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용사] 유니
그 뒤로도 우리는 조금 더 시간을 들여 도서관을 조사했지만 딱히 밝혀진 것은 없었다.
그나마 얻은 수확이라고는 잠든 공주가 아마도 엘프가 맞을 것이라는 사실 정도였다.
“당연한 소리지만 이 근처에는 옛날부터 엘프 말고 강력한 세력이 없었어. 전설이라 어느 정도 살이 붙는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상대는 제법 지위가 높은 여성이었을 텐데, 이 주변에서 그만한 지위가 있는 쪽은 엘프 왕실밖에 없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데 정말 공주가 맞긴 한 걸까요? 설령 옛날사람이라도 전설로 남을 만한 인물이면 제법 유명할 텐데….”
아린의 지적에 세리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이건 증거가 없어서 그냥 내 추측인데… 어쩌면 일부러 소문이 안 난 걸지도 몰라.”
“일부러?”
유니가 고개를 갸웃했다.
세리아는 그녀의 모습이 살짝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생각해봐, 지금 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우리와 그 세라밖에 없어. 루엘라도 아는 걸로 봐서 사천왕들은 알고 있다고 봐야겠지.”
우리는 세라에게 들어서 알게 되었으니 사실상 사천왕밖에 없다고 생각해도 되리라.
“그리고 전에 아린, 네가 그랬지? 세라가 옛날 예법을 알고 있었다고 말이야.”
“아, 그랬죠. 저도 책으로밖에 본 적 없는 동작이었어요.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있던데, 단순히 책으로만 배워서는 절대 못해요.”
아세일라를 떠나기 전에 세라가 우리에게 보여줬던 마지막 인사.
아린은 그것이 오래된 교회의 예법이라고 알려준 적이 있었다.
“그걸 듣고 나니 생각이 났는데, 루엘라가 전에 왕궁에서 보였던 그 흑마법 있잖아.”
다른 사람의 피와 살을 흡수해서 자기 몸을 수복하던 그 무시무시한 흑마법 말하는 건가?
솔직히 지금도 그 마법을 파훼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애초에 흑마법은 금지된 지 200년이 넘은 계파야. 물론 어딘가에서는 암암리에 전승되고 있을 테고, 루엘라가 그렇게 배웠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어쩌면,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는 게 맞지 않을까?”
단순하게.
세리아는 주변을 둘러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면 사천왕은 옛 사람들일지도 몰라.”
하긴, 사람은 아니니까 수명이 우리보다 길어도 이상하지는 않… 잠깐, 사람?
“사람이라구요?”
아린도 의아한 듯 물었다.
그들은 사람처럼 행동하고, 사람처럼 생기기는 했어도 그 본질은 마족, 아니 마물이다.
어디서 왔는지도 불분명하고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냥 어느 날 마왕이라고 칭하는 존재가 나타나 본적도 없는 마물들이 대륙 전역을 덮쳤을 뿐이다.
사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마치 규칙이라도 있는 듯, 그들은 몇 백 년의 시간을 두고 나타났다가 퇴치되기를 반복했다.
용사가 마왕을 무찌르고 나면, 다시 몇 백 년 뒤 새로운 마왕이 나타난다.
그 부하 격인 마물들의 종류는 매번 다르고, 그들의 행동도 각기 제각각이다.
“마물은 일단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설명이 지배적이잖아? 그러면 그런 옛날 예법이나 인간들의 기술을 알고 있는 게 설명이 안 돼. 뭐가 필요해서 일부러 옛날 예법 같은 걸 배우고 있겠어. 숨어드는 게 목적이라면 굳이 그렇게 눈에 띠게 행동할 필요가 없지.”
그러니까 결국 옛날 사람들이 모종의 이유로 마물이 되었고,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지금의 사천왕이 되었다는 것.
“그럼 그 동안에는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 와서 나타난 거죠?”
“그래서 추측이야. 솔직히 나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어. …어쩌면 마왕이 움직일 수 없었다던가 뭐 그런 거 아닐까.”
완전한 설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충 이해는 갔다.
“저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해요. 결국 세리아는 그들이 옛날 사람이라 그 잠든 공주에 대해 알고 있었고, 지금은 그 기록도 전부 사라져 아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죠?”
“응. 만약 그렇다면 그런 짓이 가능한 사람은 한정적이겠지.”
여기까지 들으니 나도 슬슬 감이 잡혔다.
“엘프 왕실이야.”
그들이 공주를 감춘 것이다.
혹시 몰라 세리아는 다른 의견도 물어봤지만, 그녀보다 더 그럴싸한 대답을 내놓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이것 말고 방법도 없고, 늘 그랬듯 우리는 세리아의 주장에 기반해 행동하기로 했다.
“그래서 우린 뭘 해야 해?”
얘기를 한 번 더 정리하고 나서야 이해한 유니는 고개를 끄덕거리다 말고 우리에게 물었다.
“음….”
사실 가닥을 잡았다고는 해도 딱히 더 나아진 것은 없었다.
그들이 모든 기록을 지웠다면 우리가 어떻게 찾겠는가?
