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짐꾼] 에르티나 공주
잠시 뒤 우리 모두는 방 안에 둥글게 모여 앉았다.
얼굴이 새빨개지다 못해 타버릴 듯한 아린을 제외하고는 다들 편하게 앉아있었다.
“마법사, 그 다음에는 신관이라….”
루엘라는 재밌다는 듯 아린을 바라봤다.
아세일라에서 떠날 때는 분위기가 꽤 험악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또 그리 기분 나빠하는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년이군.
“아참, 당신 꽤 손이 맵던데요. 놀랐어요.”
루엘라가 자기 볼을 매만지며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아린은 설마하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설마 그 어린애가….”
“흑마법이란 이런 거죠.”
…아니, 그 소매치기가 루엘라였다고?
“그럼 그 할머니도 가짜야?”
“아뇨, 그 분은 진짜 엘프에요. 루엘라는 그냥 그 분의 손주 흉내만 낸 거죠.”
“대체 왜 그런 짓을 했지?”
그 말에 세라가 슬쩍 미소지었다.
“그야… 여러분들이 자연스럽게 알아채길 바랬으니까요.”
그러니까 저들은 그 늙은 엘프가 잠든 공주 전설을 알고 있다는 사실도 파악하고 있었고, 숲 어딘가에 그녀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에게 찾아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뭐야, 왜 부탁한 거야?
“그래요,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하죠. 그럼 이만 본론으로 넘어갈까요.”
“본론이 있었어?”
세리아가 괜히 삐딱하게 묻자 루엘라가 비웃는 듯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럼 저희가 심심해서 왔겠나요?”
“루엘라, 자꾸 시비 걸지 마시구요. 아무튼 저희가 이렇게 찾아온 건… 저희는 그녀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저희 대신 여러분들이 잠든 공주를 찾아주었죠.”
그 말에 세리아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직 위치도 모르는데?”
“아, 정확히는 당신 파티의 용사와 정령사라고 해야겠죠.”
“…응?”
용사랑 유니가?
그 말을 듣고 우리 모두는 잠시 불안한 상상을 했다.
“잠깐, 둘이서 잠든 공주를 찾았다고? 어떻게?”
“정확히는 거의 다 찾았죠. 자세한 건 모르지만, 아무래도 정령사 쪽은 위치를 아는 모양이더군요. 아마 에르티나가 뭔가 남겼겠죠.”
에르티나가 그 전대 정령사였지.
둘 사이에 무언가 관계가 있던가?
“…목걸이?”
“에르티나가 그걸 남겼나요? 그럼 목걸이에 위치추적이 가능하도록 손을 봤겠군요.”
그러고 보니 유니는 그 시련의 동굴에서 목걸이를 얻었다고 했지.
그게 결국 저번 용사 파티의 정령사가 쓰던 물건이었으니, 곧 에르티나의 목걸이인 셈이다.
우리가 상황을 이해하려고 잠시 머리를 굴리는 동안 세라가 조금 더 자세한 보충설명을 했다.
“저희는 에르티나를 찾고 있는데, 그녀가 모습을 꽁꽁 감춰서 찾을 수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녀는 같은 정령사인 유니에게 자신을 찾을 단서를 남겨둔 거예요. 그래서 지금 둘이서 찾으러 갔죠.”
“…왜 우리랑 같이 안 가고?”
그 말에 루엘라와 세라가 동시에 미소 지었다.
“왜일까요?”
“…….”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아린의 표정이 착잡해졌다. 아직 완전히 용사를 버리지는 못했겠지.
“뭐, 그건 여러분 사정이니 넘어가고… 저희는 이제 바로 정령사를 쫓아갈 건데, 여러분들도 오실 건가요?”
“…왜 우리에게 그런 제안을 하지?”
그 말에는 루엘라가 대신 대답했다.
“여러분도 자격이 있으니까요.”
차분한 표정.
루엘라는 더 이상은 밝히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로 우리를 바라봤다.
“…하나만 물어도 될까요.”
