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 [용사] 잠든 공주
아린에게 말을 못 하고 온 점이 걸리기는 하지만, 유니가 대신 말을 해뒀다니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자꾸 나는 아린이 신경 쓰였다.
“어서 가자, 에릭.”
“아, 응….”
일단은 내 앞에는 유니가 있다. 그러니 유니에게 집중하자.
나는 자꾸만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안한 감각을 애써 무시했다.
우리는 상인이나 뭔가 알고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을 위주로 묻고 돌아다녔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어차피 요즘 이런 걸로 성공한 적도 없어 그다지 기대도 안 했지만.
그래서 그런지 처음에는 열의를 다하며 조사하던 우리도 오후가 되자 슬슬 분위기가 풀어져, 약간 놀러 나온 것처럼 되고 말았다.
“와, 이거 봐 에릭! 세계수의 나뭇잎이래!”
“그, 그런 게 있어?”
그냥 나뭇잎처럼 생겼는데….
“호호홋, 그럼요. 이게 그 귀하다는 세계수의 나뭇잎이랍니다. 끓여먹어도 좋고 생으로 씹어 드셔도 좋고! 먹으면 잔병치레 걱정 끝! 저희끼리는 만병통치약이라고 부릅니다.”
말에서 약간 사기꾼 냄새가 나는데… 정말일까?
“와아, 정말 무슨 병이든 다 고쳐요?”
“그럼요, 아가씨! 옛날 그, 뭐냐… 마가자라드! 마가자라드 대왕도 원인 불명의 병에 걸렸을 때 이걸 먹고 병이 싹 나았다는 얘기가 있죠!”
“되게 잘 아시네요! 그런데 혹시 잠든 공주라고 들어보셨나요?”
“어….”
상인은 잠시 그게 뭐지 하는 표정으로 고민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요! 그 분도 이 세계수의 나뭇잎이 있었더라면….”
“아하, 그렇구나… 에릭, 이만 가보자.”
“어? 응….”
사려는 거 아니었어?
아무래도 그냥 정보를 캐내려고 적당히 맞장구 쳐준 것 같다.
“혹시 세라 그 사람이 우리한테 장난친 거 아닐까?”
“…설마.”
왠지 그녀라면 장난을 치고도 남을 것 같은 이미지지만, 설마 그렇게 번거롭게 우리를 속이려들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뭔가 더 있을 테니 우리에게 대신 부탁을 했겠지.
그러고 보니 왜 하필 적인 우리에게 부탁했을까?
본인들이 직접 찾으면 되는 거 아닌가?
“흠….”
어차피 고민한다고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니, 어떻게 생각해?”
나는 내 생각을 간략하게 정리해 유니에게 들려줬다.
그러면서 그녀의 의견을 듣고 싶어 뒤를 돌아봤는데, 유니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유니?”
“응? 아, 그거? 음… 나도 잘 모르겠어.”
그렇기는 하지. 이런 얘기는 세리아나 아린이 잘 알 텐데.
그나저나 유니는 뭘 보고 있었던 거지?
“이제 우리 어딜 가볼… 읏!”
여기서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으니 한 군데 정도 더 들려볼까 싶던 나는 갑자기 왼팔에 통증이 몰려와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마치 팔이 칼에 베인 듯한 느낌.
급하게 옷을 걷어 확인해보려는데, 유니가 화들짝 놀라 내 팔을 붙잡았다.
“에릭! 무슨 일이야?”
“어? 아니, 뭔가 베인 것처럼 아파서….”
“어디 긁혔어?”
“그, 글쎄….”
딱히 그런 적은 없던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일이지?
다시 한 번 팔뚝을 걷고 상처를 확인해보려고 했는데, 유니는 자기가 도와주겠다며 내 팔을 걷고 물의 정령으로 상처부위를 깨끗하게 씻어냈다.
가지고 있던 물통을 다 비운 유니가 내 팔을 보며 갸웃거렸다.
“에릭, 문양이….”
“그래서 다친 곳은 어디였어?”
그 말에 유니는 다시 내 팔을 자세히 살피더니 되물었다.
“다친 곳 없는데?”
“어?”
아니, 그렇지만 방금 피까지 흘렀는데?
