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 [용사] 하나 남은 붉은 꽃
“그게… 무슨….”
믿기지가 않는다.
아니, 어쩌면 혹시나 한 번쯤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전대 용사 파티가 지금의 사천왕이라고?
아마 한 번 의심했어도 금방 잊어버렸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러니 지금은 그것이 현실이었다.
“마, 마왕을 퇴치했다고….”
“그랬죠. 꽤나 격전이었어요.”
“하아, 설마 목이 날라가도 살아있을 줄은.”
둘은 잠시 그 때를 상상했는지 몸서리를 쳤다.
“죽고 싶다면서 정작 죽는 게 무서워서 별 짓을 다했다니까요, 우습지 않아요?”
잠시 저번 마왕을 비웃던 세라는 다시 이야기를 되돌렸다.
“그래서 아마 가장 궁금한 부분은 이거겠죠? 왜 저희가 사천왕이 되었는지?”
우리 사이로 긴장감이 흘렀다.
대체 무슨 이유로….
“당연한 이유에요. 저희의 주인이 새로운 마왕이 되었기 때문이죠.”
“…주인이 누군데?”
세리아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세라는 히죽 웃으며 말을 하려다가 루엘라에게 저지당했다.
“그만해, 세라. 마왕님에 대해 알려줄 필요는 없잖아?”
“그치만 마왕님도 반대는 안 하실 텐데요?”
“…그래도, 하지 마.”
세라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루엘라를 바라봤지만, 그녀의 뜻은 확고했다.
“우리는 당신들을 죽일 생각이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당신들에게 죽어줄 생각도 없고요.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어주는 게 제일 고맙지만… 그렇게는 안 하겠죠?”
마왕이 이 세상을 전부 지배할 때까지 가만히 있으라는 것인가.
아세일라에서도 그랬듯이, 그녀는 우리가 계획을 방해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이상하게도 세라에게서는 루엘라와 같은 모습이 비치지 않았다.
세라는 이 계획에 찬성하지 않는 걸까?
아니, 그보다도 왜 루엘라는 우리를 죽이지 않지?
계획이 틀어지는 걸 막으려면 우리를 죽이는 것이 제일 좋을 텐데.
“그러니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세요. 당신들이 제 예상보다 강하다면 제가 죽을 테고, 아니라면 여러분들은 목적 달성에 실패하는 거죠.”
“루엘라도 참, 성격 많이 나빠졌어.”
“이게 누구 때문인데요.”
루엘라가 찌릿하고 세라를 노려봤다.
세라는 모르겠다는 듯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하고는 에르티나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죠? 저희끼리 깊은 대화를 나눠보자구요.”
“세… 라….”
몸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도 그녀는 억지로 혀를 움직여 세라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세라의 손이 에르티나의 눈가를 덮자, 그녀는 힘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자, 슬슬 돌아가죠. 저희를 도와준 건 잊지 않을 게요.”
“누, 누구 마음대로…!”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이대로 끝난다면 결국 우리가 사천왕만 한 명 더 깨운 셈이 아닌가.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 상태에서 저희를 이길 수 있겠어요? 그냥 보내주는 게 서로에게 좋을 텐데.”
“그, 그 사람을… 어떻게 할 생각이야?”
잠깐 본 모습으로 추측했을 때, 그녀는 자의로 사천왕이 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어쩌면 그녀는 우리의 아군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들에게 뺏기면 그럴 일도 없겠지.
나는 떨리는 손에 억지로 힘을 주며 그들에게 칼을 겨눴다.
그런 나의 손을, 유니가 잡아주었다.
“에릭, 혼자가 아니니까… 겁먹지 마.”
“유니….”
세라와 루엘라는 서로 눈을 맞추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루엘라가 우리의 앞에 서고 세라는 에르티나를 부축해 이 공간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어딜 가려고…!”
세리아가 황급히 스태프를 세라에게 겨누고 마법을 쓰려 했지만, 루엘라가 그녀를 방해했다.
“미안하지만 저희도 저희의 사정이 있거든요. 해치고 싶지 않으니까… 얌전히 있어줄래요?”
얌전히만 있으면 공격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린다.
제길, 완전히 가지고 놀고 있잖아!
분하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무턱대고 덤벼들 순 없었다.
우리 모두는 그 때 그녀의 마법을 보았다.
