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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짐꾼-129화 (129/236)

〈 129화 〉 [짐꾼] 완전복종

마침내 용사 일행은 엘프 도시에 도착했다.

문양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자 아린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데, 그래도 며칠이 지나자 제법 멀쩡해진 듯 했다.

물론 어차피 겉만 멀쩡하고, 속은 복잡한 채일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나에게 기울고 있다는 객관적인 증거를 알아버렸다.

아린의 속마음은 지금쯤 초조해졌으리라.

그럼 아린이 취할 행동은 무엇일까?

사실을 인정하고 나에게 다가오지는 않겠지.

대신 그녀는 다시 용사에게 접근하기 시작할 것이다.

자신이 용사를 배신하고 있다는 증거를 애써 잊기 위해.

사실 세리아 때와 같은 방식이다.

결국 용사의 부족함을 이용하는 건데, 용사가 아린의 욕구를 제대로 충족시켜주지 못하면 그녀는 점점 달아오르게 될 것이다.

결국 이를 참지 못하고 나에게 오는 순간, 모든 건 끝난다.

아린의 운명도 사실 정해진 것과 다름없다.

용사의 머리도 슬슬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살짝 걸리지만….

어차피 용사는 저런 이상성욕을 받아줄 수 있는 놈이 아니다.

그러기에는 너무 순수하고 멍청하다.

겉으로는 고귀해도 속으로는 천박하고 비굴하기 짝이 없는 아린에게는, 겉으로만 어울리는 상대가 아니라 나처럼 내면에서 어울려 줄 수 있는 상대를 만나야한다.

이걸 속궁합이라고 부르면 될까?

내가 흐흐 웃자 옆에서 샐쭉해진 세리아가 한 마디 했다.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주인님.”

“왜 불만인가?”

“아니요, 그냥….”

그렇게 말하며 세리아는 아린이 있는 방향을 흘겨봤다.

내가 의도했던 대로 그녀는 아린에게 조금씩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다.

“아린은 슬슬 끝난 것 같은데, 유니는 어쩌실 건가요?”

“흠….”

세리아도 아린 함락이 코앞이라는 것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유니인데.

이쪽은 아직 찾은 게 없단 말이지.

“강제로 하는 건 별로 취향이 아니시죠?”

세리아는 태연하게 그런 소리를 했다.

말만 하면 언제든지 묶어서 바치겠다는 식으로 들린다. 아마 진심이겠지.

“뭐, 시작이 나쁘면 마음을 얻기도 힘드니까. 일단은 좀 지켜보자고.”

“네.”

세리아는 눈웃음을 지으며 은근슬쩍 나를 유혹했다.

다른 이들이 안 볼 때 살짝 치마를 걷어 올리거나, 은근슬쩍 내 다리 사이로 손을 뻗거나.

그래도 남들이 있을 때는 좀 자제했었는데 이러는 걸 보니 확실히 위기의식을 느끼는 모양이다.

“밤에 하자고, 밤에.”

“네에….”

세리아는 살짝 침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엘프도시는 말 그대로 엘프들이 세운 도시다.

그 외의 말은 굳이 필요 없다.

뭐 더 자세한 걸 알아서 어디다 써먹겠는가?

중요한 건 여기서 범죄를 저지르다 걸리면 인간 마을과는 달리 즉결처형당할 수도 있다는 점뿐이다.

“짐부터 풀고 도서관으로 가자.”

용사 일행은 세리아의 말대로 그 잠든 공주라는 것을 찾기 위해 도서관으로 향했다.

경비병한테 물어봤더니 도서관장이라면 알지도 모른다고 소개를 받은 것이다.

뭐, 도서관하고 나는 인연이 없지만 그런 곳을 관리하는 놈이라면 아는 것도 많겠지.

그러나 우리의 모든 기대를 배신하고 도서관장은 아무 것도 몰랐다.

용사는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가 아차 싶었는지 급하게 표정을 관리했다.

“듣기로 무슨 옛 전설처럼 들리는데, 도서관 책 중에 이를 다룬 것들이 많으니 한 번 찾아보게. 어딘가에는 적혀있을지도 모르지.”