왕실에 찾아가 직접 물어볼까? 아마 곱게 답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엘프들의 숲은 기본적으로 왕실의 소유라더군요.”
혹시 몰라 서로 알게 된 사실을 하나씩 풀다보니 아린이 문득 그런 소리를 했다.
아마 내가 오기 전에 보고 있던 책에서 읽은 모양인데, 아린과 눈이 마주치자 둘 다 부끄러워 고개를 돌렸다.
“엘프들은 원래 숲에 사니까 당연한 거 아냐?”
“그, 그렇죠. 그냥 아까 왕실 얘기를 들으니 갑자기 생각나더라구요.”
유니의 말에 아린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린도 그다지 연기에 능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음… 그럼 막 아무도 모르게 숲속에 숨어있다던가? 어, 근데 옛날 사람이면 어떻게 살아있지?”
“잠들었다는 표현이 그냥 죽음을 나타내는 말일지도 모르지. 아니면 마법으로 죽은 듯 잠들어있는 걸 수도 있고.”
유니는 그냥 해본 말인 것 같았지만 세리아는 제법 주의 깊게 그녀의 말을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사실 이렇게 의자에 앉아서는 딱히 나올 수 있는 결론이 없었다.
“하아, 안 되겠네. 정보가 너무 부족해.”
세리아의 그 말은, 우리가 이 도시에 더 묵어야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
결국 우리는 다음 날 마저 조사를 하기로 하고 방을 잡았다.
나는 제렌 씨와 같은 방을 썼지만, 그는 도시를 좀 둘러본다고 나가버려 덕분에 나는 혼자 방 안에 남아있었다.
사실 그를 몰래 뒤따라가볼까도 생각했지만, 들키지 않고 미행할 자신이 없어 그만뒀다.
…혹시 누가 그와 같이 나가지는 않았을까.
세리아라던가, 어쩌면 아린일지도.
설마 유니는 아니겠지?
불안하다.
여자들 방에 노크라도 해서 물어볼까?
그렇지만 그런 걸 묻기에는 너무 이상해 보이잖아.
결국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불안함에 빠져 가만히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똑똑.
“에릭, 들어갈게.”
유니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덜컥 열었다.
“유, 유니?”
“역시 에릭밖에 없네.”
역시라니?
“아까 제렌 씨가 나가는 소리가 들리길래.”
유니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한 가지를 물어보고 싶어졌다.
“…혹시 그 쪽 방에는 지금 누구 있어?”
“아린이랑 세리아 다 있는데… 역시 그 둘이 더 중요해?”
그녀의 말에 나는 흠칫 놀라 벌떡 일어났다.
“어? 그, 그게 아니라….”
“바보.”
유니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흘겼다.
“에릭은 바보야.”
그러더니 유니는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와 내 허리를 안았다.
“유, 유니?”
“아린도, 세리아도 바보야. 다 바보야.”
갑자기 왜 이러지?
나는 유니의 돌발행동에 당황했다.
“에릭… 도서관에서 아린과 뭐했어?”
아, 역시 본 걸까.
역시…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낙관적이었던 것 같다.
“책 사이로 다 보인단 말이야. 그런데 둘 다 거짓말이나 하고… 못됐어.”
“……미안.”
나는 할 말이 없어 그녀에게 사과했다.
사실 그 때 좀 제정신이 아니긴 했지만 아무튼 일부러 유니 앞에서 없던 척을 했던 건 사실이니까.
“뭐했어?”
“어… 그게….”
아린 어깨 핥고 빨았는데….
그렇지만 이 말은 죽었다 깨어나도 유니 앞에서 할 수 없었다.
“먼저 앞지르지 않기로 약속해놓고선.”
유니가 중얼거렸는데, 나한테 하는 말은 아닌 것 같고 아린에게 하는 말 같았다.
“나한테도 해줘.”
“어? 그게….”
내가 살짝 망설이자 유니는 내 허리를 안은 채로 그대로 날 밀어 침대 위에 쓰러뜨렸다.
“안 하면 내가 마음대로 해도 돼?”
침대 위에 나를 쓰러뜨리고 유니는 그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어, 뭐지, 뭔가 상황이… 이상한데.
유니의 얼굴이 점차 나에게 다가온다.
당황했지만 여기서 고개를 돌려버리거나 하면 진심으로 실망할 것 같아 나는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물론 애초에 피하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다.
“흐읍….”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나에게 입을 맞췄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분위기를 즐기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지만, 그래도 인상적인 그녀와의 첫 키스였다.
어릴 때부터 함께 놀곤 했던 유니.
아무 것도 모르는 애기 때는 같이 촌장님 댁에서 씻기도 하고 그랬다.
슬슬 커가면서 우리 둘 다 부끄러워 그런 짓은 그만뒀지만.
그래도 그녀와 나는 늘 사이가 좋았다.
그렇지만 항상 그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못했고, 우리 둘 모두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렇게 서로 헛돌기만 하다가 마침내, 우리는 그 첫 결실을 맺었다.
“흡… 흐으….”
유니는 물론이고 나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입맞춤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흐으… 해버렸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유니가 고개를 들며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세리아랑은 했어? 아린하고는?”