살아있는 자의 피와 살을 흡수해 자신의 몸을 수복하던 그녀의 괴물 같은 측면을….
“여러분이 제 목을 베면, 저는 당신들의 피와 살로 복구할 수밖에 없어요. 불필요한 희생을 하지 마세요.”
루엘라의 협박은 정말 단순했지만, 단순한만큼 효과적이었다.
그녀를 공격할수록 우리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그렇지만 루엘라는 우리를 공격하는데 아무런 부담이 없다.
너무나도 불합리한 교환비.
이래서야 싸울래야 싸울 수가 없다.
우리는 그녀의 살벌한 협박 앞에 모두 발목이 묶일 수밖에 없었다.
“너랑 세라… 의견이 꽤나 다르던데 정말 보내줘도 돼?”
세리아는 공격이 막히자 대신 다른 쪽에서 접근을 시도했다.
둘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아세일라에서 둘이 다투었던 점으로 보아, 세라와 루엘라의 생각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다.
어쩌면 둘 사이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접근은 좋네요. 그렇지만 틀렸어요.”
루엘라는 세리아의 시도를 슬쩍 웃으며 넘겼다.
“수단이 다를 뿐, 우린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거든요. 마왕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는, 그런 목표를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우리를 향해 검은 색 스태프를 겨누었다.
우리는 그녀의 공격 위협에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었다.
대체 이런 존재를, 어떻게 이기란 말인가?
이렇게 고민하며 시간을 끄는 것 자체가 루엘라의 계획이겠지만, 우리는 그녀의 속셈을 알면서도 그대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슬슬 됐겠죠. 협조해줘서 고마워요. 저도 여러분들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지만, 그럼에도 그녀에게 달려들지 못한다는 점이 너무나도 분했다.
“후후… 힘의 차이도 모르는 바보보다는, 제 주제를 아는 편이 백 배 나아요. 그럼 이만.”
루엘라는 나에게 그렇게 충고하고는 사라졌다.
고작 루엘라 하나도 못 이기는데, 우리가 마왕을 잡을 수 있을까?
나는… 용사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맞나?
모든 것에 회의감이 들었다.
결국 에르티나를 찾아 나선 것도 마왕을 위한 것이었고, 그녀를 지키기는커녕 적에게 통째로 내어주고 말았다.
멍청한 놈.
왜 이렇게 멍청했지?
생각해보면 적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부탁을 할 리가 없는데.
그걸 알면서도 나는 세라의 말을 듣고 여기까지 와버렸다.
대체 왜 그랬지?
내가 매료 같은 거라도 걸렸던 걸까?
아니라는 건 내가 더 잘 안다.
그래서 더 분했다.
나는 세라를… 믿었던 것이다.
분노로 손이 떨린다.
“…괜찮아요, 에릭 씨. 저희가 더 노력하면 분명….”
“손대지 마.”
아린이 위로해주려고 다가왔지만, 유니가 싸늘한 말투로 그녀를 쳐냈다.
“유, 유니?”
그 싸늘한 어투에 내가 더 놀랐다.
아린은 충격 받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힘없이 물러났다.
“…미안해요.”
“왜, 왜 그래 유니?”
사천왕은 사라졌는데 다시 흐르는 긴장감.
고개를 드니 우리의 위치가 너무나도 명확하게 갈려있었다.
나와 유니. 그리고 반대편에 서있는 제렌 씨와… 그녀들.
“왜 다들…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거야?”
유니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고, 세리아는 태연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굉장히 미안해하는 아린과 웃고 있는 듯한 그.
“…왜 웃고 있는 거죠?”
내가 그의 표정이 마음에 안 들어 한 마디 했다.
그러자 제렌 씨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이런,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닥쳐. 말하지 마.”
유니의 난폭한 발언에 제렌 씨도 당황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가장 그를 잘 대해줬던 사람이 유니였는데….
그래도 아마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내가 제일 당황했으리라.
“유, 유니, 대체 왜 그러는….”
“에릭.”
유니는 아직 화가 가시지 않았는지 차가운 말로 나를 불렀다가, 겨우 표정을 풀고 평소대로의 유니로 돌아와 말했다.
“…미안해, 에릭.”
“왜… 사과하는 거야?”
그녀는 울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나는… 나는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
유니가 얘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건 내가 애써 외면해온 현실이었다.
“…정령으로 보고 있었구나?”
