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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짐꾼-137화 (137/236)

〈 137화 〉 [짐꾼] 양손의 검은 꽃

에르티나 공주.

그녀는 전대 용사 파티의 정령사였지만 지금은 마왕의 사천왕 중 하나다.

루엘라. 그녀 또한 전대 용사 파티의 마법사였고…

그래, 아무튼 전부 용사 파티의 일원이었다는 말이다.

루엘라, 세라, 에르티나 모두.

그럼 그 해골은?

유일하게 용사 파티가 처리한 해골 사천왕은 대체 누구였지?

“아마 가장 궁금한 부분은 이거겠죠? 왜 저희가 사천왕이 되었는지?”

세라는 우리 앞에서 히죽거리고 있었다.

그래, 그녀 입장에서는 충격 받은 우리들이 재밌게 보이겠지.

그래도 저게 나를 비웃고 있는 미소라 생각하니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당연한 이유에요. 저희의 주인이 새로운 마왕이 되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여기까지 말해놓고 세라는 루엘라에게 제지당해 더 이상의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혹시 둘이 짜고 치는 건가?

일부러 사람 궁금하게 만들고 도망치려고?

세라는 에르티나를 기절시키고 그녀를 업은 채 빠져나갔다.

당연히 용사 일행은 그녀를 막으려고 했지만, 루엘라가 흑마법으로 그들을 협박하는 바람에 꼼짝도 못하고 발이 묶이고 말았다.

그야 루엘라를 공격하면 여기 있는 누군가의 피와 살점으로 상처를 복구할 테니, 섯불리 덤비지 못하는 것도 이해한다.

저번에야 뭐, 나랑 일면식도 없는 귀족 나으리들이 한 가득이었으니 걱정 않고 마구 마법을 쏴재꼈지만, 이번에도 그랬다가는 내 소중한 노예들이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슬슬 됐겠죠. 협조해줘서 고마워요. 저도 여러분들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용사 일행은 루엘라까지 도주하는 걸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무척이나 분한 표정으로 용사가 화를 내고 있었지만, 아마 그가 지금보다 두 세 배 더 강해져도 루엘라에게 덤비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기와 동료들의 목숨이 걸려있는데, 저 녀석이 어떻게 함부로 공격하겠는가?

루엘라를 상대할 일이 있다면 아마 목숨을 걸고 일대일로 싸워야 겨우 물리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완전히 처리하려면 저번에 세리아가 말한 대로 그녀의 본체를 찾아 파괴하는 수밖에 없겠지.

그녀를 어떻게 상대할지는 용사 마음이다.

나는 뒤에서 그 부산물만 챙기면 되고.

이게 짐꾼 아니겠는가?

“…괜찮아요, 에릭 씨. 저희가 더 노력하면 분명….”

아린은 분한 표정으로 손을 부들부들 떠는 용사가 가여웠는지 위로해주려고 다가갔다.

탁!

“손대지 마.”

그러나 그에게 손을 대기도 전에 유니가 아린의 손을 매섭게 치며 냉랭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유, 유니?”

그녀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나뿐만 아니라 용사도 당황했다.

역시, 다 알고 있었나.

저 표정은 누가 봐도 적개심이다.

유니는 우리를 향해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다.

그리고 유니가 굳이 그럴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미안해요.”

아린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런, 아직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비우지 못했는데.

한동안 마음고생 좀 하겠네.

“왜 그래 유니?”

용사는 여전히 사태 파악이 안 됐는지 우리를 돌아보았다.

“왜 다들…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거야?”

싸늘한 분위기.

지금 우리는 누가 봐도 두 편으로 갈라서있었다.

내 노예들은 나를 둘러싸고 혹시나 모를 위협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중이었다.

아린은 다소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둘을 착실하게 감시하고 있다.

“…왜 웃고 있는 거죠?”

용사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런, 웃고 있었나.

지금 상황이 나에게 좋은 상황은 아니다.

유니도 떨어뜨리려고 했던 계획이, 지금 차질을 빚고 있으니까.

그래도 나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야, 웃기지 않는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와서야 일의 전말을 눈치 채는 용사의 아둔함이.

충분히 알 수 있었는데도 진실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모른 체했다는 점이 제일 한심하다.

그렇게 소홀하게 대하니까 여자를 빼앗기는 거지.

나는 그를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닥쳐. 말하지 마.”

…뭐라고?

유니에게서 쏟아진 난폭한 말에 순간 당황했다.

맹세컨대, 그리 길지는 않지만 지금껏 유니에게서 저런 말이 나오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렇게 바라본 그녀의 얼굴은, 여태껏 본 적 없을 정도로 잔뜩 일그러진 채 가장 생생한 분노를 나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문득 그녀들을 손에 넣기 전 일이 생각났다.

세리아는 건방지게 틱틱 거리며 일당을 깎으려고만 하고, 아린은 새벽부터 나를 깨워 자기 머리 손질할 도구를 꺼내달라 요구하고.

나를 그나마 대우해줬던 것은 유니밖에 없었다.

그랬던 유니가, 지금은 그 누구보다 나를 증오하고 미워하고 있었다.