도서관장은 용사의 부족한 예의범절을 지적하는 대신, 오히려 그를 도와주었다.

내가 그랬으면 한 소리 들었을 거 같은데, 역시 용사라 넘어가주나?

“그럼 다 같이 나눠서 찾아보자. 에릭, 유니. 글 읽을 수 있지?”

“어? …조, 조금?”

“응!”

용사는 시골 마을 고아라 당연히 글을 잘 읽지 못했다. 그래도 명색이 용사라 그런 건지 아니면 촌장 딸과 아는 사이라 그런지 떠듬떠듬 읽을 수는 있었다.

유니야 뭐 촌장 딸이니까 배운 것 같고.

나는? 당연히 못 읽는다.

적당히 세리아 옆에 붙어있을까도 싶었지만, 용사가 한창 집중적으로 나를 감시하는 중이기도 하고 여기서는 살짝 몸을 사려 먼저 돌아간다고 했다.

세리아는 조금 불만인 듯 했지만, 뭐 나중에 적당히 자지로 달래주면 된다.

돌아가는 길에 문득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니, 골목길 사이로 웬 어린아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낡은 모포를 뒤집어쓴 아이였는데, 꼬라지를 보니 부랑아 같았다.

엘프 도시든 인간 도시든 이건 달라지지 않는구만.

“왜, 볼 일 있냐?”

인상을 팍 쓰고 말을 거니 쪼르르 도망가 버렸다.

이런 애들이 다 그렇지.

털어먹어도 되는 인간인지 아닌지 간을 보는 것이다.

약하게 나갔으면 지갑이라도 털어갔겠지.

나도 어릴 때 많이 해본 짓이라 척보면 안다.

건방진 애새끼를 하나 쫓아내고 나는 숙소로 들어가 한 숨 잤다.

새벽마다 일어나 세리아랑 하느라 잠이 많이 모자랐는데, 이 기회에 좀 보충해야지.

자고 일어나니 용사 일행이 돌아와 있었다.

물어보니 별 수확은 없었다던데, 결국 더 정보를 얻기 위해 그들은 개별행동을 하기로 했다.

따로 행동하겠다는 말은 곧 나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말인데, 괜찮은 건가?

당연히 나는 용사가 적극적으로 반대할 줄 알았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그는 유니의 눈치를 보더니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니가 용사에게 바람을 불어넣은 건가. 데이트 같은 걸로 꼬셨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는 잘 된 일이지만, 왠지 유니가 개입했다는 사실이 조금 찜찜했다.

여전히 유니에게는 알 수 없는 구석이 너무 많다.

“그럼 조사도 겸해서 광장부터 돌아보는 게 어떨까요? 시장에 사람들이 많으니 거기서 물어보는 것도….”

세리아는 마치 데이트를 하는 남녀처럼 흥분한 채 주절주절 떠들었다.

뭐,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이지만 어차피 그녀와 돌아다닐 거라면 이런 곳도 나쁘진 않겠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앗, 용사님….”

얼핏 아린을 보니 그녀는 용사와 같이 다니려는 모양이다.

용사의 밍밍한 태도를 겪어봐야 아쉬움을 느끼고 제 발로 걸어 들어올 테니, 나는 그녀의 행동에 간섭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살짝 더 적극적으로 다가갔으면 한다.

그럴수록 나와 그의 차이가 더 격하게 느껴질 테니.

그래서 우린 그녀를 내버려두고 먼저 광장으로 출발했다.

세 발짝 뒤에서 얌전하게 따라오는 세리아를 보며 나는 도시 곳곳을 구경했다.

엘프 도시라고는 해도 시장은 똑같네.

다른 점이라고는 채소를 더 많이 판다는 것 정도?

“주인님, 저기 보세요.”

갑자기 그녀가 광장 중앙을 가리키며 말하기에 돌아봤더니, 익숙한 여자가 홀로 광장에 서있었다.

“아린이잖아? 왜 혼자 있지?”

“그러게요.”

아린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했는데, 그 상대는 당연히 용사일 것이다.

용사와 같이 가는 게 아니었나? 왜 혼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지?