세리아가 던진 말은 내 예상에 확신을 심어주는 말이었다.
정령시야.
나도 몇 번 사용한 적이 있다.
나는 고작 정령 한 체의 시야를 공유하는 것이 전부지만, 저번에 검은 개의 침입을 감시하던 그녀는 여러 체의 정령시야를 동시에 공유하고 있었다.
만약, 만약 그녀가 평소에도 그런 식으로 시야를 공유하고 다녔다면.
그녀는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보았을 것이다.
증거가 없어 애써 무시해 온, 믿고 싶지 않은 진실들을….
“…유니, 저는….”
“아린.”
아린이 창백한 얼굴로 더듬더듬 변명을 시도하자 세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너, 누구 편이야?”
“아, 읏….”
아린은 세리아를 한 번 바라보더니, 제렌 씨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나버렸다.
“…….”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아린은, 우리 편이 아닌 것이다.
“…언제부터야?”
내 질문에 대답한 것은 제렌 씨였다.
“오늘부터.”
“오늘…….”
그는 더 이상의 연기가 필요 없다는 것을 느꼈는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나를 바라봤다.
“너하고 유니가 이년을 배신한 덕분에 완전히 나한테 넘어왔지. 안 그래?”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눈앞에서 아린의 수녀복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햐읏… 흐윽, 여, 여기서 이러시면….”
“…제렌!”
나는 이를 빠득 깨물며 한 걸음 나아갔다.
“…다가오면, 공격할 거야.”
그리고 나는 세리아에게서 듣고 싶지 않은 소리를 들어버렸다.
“나를… 공격한다고?”
세리아가? 나를?
내가 착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세리아는 살짝 미안해하는 얼굴을 보였지만, 곧 그 표정을 지워버렸다.
“에릭, 나는 너를 나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 너는 여신에게 선택받은 용사고, 마왕을 물리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간이니까.”
그녀의 이 말은 나를 위로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전혀 반대였다.
“…그래도 미안해. 주인님은… 나보다 더 소중하신 걸….”
그렇게 말하며 눈웃음을 짓는 그녀의 얼굴은, 사람이 아닌 암컷의 얼굴이었다.
“크흐흐… 대담한 발언이군, 세리아.”
“사실을 말했을 뿐인 걸요.”
“흐응, 흣….”
제렌은 여전히 아린의 가슴을 주무르며 대답했다.
“…그 손 놔.”
나는 최대한의 위협을 담아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제렌은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 손, 놓으라고!”
“아린. 막아라.”
“흥읏… 아….”
아린은 힘없이 손을 들어올렸다.
“미안해요, 에릭 씨….”
꾸욱!
그리고는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옭아매듯, 나는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읏, 크윽….”
이건, 아린이 새로 배운 상대의 신체를 조종하는 축복인가….
이걸 설마 내가 당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호오, 그런 식인가. 나도 쓸 수 있겠군.”
“…하, 한 번 더 보여드릴까요?”
아린은 그렇게 말하며 유니에게 손을 뻗었다.
설마… 유니에게도?
촤악!
그러나 유니가 더 빨랐다.
유니는 아까 에르티나가 사용했던 것과 유사한 방법으로, 아린의 팔을 바람으로 베어버렸다.
“꺄악…!”
“풀어.”
유니의 간결한 한 마디에 아린은 찡그린 표정으로 제렌을 바라봤다.
“…풀어줘.”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아린은 피를 뚝뚝 흘리는 자기 팔을 감싸며 내 몸에 걸린 축복을 풀어주었다.
나는 도무지 눈앞의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세리아도,
미안하다면서 나에게 축복이라는 저주를 거는 아린도,
아무렇지도 않게 동료를 공격하는 유니도.
전부 현실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읏… 크읏….”
몸이 떨린다.
그런 나를 유니가 살포시 안아주었다.
“괜찮아, 에릭. 나는… 나는 여기 있으니까.”
내 손이 자연스레 유니의 허리로 향했다.
“응. 나는 도망 안 가. 나는… 에릭의 유일한 아군이니까.”
“으읏….”
그러면서 유니는 그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우린 갈 테니까… 알아서들 해.”
그렇게 말하며 유니는 나를 데리고 숲 밖으로 빠져나왔다.
어떻게 숙소까지 돌아왔는지는 생각이 나질 않는다.
다만 확실한 건, 돌아오는 내내 유니가 나를 안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