나는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지만 정말 상처부위라던가 그런 게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세 송이 꽃만이 내 팔에 자라고 있을 뿐이었다.
작은 두 송이 꽃과… 아직은 큰 한 송이 꽃.
신경 쓰지 말자.
“어? 뭐지?”
“사실 안 다쳤던 거 아냐?”
“아냐, 분명 아프고 피가 났는데… 이상하네.”
어디 베인 게 아니었나?
그렇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베인 흔적은 보이질 않았다.
결국 나는 착각이었던 걸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아프지도 않고, 아무런 흔적도 없으니 누가 봐도 다쳤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분명 아팠는데 이상하네….
뭔지 모를 일을 계속 고민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나는 그쯤에서 생각을 그만두고 유니와 마저 탐문에 나섰다.
그리고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돌아왔다.
“왔구나, 에릭.”
우리가 늦게 온 편이었는지 다들 벌써 돌아와 있었다.
세리아, 유니, 제렌 씨와… 이 꼬마는 누구지?
“에릭. 얘 할머니가 엘프인데 잠든 공주에 대해 알고 있대.”
“뭐? 정말?”
겉보기에는 인간처럼 생겼는데 할머니가 엘프라고?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꼬마가 겁먹은 눈빛으로 그녀들을 바라보다 말했다.
“네, 네… 그게, 사실 저는 쿼터라 별로 티가 안 나요….”
“쿼터?”
그게 뭐지?
“엘프와 인간 사이에서 난 하프 엘프. 그 하프 엘프와 인간이 다시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면 그게 쿼터에요.”
아린이 보충해서 설명했다.
“엘프는 수명이 길죠. 그렇지만 청년기가 지나면 다들 숲으로 돌아가 버려서 우리가 여기서 마추지는 엘프의 대다수는 겉모습과 나이가 비슷한 비교적 어린 엘프들 뿐이에요.”
생각해보니 늙은 엘프와 마주친 적은 없었다.
이상하다는 생각까진 못 해봤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얘 할머니가 희귀한 경우지. 그렇게 늙은 엘프면 보통 이미 숲으로 돌아간 상태거든.”
“하, 할머니는 저 때문에….”
들어보니 꼬마애의 부모가 사고로 죽어 할머니가 숲으로 돌아가지 않고 도시에 남아있다는 듯 했다.
“어떻게 할래? 사실 아직도 믿어도 될지는 좀 의문이지만… 판단에 따를게.”
꼬마의 차림을 보니 그다지 잘 사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 우리를 속일 생각이라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하지만 이유는 몰라도 세리아와 아린에게 겁먹은 것처럼 보이는 이 꼬마를 봤을 때, 설마 그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무심코 유니를 바라봤다.
별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고 세리아와 아린을 바라보니 갑자기 생각났기 때문이다.
“응? 나는 잘 모르겠어. 그치만 뭐라도 더 알아야하는 상황 아니야?”
그녀 말대로다.
“그렇지…. 좋아, 한 번 가보자.”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하자 아린의 눈이 잠시 가늘어졌다.
“역시….”
“응?”
“아녜요. 그럼 바로 출발하죠, 에릭 씨.”
“응. …응?”
낯선 호칭에 내가 눈을 깜빡이자 아린이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이 편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혹시 불편하신가요?”
“어… 아냐! 더 친근감이 느껴지고 좋은 것 같아!”
에릭 씨라니… 처음부터 쭉 용사님이라고만 들은 터라 어색한 호칭이었지만, 그래도 용사라는 내 지위 대신 이름으로 불러준다는 건 좋은 의미겠지?
아린이 나를 더 편하게 대한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씨라고 하니 왠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도 같지만, 그건 아린이 어디까지나 항상 존댓말을 쓰는 예의바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별로 이상할 것은 없다.
“후후… 그럼 어서 가자. 안내해.”
세리아는 그런 우리 둘을 보고 살짝 웃음을 흘리더니 꼬마애를 일으켜세웠다.
“혹시 모르니 조심하도록 하죠. 긴장을 늦추지 마세요.”
“어? 어….”
기껏 도와준다는 애 앞에서 이런 소리를 하면 좀 그렇지 않은가?
안 그래도 겁먹고 위축된 아이였는데, 지금은 더 위축되어보였다.