나를 무시하던 세리아는 지금은 내 말 한 마디면 신발 밑창이라도 핥고, 용사에게만 전념하던 아린은 내가 뺨을 때려도 고마워하며 반대쪽 뺨을 내밀 것이다.

그리고 유니도, 이제 나를 예전처럼 대하지 않을 것이다.

“…….”

왠지 모르게 복잡한 기분이 들어 나는 팔짱을 꼈다.

“유, 유니, 대체 왜 그러는….”

“에릭.”

유니는 에릭에게 이 잔혹한 현실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미안해, 에릭.”

그녀의 말에 불안하게 떨리던 에릭의 눈동자가 정지했다.

“왜… 사과하는 거야?”

“나는… 나는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그녀뿐만 아니라, 이 자리의 누구도 바라지 않았을 거다.

나를 제외하고.

“…정령으로 보고 있었구나?”

세리아는 유니가 어떻게 우리를 관찰했는지 눈치 챘다.

그 놈의 정령인가.

어디에나 있다던 정령.

유니는, 정령들의 시야를 통해 우리 관계를 목격했을 것이다.

세리아와 몸을 섞고, 아린과도 몸을 섞는 그 모습을….

“…유니, 저는….”

아린은 이 어색한 분위기를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는지 머뭇거리며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

세리아는 그런 그녀의 태도에 분노했는지 차갑게 말을 꺼냈다.

“아린. 너 누구 편이야?”

“아, 읏….”

그 말에 아린은 자기 주제를 깨달았는지 머뭇거리며 다시 뒤로 물러섰다.

아무래도 이 사태가 끝나고 그녀에게는 추가적인 체벌이 필요할 것 같다.

“…언제부터야?”

용사가 아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세리아에게는 묻지 않았다. 아마 알고 있었겠지.

“오늘부터.”

내가 대신 대답하자 용사가 나를 바라봤다.

답답한 새끼.

가급적 안 끼어들려고 했는데,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너하고 유니가 이년을 배신한 덕분에 완전히 나한테 넘어왔지.”

오늘 아침에 아린을 배신하지만 않았어도 그녀가 벌써 나에게 넘어오지는 않았을 거다.

결국 아린의 등을 떠민 것은 용사와 유니다.

그런데도 아린을 원망하며 그녀에게서 이유를 찾으려고 하는 건가?

너무나도 꼴사납다.

“안 그래?”

나는 그렇게 말하며 용사 앞에서 아린의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햐읏… 흐윽, 여, 여기서 이러시면….”

아린은 당황했지만 손을 빼달라거나 그런 부탁을 하지는 않았다.

“…제렌!”

그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경칭 없이 불렀다.

핏발 선 눈을 보니 한 대 치기라도 하겠군.

그렇지만 내가 쫄 필요는 없다.

내 충실한 암컷방패가 곁에 있으니까.

“…다가오면, 공격할 거야.”

세리아는 한 발짝 앞으로 나와 나를 보호하며 에릭에게 스태프를 겨누었다.

이 순간, 나는 이 순간이 미치도록 짜릿했다.

용사를 사랑하던 마법사는 이제 용사를 향해 스태프를 겨누고 있다.

“나를… 공격한다고?”

“에릭, 나는 너를 나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 너는 여신에게 선택받은 용사고, 마왕을 물리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간이니까.”

충격 받은 에릭에게 세리아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미안해.”

그녀의 이 말은, 에릭에게 내리는 마지막 선고였다.

“주인님은… 나보다 더 소중하신 걸….”

크, 크흐흐.

이 말을 듣고 흥분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나는 넘쳐나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아린의 가슴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유방을 움켜쥐고, 젖꼭지를 꼬집었다.

“흐응, 흣….”

아린은 콧소리를 내며 내 쪽으로 몸을 기댔다.

그 몸짓 하나하나에 용사는 죽을 듯이 부들거리며 간신히 입을 열였다.

“…그 손 놔.”

명령은,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약자였다.

“그 손, 놓으라고!”

나는 아린의 젖꼭지를 꼬집으며 말했다.

“아린. 막아라.”

“흥읏… 아….”

아린은 몽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곧장 손을 들어올렸다.

“미안해요, 에릭 씨….”

그녀가 주먹을 쥐자, 용사가 허공에서 몸이 굳었다.

용사의 육체가, 아린의 손아귀에 쥐어든 것이다.

아린의 능력이 내 등에 깃든 이후, 나는 그녀의 축복을 더 자세하게 이해할 수가 있었다.

몸을 활성화시키는 그녀의 축복은, 반대로 몸을 비활성화시키는 것 또한 가능했다.

“호오, 그런 식인가. 나도 쓸 수 있겠군.”

“…하, 한 번 더 보여드릴까요?”

내가 흥미를 보이자 아린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내 관심을 끌기 바쁘다니….

이미 그녀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와버렸다는 증거였다.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아린은 유니에게 손을 뻗었다.

한 때 친구였던 그녀에게도, 아린은 가차 없었다.

오직 내 칭찬을, 내 손길을 받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친한 친구에게 저주를 걸었다.

축복이라는 저주를.

촤악!

