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 [용사] 붉은 꽃과 검은 꽃의 거리
나는 평소보다 개운한 마음으로 일어났다.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원인 중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아린의 비밀!
여전히 충격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녀가 나에게 비밀을 털어놓은 만큼 우리 둘의 사이는 더 가까워졌으리라.
상쾌한 마음으로 천막 밖으로 나가자 꺼진 불씨를 아린이 나뭇가지로 콕콕 찌르고 있었다.
“아린, 안녕.”
“흣…! 아, 아, 안녕하세요, 용사님….”
아린은 화들짝 놀라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앗, 미안… 놀래켰나?”
“아, 아니에요.”
아린은 그렇게 말하며 불안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다.
뭐지?
“왜 그래?”
“…용사님, 혹시 그… 팔에….”
“팔?”
뭐가 묻었나 싶어 한 번 바라봤지만 옷은 깨끗했다.
“아, 아니에요….”
그녀가 시선을 깔며 시무룩한 표정을 짓기에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린. 이제 아무 것도 숨기지 않기로 했잖아.”
“그, 그렇죠.”
그런데 대체 왜 또 이렇게 뭐를 감추려고 하는 것인가?
안 그래도 최근 불안한 일이 많았는데, 제발 이렇게 좀 사람 불안하게 만들지 않아줬으면 한다.
“말해줘.”
“그….”
“안녕! 앗, 에릭 벌써 일어났네?”
유니가 고개를 불쑥 내밀며 손을 흔들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좀 얼떨떨했지만 원래 유니는 항상 그랬으므로 나도 손을 흔들었다.
“응, 안녕….”
“나,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용사님.”
아린은 분위기가 깨져버려서인지 슬쩍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
이런, 하필이면 타이밍이 이렇게 꼬이다니.
“응? 어디가?”
“머, 머리가 조금 엉망이라… 다듬고 올게요.”
이미 그녀의 머리는 말끔한 상태였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비웠다.
유니도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천막에서 완전히 나와 나에게 다가왔다.
“유니, 세리아는 아직 자고 있어?”
“응. 아주 곤히 잠들었던데. 깨울까?”
“아냐, 아침 준비하고 깨우지 뭐.”
어차피 유니만 있으면 식사 준비는 그렇게 어려울 것 없다.
불? 정령으로 피우면 된다.
물? 정령으로 어디서든 물이 있는 위치를 찾을 수 있다.
언제 어디서든 재료만 있으면 식사가 가능한 만능 직업!
정말 정령사 없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은 여행을 하는지 모르겠네….
우리는 잡담을 하며 아침을 준비했다.
다행이 물은 아직 많이 남아있어 굳이 채울 필요는 없었고, 유니가 재밌는 얘기를 계속 해준 덕분인지 내 불안한 마음도 조금은 가셨다.
아침이 완성될 때 쯤 일어난 그들과 뒤늦게 돌아온 아린 모두 모여 아침을 때우고,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마침내 엘프도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
라덴은 엘프도시라는 별명에 걸맞게 경비병부터가 엘프였다.
듣기로는 숲에만 살던 엘프들이 인간 및 기타 이종족과의 교류를 위해 모이던 장소가 마을이 되고 도시로까지 성장했다고 하던가.
그 독특한 성격 때문에 이 도시에는 영주라는 개념이 없었다.
굳이 따지면 엘프의 수장이 파견한 감독관이 영주 같은 역할을 맡고 있다.
“뭐라고?”
“어… 잠든 공주라는 분을 찾아왔는데요.”
목적을 묻는 우리에게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잠든 공주에 대해 물었다.
혹시라도 엘프라면 무언가 알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게 누구야?”
그러나 경비병들은 이에 대해 알지 못 했다.
대신 그들은 도서관장이라면 이에 대해 알지도 모른다고 귀띰해주었다.
도서관장이라….
도서관이라는 개념은 나에게 좀 낯설지만, 아린과 세리아는 잘 아는 눈치였다.
“그럼 일단 숙소에서 짐부터 풀고 도서관에 가보자.”
나는 세리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린도 혹시 한 마디 하지 않을까 싶어 슬쩍 바라봤지만 조용한 채였다.