겨우 마음을 다잡은 아린이 그렇게 물었다.
세라는 재밌다는 듯 히죽 웃었지만, 어디 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티나라는 분과 여러분은… 무슨 관계죠?”
“아마… 가면 자연스레 알게 되겠네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세라의 미소는, 불안한 앞날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
결국 우리는 그녀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위험을 감수하는 건 그다지 내 취향이 아니지만, 용사와 유니가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했다.
“그런데 대체 유니를 무슨 수로 쫓아가는 거야?”
이미 보이지도 않는 유니의 방향을 잘만 찾아가는 그녀들에게, 세리아가 숲의 나무를 걷어내며 의아한 듯 물었다.
세라는 괜히 말로 하는 대신 손을 뻗었다.
그러자 다람쥐 한 마리가 쪼르르 달려와 그녀 손 위에 올라탔다.
“…설마 축복으로?”
아린이 놀란 듯 묻자 세라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알려드리지 않았나요? 축복의 본질은 상대의 육체를 조종하는 것이라고. 시야, 청각마저도 조종할 수 있죠.”
“…….”
아린은 할 말을 잃고 벙쪘다.
이제 겨우 상대의 움직임을 멈출 정도로 성장했는데, 아직 그녀의 힘은 세라에게 미치지 못했다.
“한 번 해볼래요? 당신도 충분히 할 수 있을 텐데.”
대체 왜 사천왕이라는 작자가 적에게 이런 걸 가르치고 있는 건지.
황당하기 이를 데 없지만, 아무튼 그녀가 강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겠지.
“후후, 묘한 사제관계네요. 세리아 당신도 흑마법 배워볼래요?”
“미쳤어? 내가 왜 당신들한테….”
세리아는 당황스러워하며 인상을 팍 썼다.
지금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너네 대체 뭐야? 적이야 아군이야?”
나는 결국 짜증스레 그녀들에게 물었다.
전부터 그녀들에게서는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적이고 진심으로 상대하면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 이기지 못할 텐데, 그래서인지 그녀들은 우리를 가지고 놀고만 있었다.
“그 대답도 머지않아 들을 수 있겠네요. 도착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루엘라는 눈앞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뭐, 뭐야….”
숲의 공간이 일그러져있었다.
마치 누가 풍경화에 멋대로 덧칠한 듯 특정 공간만 밝은 색으로 뒤섞여있었다.
“자, 먼저 들어가실래요? 일행은 저 안에 있어요.”
아니, 저 뭔지도 모를 것에 들어가라고?
우리가 선뜻 발을 옮기지 않자 세라가 슬쩍 말을 덧붙였다.
“늦게 가면 용사가 죽을지도 몰라요.”
“뭐해, 아린. 어서 들어가자.”
그 말을 들은 세리아는 고민도 없이 먼저 발을 옮겼다.
“세, 세리아….”
“왜, 둘이 죽게 내버려두게? 잊지 마. 넌 이제 주인님의 노예지만, 동시에 에릭의 파티원이기도 해. 같은 파티원이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알았어요. 들어가죠.”
그 말을 들은 아린도 결의를 굳히고 다가왔다.
“주인님은 여기 계실래요? 위험할지도 몰라요.”
“어머, 보기 좋은 충성심이네.”
“…다시 생각해보니 당신들하고 같이 있는 것보다는 우리가 지켜드리는 편이 낫겠네.”
세리아는 루엘라를 쏘아보고는 나를 지키러 다가왔다.
“걱정 안 해도 돼요. 우리도 들어갈 거니까.”
“얼마만의 재회인지….”
아니, 그럼 나 혼자 여기서 기다리라고?
“…나도 가지.”
“알았어요.”
제길, 갔더니 막 이미 죽어있는 거 아냐?
나는 불안한 상상을 하며 그녀들과 같이 그 이상한 공간에 발을 디뎠다.
화악!
들어서자마자 강력한 바람이 우리를 맞이했다.
어둑하던 숲은 어디가고, 온통 밝은 빛으로 가득한 공간이 나타났다.