“어, 그게….”
내가 잠시 망설이자, 그녀는 다시 입을 맞췄다.
“흐읍….”
다시 내 입이 막혀버렸다.
그리고 그녀가 내 입을 풀어줬을 때,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세리아랑 한 건 지워진 거야.”
내가 얼떨떨해져 있는 사이 그녀는 다시 입을 맞췄다.
“아린하고 한 것도 이제 지워졌어.”
“유니, 나는….”
내가 뭐라고 말을 하려하자 그녀가 내 입을 두 손가락으로 꾹 눌러 막았다.
“했든 안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아무튼 이걸로 다 없던 일이야. 알겠지?”
“어, 응….”
갑자기 유니가 왜 이러지?
설마 그녀가 이렇게 공격적으로 먼저 나올 줄은 몰라서 조금 당혹스러웠다.
아린하고 같이 있는 모습이 그렇게 충격적… 이긴 했겠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책 사이로 얼마나 봤을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발가벗은 아린을 안고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있었으니까.
유니 입장에서는 눈이 뒤집힐 만도 할 것 같았다.
반대로… 유니가 옷을 다 벗은 상태에서 제렌과 포옹하고 있었다면?
세상 그 어떤 변명을 들어도 납득할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니 살짝 그녀에게 미안한 기분도 들었다.
“유니, 미아….”
“말하지 마.”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내 고백을 거부했다.
세리아와 아린과 했던 짓에 대해 털어놓고 싶었지만 그녀는 고집스럽게 내 입을 막았다.
“그런 거… 듣고 싶지 않아….”
유니가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자, 참 말로 하기 어려운 죄책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됐어. 아무튼 나 혼자 뒤쳐질 수는 없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기운을 내 나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한 번만 더하자. 조, 조금 센 걸로….”
“센 거….”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의지로 다시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입만이 아니라 혀까지 사용한 본격적인 키스였다.
내 입 안에 닿아있는 그녀의 혀를 느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만큼은, 적어도 유니만큼은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녀가 나의 것이라는 흔적을.
통제하기가 힘든 기묘한 충동이었고, 나는 이에 거스를 수가 없었다.
콰득!
“아얏!”
“아… 미, 미안!”
유니가 비명을 지르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유니는 내 이빨에 씹힌 자기 혀를 죽 내밀며 나를 뚱한 표정으로 노려봤다.
“으으….”
“그, 저, 정말 미안해! 내가 왜 그랬지?”
미쳤나보다. 유니의 혀를 깨물다니!
내가 안절부절 못하자 그 모습이 웃겼는지 유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에릭도 참. 은근히 욕심이 많다니까.”
“윽….”
그녀의 말은 방금 들었던 내 충동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었다.
“후흐… 다른 애 혀는 씹은 적 없지? 그럼 됐어.”
유니는 나한테 혀가 씹혔음에도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오히려 좋아했다.
“아참, 내일 세리아가 개별조사를 제안할 것 같던데… 나랑 같이 가자.”
제렌이 돌아오기 전에 방으로 돌아가려던 유니는 문 앞에서 다음 날 약속을 잡고 돌아갔다.
바람처럼 왔다 사라지는 그녀를 보며 나는 멍하니 손만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유니의 말대로 세리아가 단독조사를 제안했고, 나는 문득 그녀들을 혼자 보내기가 걱정되어 살짝 망설였다.
꾸욱.
그렇지만 유니가 테이블 밑으로 내 소매를 잡아당기길래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앗, 용사님. 어디로 가실 건가요?”
그러자 이번에는 아린이 다가와 그렇게 물었다.
이미 유니와 다니기로 해서 나는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 고민했는데, 유니가 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 괜찮다는 뜻인가?
“과, 광장… 쪽부터 볼 거 같아.”
“그, 그렇군요. 그럼 저도….”
아린이 뒷말을 흐렸지만,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에릭, 그보다 놓고 온 거 있다지 않았어? 빨리 갔다 와.”
“아, 그렇지 참.”
유니의 말대로 아침에 지갑을 갖고 오는 걸 깜빡해 나는 올라가서 지갑을 챙기고 왔다.
지갑이 어딨는지 잘 보이질 않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왜 이런 곳에 있는지는 몰라도 배낭 제일 깊숙한 쪽에서 발견한 지갑을 챙겨 내려오니 이미 아무도 없었다.
벌써 출발했나?
어리둥절한 마음에 숙소 밖으로 나오자 유니가 내 팔을 낚아채듯 안고서는 씩 웃었다.
“가자, 에릭.”
“어? 여기 광장 방향이 아닌 거 같은데….”
“아닌 거 아니까 얼른.”
응?
그녀의 말에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어제 우리 광장으로 간다고….”
“응. 마음이 바뀌었어.”
“아, 아린한테는 말했어?”
그 말에 유니가 나를 슬쩍 바라봤다.
“아까… 아린한테 말했어. 오늘은 내가 에릭과 단 둘이 있고 싶으니 양보해달라고.”
그, 그러면 아린한테 미안하지 않나?
내가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유니는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아린은 먼저 약속을 어기고 앞질러 나갔잖아. 그 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