“왜 그래?”
“어? 아… 아냐.”
내 시선이 돌아가는 걸 봤는지 세리아가 물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부인하자 세리아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래, 빨리 들어가자. 쉬고 싶으니까.”
왠지 날 놀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녀의 말대로였기에 우리는 일단 숙소부터 잡았다.
엘프 도시라길래 문화가 다를 줄 알았는데, 역시 인간이 많이 살아서 그런지 별반 다를 건 없었다.
“그럼 도서관부터 가볼까?”
세리아의 말에 따라, 우리 모두 짐을 풀고 곧장 도서관으로 이동했다.
도서관에는 학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몇몇 앉아있었는데, 우리처럼 책과 거리가 멀어보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왠지 그 학구적인 분위기에 살짝 위축된다.
도서관장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는데, 다행이 용사라는 사실을 밝히니 금방 만날 수 있었다.
“으음… 잠든 공주라.”
나이 지긋이 먹은 엘프 할아버지는 안경을 바로잡으며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모르겠군.”
역시 이렇게 되는가.
어느 정도 예상을 했기에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그래, 뭐 언제는 일이 잘 풀린 적 있던가?
결국 또 우리가 직접 뛰어서 찾아야겠지.
한숨을 푹 내쉬는 나를 보며 그가 그나마 기쁜 소식을 하나 전해주었다.
“듣기로 무슨 옛 전설처럼 들리는데, 도서관 책 중에 이를 다룬 것들이 많으니 한 번 찾아보게. 어딘가에는 적혀있을지도 모르지.”
기쁜 소식… 이긴 하겠지?
이대로 돌아가는 것도 아쉬우니 우리는 그의 조언대로 잠시 도서관을 탐색해보기로 했다.
[엘프 왕족의 계보]
나는 더듬더듬 제목을 읽어보고 뽑아서 내용을 확인했다.
공주랬으니 어쩌면 왕족일지도 모르지.
[…의 셋째 아들이 …의 둘째 딸과 결혼해…]
잠시 보던 나는 다시 책을 원래 자리에 되돌려놓았다.
안 그래도 아직 글 읽는 게 서툰데, 이런 딱딱한 글은 도무지 읽을 수가 없다.
나는 조금 더 쉬운 책을 찾으러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 용사님….”
“아린.”
바로 뒤쪽에 아린이 있었다.
책장을 마주보고 바로 건너편이었는데도 있는 줄 몰랐네.
그녀는 나를 보더니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침의 일이 생각난 나는 아린의 손을 잡아 도망치지 못하게 한 후 다시 물었다.
“아린, 말해줘. 왜 그렇게 고민하는 거야?”
“요, 용사님… 소, 손이….”
아린은 부끄러워하며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내가 꽉 붙들고 있자 결국 털어놓기 시작했다.
“…용사님. 혹시 팔 좀 보여주실 수 있나요?”
“팔?”
별 생각 없이 아린에게 팔을 내밀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반대쪽이요.”
반대쪽은….
“문양 때문이야?”
“…네.”
내가 잠깐 고민하고 내밀자 아린은 조심스레 내 왼팔을 걷어 올렸다.
큰 꽃, 중간 꽃, 작은 꽃.
아린은 말없이 중간 크기의 꽃을 문질렀다.
“이게… 저군요.”
“어떻게 알았어?”
“그냥 그럴 것 같았어요.”
그렇게 말하는 아린의 얼굴은 슬퍼보였다.
“용사님은 이게 왜 작아졌다고 생각하세요?”
“글쎄….”
확실하게는 알 수 없다.
그러니 의심하는 것 자체를 나는 하지 않았다.
내가 했던 많은 의심들은, 하나같이 근거가 없으니까.
믿을 필요가 없다.
“이게 신경 쓰였던 거야?”
“…….”
아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행동은 결국 동의와 다를 바 없어,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이건… 아직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잖아. 나는 이런 불확실한 걸로 누굴 의심하거나 그러고 싶지는 않아.”
“용사님….”
“그러니까 이건 신경 쓰지 마.”
아린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녀의 대답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다른 책장으로 가보자.
여기는 아린이 찾아볼 테니, 내가 다른 쪽을 찾는 게 분명 더 효율이 좋을 것이다.