숲이라기보다는 초원과도 같은 이 공간에는 이상한 빛무리가 둥둥 떠다녔고, 한 가운데에 금발의 엘프가 서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꼴사납게 바닥을 구르고 일어나 검을 쥐는 용사의 모습이 있었다.
“에릭!”
세리아가 소리치자 용사가 당황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어, 어떻게 여기를…?”
옆에서 유니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그러나 둘의 시선은 곧 우리를 따라 들어온 루엘라와 세라에게 쏟아졌다.
“하아… 어쩐지 못 찾겠다 했더니, 이런 짓을….”
“에르티나 답네요.”
용사의 얼빠진 얼굴이 제법 볼만했다.
“루엘라랑… 세라…?”
그녀들은 멍청한 얼굴을 한 용사와 상황을 따라잡지 못하는 유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 마디씩 던졌다.
“수고했어요, 정령사. 덕분에 그녀를 찾았네요.”
“고마워요 용사님. 정말 제 소원을 들어주셨네요.”
…이거 혹시 우리가 이용당하는 건가?
살짝 맘에 안 들지만, 우리 몰래 이런 중요한 짓을 하려고 했던 용사와 유니도 용서가 안 된다.
“저 여자가 에르티나인가보네.”
금발의 엘프는 우리를 죽일 듯한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
전투를 직감한 세리아는 스태프를 꾹 쥐었다.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용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래, 일단 사정을 듣는 건 나중이고, 더 중요한 건 이 상황을 무사히 넘기는 것이다.
유니는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지만 급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혹시나 싶었지만, 역시….
우리는 다시 합류해 진형을 가다듬었다.
“적은 바람을 다루는 것 같아. 강력한 바람으로 우리를 넘어뜨렸어.”
“유니가 정령으로 맞받아칠 수는 없나요?”
“…나보다 통제력이 강해서 안 먹혀.”
정령사끼리는 그게 중요한 요소인가보다.
유니는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흐… 그읏… 루엘라… 세라… 배신자 년들….”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이, 루엘라와 세라는 에르티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에르티나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그녀들을 노려봤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에요, 에르티나.”
“죄를 따진다면 우리 모두가 똑같은 죄인이지.”
그녀들을 알 수 없는 소리를 번갈아 하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니까… 일단 좀 진정하죠.”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던 그녀의 움직임이 멎었다.
“끄… 으으아악…! 세라… 세라아아…!”
세라가 그녀의 움직임을 봉인하고,
“흐그으으…! 으, 으으….”
루엘라가 알 수 없는 마법으로 그녀의 고양된 감정을 강제로 가라앉혔다.
“…안 싸워도 될 것 같은데요.”
그 모습을 본 아린이 중얼거렸지만 세리아는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잘못하면 저 셋을 한꺼번에 상대할지도 모르는데.”
슬슬 저 셋의 관계가 어렴풋이 짐작이 된다.
에르티나를 얌전하게 만든 루엘라와 세라는 우리 쪽을 돌아봤다.
“이제 슬슬 인사를 드려야할까요? 보다시피 그녀가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라 대신 소개를 드려야할 것 같네요.”
세라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루엘라를 흘끗 바라봤다.
“네가 해.”
“휴우, 그래요 그래.”
둘은 잠시 맥빠지는 대화를 나누고서는 다시 분위기를 잡았다.
“흐흠. 다들 짐작하셨겠지만, 이 여자는 에르티나. 여러분들의 선배 정령사이자… 마왕님의 네 번째 사천왕이죠.”
“…역시 너희는….”
세리아가 이를 악물며 그녀들을 노려봤다.
“슬슬 눈치 챘죠? 저는 세라, 모든 음마들을 통솔하는 사천왕이자… 400년 전 용사 파티의 신관이었던 인간이에요.”
“물론 저도… 400년 전에는 인간이었죠. 용사와 같이 저번 대 마왕을 토벌했던 루드니엘의 초대 마탑주, 루드니엘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역시 그녀들은, 모두가 저번 용사 파티의 멤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