“가서 말 걸어볼까요?”

“음…. 일단 내버려두자.”

용사가 아린을 먼저 보낸 이유는 이해가 안 가지만, 아무튼 용사가 이쪽으로 오면 큰일이지.

우리는 광장을 빠져나가 다른 곳으로 갈 준비를 했다.

“아직도 안 왔네요.”

빠져나가면서도 계속 그녀가 신경 쓰였는지 세리아는 계속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렇게 늦을 사람은 아닌데.”

세리아의 말대로, 용사는 멍청하긴 해도 이렇게 사람을 기다리게 만들 녀석이 아니다.

지금 이 상황은 무언가 이상했다.

아린도 점점 불안해하는 표정을 보니, 적어도 이 상황이 아린이 예상하던 상황은 아닌 게 분명했다.

“저… 주인님.”

“안 되겠네. 가서 물어봐.”

대체 일이 어디서 틀어진 거지?

용사가 갑자기 흑화라도 하지 않는 한 저럴 리가 없는데.

나는 세리아를 보내 자초지종을 캐오게 했다.

그랬더니 몇 마디 나눈 그녀가 아린을 데리고 오는 게 아닌가.

“주인님, 아린이 속았어요.”

“뭐?”

내가 황당해서 묻자 아린이 약간 눈물을 글썽이며 외쳤다.

“아, 아니에요! 분명, 분명 뭔가 오해가 있었거나…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요…!”

이건 나쁜 남자한테 속은 년들이 주로 하는 대산데.

일단은 그녀를 진정시키고 사정을 들었다.

“유니가 먼저 가있으라고 했다고?”

“네… 용사님이 챙길 게 있는데 좀 오래 걸리는 것 같으니 먼저 가있으라고 해서 그냥….”

그 말을 들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유니한테 속은 거잖아.

세리아를 보니 그녀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녀 역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니가 아린을 속인다고?

그게 정말인가?

아린이 못 믿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특히나 유니와 사이좋게 지내던 아린인 만큼, 그녀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겠지.

당장 우리도 쉽게 못 믿고 있는 판국 아닌가.

그렇지만 이 상황은 누가 봐도 유니가 그녀를 속인 것이 맞다.

“…그, 아린… 아무래도 유니가….”

“유, 유니가 그럴 리가 없어요!”

아린은 주먹을 꾹 쥐고 소리쳤다.

유니를 믿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지금 상황은 누가 봐도 명백했다.

“둘이 뭐 싸우기라도 했냐? 왜 갑자기 유니가 너한테 그런 짓을 하지?”

“싸움이라니 그럴 리가요. 애초에 저와 유니는 어제오늘 아무런… 아….”

그녀는 무언가 생각나는 게 있었는지 표정이 살짝 하얘졌다.

“뭔데?”

“…아, 아무 것도 아녜요.”

누가 봐도 아무 것도 아닌게 아닌데.

나는 살짝 세리아에게 곁눈질했다.

내 신호를 받은 세리아는 아린을 얌전히 달래며 그녀에게서 정보를 캐내기 시작했다.

“혼자서 고민하는 것보다 내가 들어주는 게 더 낫지 않겠어? 둘이 싸운 것도 아니라며,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으, 으으… 마, 말 못 해요!”

아린이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저렇게까지 입을 꾹 다문 걸 보니 아무래도 부끄러운 일 같다.

“용사랑 했냐?”

“흑…!”

아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 에릭이랑 섹스했어?”

“아, 안 했어요!”

놀란 세리아가 묻자 아린은 기겁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섹스 안 했어?

그럼 그 비슷한 걸 했나보네.

“빨아줬냐?”

“…그,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럼?”

“으, 으으….”

아린은 한참을 주저하다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게, 도서관에서… 용사님의 문양을 확인하다가 살짝 흥분해서….”

“그걸 보다가 흥분해? 너도 참 대단하다, 아린.”

“세리아,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네….”

괜히 초를 치려는 세리아를 제압하고 나는 계속 얘길 들었다.

“요, 용사님한테 제 몸을 보여주고… 그게… 그냥 그거만 하려고 했는데….”