“…어?”

아린의 당황한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팔에서 피가 튀었다.

손끝부터 어깨까지 날카로운 붉은 선이 몇 가닥이나 그어졌다.

…무엇으로?

“꺄악…!”

“풀어.”

유니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차가운 눈으로 아린을 바라봤다.

한 때 길들이기 전의 세리아가 나에게 보여줬던 것보다도 훨씬 차가운 눈이었다.

설마 정령인가.

바람의 정령?

이렇게까지 공격적으로 쓸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애초에 이건 그녀가 쓰던 방식이 아니다.

유니는 지금껏 정령을 공격하는데 쓴 적이 거의 없었다.

…에르티나!

이건 분명 에르티나의 정령술이다.

대치하던 그 짧은 시간 안에 습득한 건가?

아린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자기 상처를 부여잡은 채 아무 행동도 않자 유니는 다시 정령을 불렀다.

이대로라면 치명적인 상처가 남을 것 같아 나는 그녀에게 명령했다.

“…풀어줘.”

아린은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용사에게 건 축복을 풀어주었다.

“읏… 크읏….”

분노와 치욕에 몸을 떨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용사를 유니가 안았다.

“괜찮아, 에릭. 나는… 나는 여기 있으니까.”

“응. 나는 도망 안 가.”

용사의 귓가에 유니가 속삭이자 그가 그녀를 더욱 세게 안는다.

“나는… 에릭의 유일한 아군이니까.”

그렇게 에릭을 달래는 유니의 얼굴에 띤 미소를 보고서야 나는, 아니 우리는 확신했다.

유니는, 이 상황을 의도한 것이다.

***

그녀는 에릭을 데리고 먼저 밖으로 떠났다.

남겨진 우리 셋은 새벽인데도 쓸데없이 밝은 이 기묘한 공간 속에 남겨져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있기만 했다.

“…어, 어쩌죠.”

가장 먼저 아린이 입을 열었다.

에릭에 대한 감정을 마저 다 버리지 못한 탓에 가장 감정 기복이 심했던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린.”

“네, 네?”

“이리와.”

그런 그녀를 나 대신 세리아가 불렀다.

살금살금 세리아에게 다가간 아린이 그녀에게 말을 걸기도 전에,

짜악!

“꺄악…!”

짝!

“세, 세리….”

짝!

“흐읏….”

세리아는 분노 때문에 새빨갛게 익어버린 얼굴로 아린의 뺨을 세 번 쳤다.

“아린,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흣, 흐윽… 세, 세리아….”

“네가 누군지 아직도 몰라?”

“…으읏….”

아린은 자기 뺨을 문지르며 눈물을 글썽였다.

“빨리 사죄드려.”

그녀의 말에 아린이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지?”

그녀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울먹이며 말했다.

“…주, 주인님의 노예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앞으로는 기대해도 되겠지?”

“네, 네…!”

나는 씩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신발로 짓밟으며 말했다.

“그럼 돌아가자마자 용사에게 보여줘. 네 보지가 누구 것이 되었는지, 그 창녀 같은 옷을 흔들며 보여주라고.”

“…….”

나는 발을 치우고 세리아에게 눈짓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린의 고개를 들게 했다.

“세, 세리….”

짜악!

“왜 대답을 안 해?”

“흐읏… 죄송해요…!”

“나 말고 주인님께 해야지.”

짜악!

“죄, 죄송합니다! 할게요! 가자마자 바로 할게요!”

아린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팔짱을 꼈다.

세리아는 내 눈치를 보면서 슬쩍 아린의 위에 앉았다.

“크힉…!”

“움직이지 마.”

세리아가 톡톡 치자 아린은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꼼짝달싹 못했다.

“주인님 이제 어쩌실 건가요?”

“흠….”

유니는 포기해야하나.

저렇게까지 적의를 내비치는데 방법이 있을까?

사실 그녀 둘로도 이미 충분한 소득이지 않는가.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저는, 주인님의 생각이 변치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유니를 함락시키라고?”

“네.”

무언가 생각이 있는 건가?

“유니의 시야가 정령 때문에 무척 넓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하루 종일 깨어있을 수는 없어요.”

“그렇지.”

유니도 잠은 자야한다.

정령과 하루 종일 시야를 공유하는 건 상상 이상으로 피로한 일일 것이다.

“이제 주인님이 유니한테 접근하기는 어렵겠죠. 그러니 저희들이 할게요.”

“어떻게?”

이미 유니 머릿속에서는 그녀들과 내가 한 패거리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만, 아무튼 유니가 세리아와 아린에게 살갑게 굴 것이라는 기대는 들지 않는데.

“저희도 유니에게 바로 접근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

세리아 밑에 깔린 아린이 뭔가 깨달았는지 작은 신음을 냈다.

“그 다음은 우리 아린이 말해주겠네요. 말해봐.”

짝!

세리아가 그녀의 등을 한 대 후려치자 아린이 움찔 떨면서 말했다.

“흐힉! 그… 그게… 제 생각이지만, 유니가 안 된다면… 에릭 씨를 이용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아린의 말이 정답이었는지 세리아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바로 그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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