그녀의 표정에서 분노를 읽을 수 있었다.

“저는, 아시겠지만 원해서 이런 자리에 앉게 된 것이 아니에요.”

“역시 강….”

“네,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죠.”

다 좋은데 자꾸 말을 끊어버리니 살짝 신경 쓰인다.

“아, 죄송해요. 습관적으로 그만.”

마치 내 마음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그녀는 내가 불편한 기색을 느끼자마자 사과했다.

“당신도 전에는 엘프 공주였다면서. 그런데 사천왕이 되었다는 건 역시… 마왕이 당신들을 마물로 바꾼 거야?”

“전대 마왕의 힘이었죠. 이번 마왕은 그 능력을 빼앗아 저희를 사천왕의 자리에 앉혀놓았어요.”

잠깐, 그 말은 결국 이번 마왕이 저번 마왕의 힘을 빼앗고 마왕이 되었다는 말인가?

그렇지만 마왕은 저번 용사가 토벌했을 텐데.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그대로입니다. 사실 용사는 마왕을 토벌하지 못했어요.”

“…네?”

우리의 상식이 부정당했다.

“더 정확히는, 마왕을 토벌한 건 용사가 아니었죠.”

“…지금의 마왕?”

“맞아요.”

용사가 마왕을 토벌했던 게 아니라, 이번 마왕이 저번 마왕을 토벌했다고?

“대체 왜?”

“단순한 이유였죠. 권력과 영생. 마족은 기본적으로 늙어서 죽는다는 개념이 없거든요.”

그 말을 들은 유니는 잠시 이상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생각하시는 것이 맞아요. 이번 마왕 또한 한 때는 인간이었죠.”

“그, 그럼….”

머릿속을 스치는 불안한 예감.

에르티나는 우리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지금의 마왕은… 저번 용사의 시동이었습니다.”

“시동?”

시동이라면 그… 기사들을 보조하는 어린 아이를 말하는 거 아닌가?

“저희 시절의 전쟁은 지금과 많이 양상이 달랐어요. 세라에게 듣기로… 여러분들은 정규군과는 별도로 다니신다고 하더군요.”

사실 그다지 좋은 얘기는 아닌데, 국왕과 귀족은 우리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러나 병사로 편입시키기에는 용사라는 존재의 격이 안 맞고, 그렇다고 지휘관으로 두기에는 신뢰가 안 간다.

결국 일종의 별동대 같은 느낌으로 조직된 것이 우리 파티였다.

“저희는 전쟁의 지휘관이었습니다. 용사를 중심으로 저희가 참모, 혹은 장수 같은 느낌으로 활동했죠. 그 지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용사는 시동을 데리고 다닐 수밖에 없었어요.”

만약 우리도 그렇게 당당하게 군사를 이끌 수 있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을까.

“전쟁은 길었고, 저희도 시동도 모두 나이를 먹었죠. 어린 아이가 성인이 될 만큼 긴 시간이었어요.”

꺼림칙한 이야기다.

나는 이 뒷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만할까요?”

“에릭, 네가 원한다면….”

에르티나는 여전히 귀신같이 내 마음을 읽고 그렇게 물었고, 유니는 내가 듣기를 거부한다면 같이 안 들을 생각인 것 같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거부하고 싶다.

이 뒷이야기를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짧게, 얘기해주세요.”

그래도 우리는 알아야했다.

알아야 대비할 수 있으니까.

“어른이 된 시동은 최후에 용사를 배신하고 마왕의 힘을 빼앗아 새로운 마왕이 되었어요. 용사의 측근이었던 신관과 마법사가 그에 동조했죠.”

“신관과 마법사….”

“저는 용사를 지키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저희는 졌고, 그리고….”

에르티나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되었죠.”

나와 유니는 침묵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네, 이대로라면 여러분들도 같은 전철을 밟을 뿐이에요.”

“잠깐만요.”

유니가 무릎에 양손을 얹은 채 아까보다 공손하게 말했다.

“네. 말씀하세요.”

“…분명 전에 세라와 루엘라가 당신을….”

“제가 여러분을 속이고 있을까 걱정하시나요? 걱정 마세요. 그녀들과는 그 이후의 이야기를 나눴을 뿐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고… 마왕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녀는 잠시 가슴 언저리를 만지작거리며 무언가를 찾다가 멈칫했다.

몸짓으로 보아 목걸이를 찾는 것 같았다.

“마왕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하는 점을 용서해주세요. 저는 말할 수가 없거든요.”

무슨 금제 같은 걸까?

과거 얘기가 가능한 걸로 봐서는 그리 강한 종류는 아닌 것 같은데….

“다만 이것만은 알아두세요. 그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마왕이 아니에요. 저희는 생각보다 많은 자유와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르티나는 그렇게 말하며 유니를 바라봤다.

“제가 당신을 도울게요. 당신은 더 강해져서, 용사를 보좌해 단 둘만으로 마왕을 토벌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저희 둘로는….”

“가능해요.”

그녀는 확신을 갖고 유니를 설득했다.

“미안한 얘기지만, 당신의 정령술은 지나치게 단조롭더군요. 정령을 배려하는 그 자세는 올바른 정령사의 것입니다. 좋은 스승에게 배우셨겠죠.”

문득 유니에게 정령술의 기초를 가르쳐준 스승 생각이 났다.