조금 더 더듬거렸지만 아무튼 정리하면 이렇다.

아린은 내 말을 부정하고 싶었기에 용사의 문양을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했고, 그 결과 내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양에 변화에 대해 용사도 눈치를 채고는 있는 것 같았지만, 받게 될 정신적 충격이 너무 크기 때문인지 용사는 이를 애써 부정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순간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지만, 흐름을 깰 것 같아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아린은, 왠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에 흥분해 자기 문양도 봐달라는 이유로 옷을 벗고 용사를 유혹했다….

“아린, 너 참….”

“세리아.”

“네….”

세리아가 말을 하다 말았지만, 그 뒷말은 아린도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으, 으으… 저, 저도 안다구요! 제가 이상한 거! 그, 그치만….”

“그래, 그건 됐고. 그래서 그 모습을 유니한테 들킨 거야?”

그녀 말로는 유니가 책장 건너편에서 말을 걸었기에 안 들켰다고 했지만, 내가 어제 얼핏 보기에 책장 사이가 거의 숭숭 비어있었는데? 그걸 못 볼 리가 있나?

“…유니가 보고 못 본 체 한 거 같은데.”

“으읏… 여, 역시 그렇겠죠…?”

아린의 말을 들으니 대충 이해가 된다.

유니는 옷을 벗은 아린과 용사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배신감이나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세리아 말로는 예전에 그녀들끼리 예고 없이 앞지르지 않기로 합의를 봤다고 했는데, 아린의 행동은 유니 입장에서 반칙이었다.

“그래서 그냥 그 복수로 널 버린 거 아냐?”

“그, 그치만 유니가 그런 짓을….”

“했잖아.”

“…….”

유니에게 그런 일면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역시 그녀도 사랑에 눈이 먼 여자 중 하나인 것이다.

예상치도 못한 전개라 당황스러웠지만, 생각해보니 좋은 생각이 났다.

유니가 그녀를 속였다고는 하나 어쨌든 그녀는 용사에게 바람맞은 꼴 아닌가?

여기서 용사와 내 차이를 보여줘서 직접 선택하게 만들어야겠다.

“아마 유니가 맞을 거다.”

“그, 그럴 리는….”

아린은 믿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저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였기에 계속 말했다.

“그리고 용사가 이걸 모른다는 것도 이상하지.”

“네?”

“유니의 말을 듣고 짐 챙기러 올라갔다며. 그것도 이상할 정도로 오랫동안. 그게 그냥 우연으로 보이냐?”

“…….”

아린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는지 아주 잠깐 경악이 스쳐지나갔다.

좋아, 그거면 된다.

“용사는 유니한테 설득당한 거야. 너를 버리자고 말이지.”

“…아, 아니에요. 용사는 그런 사람이….”

“잘 생각해봐. 용사는 그런 놈이야.”

사실이 어떤지는 나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차피 진실을 모르는 건 아린도 똑같은 상황.

그렇다면 나한테 유리하게 상황을 몰아가면 된다.

용사와 내 차이를 더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용사와 나의 차이.

그것은, 얼마나 여자를 지배하고 있는지에서 나오는 차이다.

“용사는 자기 여자도 하나 간수 못하고 그녀에게 질질 끌려 다닌 거야. 그러니 유니의 말에 홀라당 넘어가서 널 버렸지.”

“그, 그럴 리가….”

“나처럼 철저하게 교육시켰으면 이럴 일도 없었어.”

그렇게 말하며 나는 세리아를 끌어안았다.

눈치 좋은 그녀는 나에게 아양을 떨며 안겼다.

그녀의 본질은 마조히스트.

맞는 것을 좋아한다고 꼭 지배당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녀의 얘기는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들, 정확히는 남자들이 자기의 알몸을 바라보면 흥분하는데, 그것은 그 순간 그녀가 남자들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전락하기 때문이었다.

개 연기를 시켰을 때, 아린이 결국 그 제안에 넘어간 것은 그것이 아린을 인간 이하의 비참한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이고.

결국 아린은, 스스로의 존재가치가 깎여나갈수록 흥분하는 변태다.

“용사는 여자를 다룰 줄 모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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