이런 점을 배려 못 할 아린이 아닌데, 왜 이러는 걸까?
의아했지만, 나름의 목적이 있을 것 같아 가만히 있기로 했다.
혹시 나쁜 마음을 먹고 있다가 겁먹고 포기할지도 모르는 노릇 아닌가.
우리 모두가 찬성하자 아이는 앞장서서 우리를 자기 집으로 안내했다.
가면서 왠지 유니가 조금 지나치게 내 옆에 달라붙었는데, 딱히 세리아나 아린이 그걸 가지고 뭐라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유니와 함께 빈민가 쪽으로 발을 옮겼다.
겉모습에서부터 예측은 했지만, 역시 그의 집은 빈민가의 허름한 천막이었다.
뭐랄까, 우리가 쓰는 천막을 한 십년 더 쓰면 이렇게 될 것 같다.
그렇지만 굳이 내색을 하지 않고 우리는 서로를 돌아봤다.
“다 들어가기는 힘들 것 같고… 어쩌지?”
잠시 세리아가 고민하다 말했다.
“이야기를 들을 거라면 나는 있어야겠지. 나랑 에릭이 들어가자.”
“나는 안 돼?”
유니가 그녀를 보며 물었지만 세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유니를 무시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복잡한 얘기가 나오면 듣고 이해할 사람이 필요해.”
음… 하긴, 똑똑한 사람이 들어야 듣고 바로 이해를 하지 나나 유니가 들으면 이해를 못할지도 몰랐다.
유니는 살짝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도 이해는 했는지 말리지는 않았다.
우리는 슬며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콜록콜록… 누구십니까?”
모포 위에 누워 기침하던 늙은 할머니 한 분이 우리를 보며 물었다.
귀가 길다.
이게 나이든 엘프인가?
“안녕하세요,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갑작스레 실례인 줄은 알지만 저희가 찾고 있는 얘기가 있거든요. 할머님께서 이런 걸 잘 아신다고 들어서….”
세리아는 나름 예의를 갖춰 그녀에게 우리 사정을 살짝 풀어놓았다.
그러면서 그 대가로 약간의 돈과 약초를 쥐어주웠다.
“아이구, 뭐 이런 걸 다… 이 늙은이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 콜록…. 에디가 데려온 손님들이셨구만….”
에디가 아까 그 꼬마 이름인가보다.
할머니는 우리의 방문에 불쾌함을 보이지도 않고 흔쾌히 허락했다.
“그래서… 뭐가 궁금해서 이런 곳까지 찾아오셨나?”
우리는 잠든 공주에 대해 물었다.
사천왕에 대한 얘기를 할 수는 없으니, 덧붙일 설명도 없었다.
“잠든 공주? …에르티나 공주님 말인가?”
“에르티나… 공주?”
처음 듣는 이름이 나왔다.
정말 이야기를 아는 사람인가?
“콜록… 그런 얘기를 왜 굳이 이런 곳까지 와서….”
그녀는 살짝 의아한 듯 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얘기를 하자, 오히려 그녀가 더 놀랐다.
“이 이야기를… 아무도 모른다고…?”
역시 세리아의 말이 맞았던 걸까.
누군가 이 전설… 혹은 이야기를 은폐한 것이다.
“그래서… 자꾸 이 늙은이 보고 숲으로 돌아오라 했던 거구만… 그런 거였구나….”
그녀는 감이 잡히는 부분이 있었는지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안 그랬나 봐요?”
“그랬지…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나이든 엘프들을 모두 숲으로 부르길래…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이런 사정이 있었구만…. 하긴, 그리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
나는 긴장감에 주먹을 말아 쥐며 조심스레 물었다.
“대체… 대체 잠든 공주가 누구인가요? 왜 그런 이름으로 불리죠?”
“에르티나 공주는….”
***
“에릭 씨, 어땠나요?”
“에릭! 뭐래?”
우리가 천막 밖으로 나오자마자 아린과 유니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세리아와 눈을 맞추고는 잠시 말을 고민했다.
“…표정이 안 좋으시네요. 무슨 얘기를 들은 거죠?”
대답은 나 대신 세리아가 했다.
“잠든 공주는… 전대 용사 파티의 정령사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