그녀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그렇지만 당신은 정령사이기 이전에 용사의 동료입니다. 더 효율적으로 적을 쓰러뜨리는 방법을 배워야만 해요.”

“읏….”

그 말에 유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유니는 그동안 전투에서도 직접적으로 마물들을 해친 적이 없었다.

그녀의 역할은 보조, 발을 묶거나 우리의 사각을 보완하는 식으로만 주로 활동했지 그녀가 마물에게 직접적인 공격을 가한 사례는 무척 드물었다.

“제가 가르쳐드리겠습니다. 바람의 정령을 날카롭게 벼리는 방법과, 물의 정령을 상대 몸속에 기생시키는 것 같은 기본적인 운용법들을요.”

듣기만 해도 무서운 말이었다.

그렇지만… 확실히 그녀의 가르침은 유니를 강력하게 만들어줄 것이었다.

정령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니까.

그럼 나는?

나도… 사용할 수 있지 않는가?

“저, 저도 그 기술을….”

“당신에게는 불필요한 기술이에요. 당신은 정령사가 아니라 용사입니다. 동료의 기술을 배우기보다 본인만의 기술을 찾는 것이 더 급해요.”

그렇게 말하며 에르티나는 갑자기 내 손목을 잡았다.

“무, 무슨…!”

“문양을 확인하는 것뿐이에요.”

유니가 벌떡 일어나려하자 에르티나는 그녀를 말리고 내 팔을 걷어올렸다.

“…역시 이렇군요. 하나라도 온전하니 다행입니다.”

“읏….”

그녀는 거의 자취를 감춘 작은 장미 둘과 멀쩡하게 남아있는 장미 하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전신에서 신성력을 방출한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그랬던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때 해골 장수를 상대로 그랬던 기억이 났다.

그 뒤로도 원한다면 할 수는 있었지만, 그 때만큼 강력하진 않았다.

역시 세라와 루엘라는 그 일까지 알고 있는 것인가.

“그건 오직 용사만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술이에요. 사천왕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하죠. 당신이 다루어야할 것은 바로 그것이에요.”

그런가.

듣고 보니 그 말 그대로였다.

“당신의 그 힘은 여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힘.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연습하세요.”

“네, 네….”

처음에는 우리를 속이려던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녀의 조언은 정확하고 예리했다.

역시 전문적으로 활동한 용사 파티 출신이라 그런지 무척이나 정교하다.

“이건 미안하지만 도와줄 수가 없군요. 지금 세상에서는 오직 당신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니까요. 하지만 정령사, 당신에게는 제가 정령술을 가르쳐드리겠어요. 단 둘이서 마왕을….”

“자, 잠시만요.”

그녀의 말은 자꾸만 무언가를 가정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더 이상 당신의 파티원이 아니에요.”

“세, 세리아도… 아린도… 아직 제 파티원이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나는 말하기 전에 유니의 눈치를 살폈다.

유니는 화를 낼까? 실망할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유니는 살짝 침울한 얼굴이기는 했지만, 내 말에 동의해주었다.

화를 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외의 반응이라 나도 살짝 놀랐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녀들은 사명 대신 열락을 쫓은 배신자….”

“그래도… 구하러 왔어요.”

그녀들은 나 대신 그 남자를 택했지만,

그래도 에르티나와 맞서는 우리를 구하기 위해 그 위험한 공간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녀들은 아직… 잊지 않았을 거예요.”

우리의 사명을, 그녀들은 아직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알겠어요. 그래도 저는 당신이 저에게 정령술을 배웠으면 좋겠어요.”

다행히 에르티나는 우리의 뜻을 존중했고, 그럼에도 유니에게 정령술을 가르쳐주기로 했다.

“에릭….”

“좋은 기회잖아.”

그녀는 불안하게 나를 쳐다봤다.

항상 내 곁에 있겠다는 그녀의 약속.

그렇지만 에르티나에게 정령술을 배우게 되면 그만큼 나와 함께 있을 시간이 줄어든다.

슬프지만, 이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나는 유니가 정령술을 배웠으면 했다.

“…알겠어. 미안해.”

“미안해하지마. 잘된 일이잖아. 응원할게.”

“응….”

유니는 그녀에게 머리를 숙였다.

평소와는 달리 딱딱하고 엄격한 자세였다.

내가 유니의 이런 인사를 보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

첫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청했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해요.”

그렇게 유니에게는 두 번째 스승이 생겼다.

***

정령술 수업은 다음날부터 시작됐다.

유니가 방을 나가고 나는 혼자서 신성력의 조절을 연습했다.

쉽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아무 것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엇을 연습해야하는지, 어떤 식으로 훈련해야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힘을 쓰면 금방 지쳤다.

그러나 쓰면 쓸수록 점점 사용가능한 시간이 늘어나는 것 같았다.

그래, 우선은 발동시간을 늘리자.

나는 그런 방향으로 계획을 잡았다.

그렇게 유니가 정령술 수업을 들으러 잠시 자리를 비우고 나는 혼자서 신성력을 훈련하던 그날. 내 방에 다른 손님들이 찾아왔다.

“안녕, 에릭.”

“안녕하세요, 에릭 씨.”

나는 문을 연 상태로 굳어버리고 말았는데, 그런 나를 올려다보며 세리아와 아린은 살짝 미소 지었다.

“…안에 들어가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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