“용사님!”
멀어지는 나를 아린이 다시 붙잡았다.
“제, 제 몸도… 봐주시겠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처음에 오해했었다.
아린의 성벽과 관련된 부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마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지만, 조금 더 들어보니 결국 내 착각이었다.
그녀는 자기 몸의 문양을 한 번 봐달라고 했던 것이다.
사르륵, 사륵.
내 뒤로 옷와 옷이 스치는 소리가 계속 들린다.
그렇지만 정말 이거 하나 때문에 옷을 벗을 필요가 있는 것일까.
과거의 신관복이라면 어깨를 들어낼 수가 없으니 이해하지만, 지금 옷은 가슴까지 파여 있어 살짝 옆으로 내리기만 해도 보일 것 같은데.
아린이 이렇게 하겠다고 고집하니 나도 별로 할 말은 없었다.
뭐… 본인 취향과도 관련 있는 부분이겠지.
톡.
무언가가 하나 떨어지고, 잠시 조용해졌다.
“도, 돌아보셔도… 돼요.”
내가 두근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천천히 몸을 돌리자, 어두운 도서관 사이로 새하얀 나신이 드러났다.
남자 앞에 드러난 가슴과 그 밑의 보지는 아무 것에게도 방해받지 않은 채 그 모습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린은 뒷짐을 지고 부끄러운 듯 몸을 살짝 꼬면서 말했다.
“자, 자세히 한 번 보세요….”
“저, 정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나는 슬쩍 주변을 살폈다.
양 옆으로 책장이 우리를 가리고 있다고는 하나, 이곳이 밀폐된 공간인 것은 아니다.
책장 사이에도 틈이 있고, 또 언제든지 사람들이 내 뒤의 통로를 지나다닐 수 있다.
즉 우리를 제외한 다른 누구라도 아린의 모습을 볼 가능성이 생긴다는 말이었다.
“괘, 괜찮아요. 누가와도… 용사님이 지켜주실 테니까요….”
나는 그녀의 가슴에 시선을 못 박힌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가슴이 아니지.
엉뚱한 곳에 시선을 돌리지 말자.
나는 억지로 눈을 떼 시선을 그녀의 어깨로 올렸다.
“더… 가까이 오셔도 돼요.”
나는 그녀에게 두 발짝 다가갔다.
그녀의 어깨에는 붉은 장미가, 여느 때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두 발짝 다가가자 그 장미는 검게 물들었다.
“…색깔이 바뀌었네?”
“네….”
저번에는 강렬한 색상으로 시선을 확 잡아끄는 그런 느낌이었다면, 지금의 장미는 흙탕물이 묻은 것 같은 탁한 느낌이었다.
“언제부터 이랬어?”
“…제, 제가 이런 걸 좋아한다고 깨달은 뒤부터요.”
나는 무심코 손을 올려 그녀의 어깨를 건드렸다.
“흐윽!”
“앗, 미, 미안.”
“괘, 괜찮아요. 더… 만지셔도 돼요.”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머리에 피가 잔뜩 쏠리는 현상을 체감했다.
마, 만져도 된다고….
아니, 그야 당연히 어깨 얘기겠지만.
나는 톡, 하고 그녀의 장미를 건드렸다.
당연히 질감은 일반 피부와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왠지 지금의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것만으로도 나는 발기해버렸다.
“하아, 하아….”
아린이 가파르게 숨을 내쉬며 달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 만지는 것만으로… 되겠어요?”
“그럼…?”
“원하시는 만큼… 조사해보세요.”
아린의 말이 내 무언가를 건든 것 같았다.
나는 그녀와 밀착될 만큼 다가가, 바로 코앞에서 그녀의 문양을 관찰했다.
끝부분이 검게 물든 꽃잎.
더러워져버렸다.
원래는… 그렇게나 깨끗했는데.
“햐악!”
아린이 예상 밖의 감촉에 당황했다.
“요, 용사님?”
나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입을 꽃잎에 맞췄다.
혓바닥으로 살짝 그녀의 꽃잎을 건드리자, 아린이 움찔거렸다.
“이, 이런 걸 부탁한 건 아닌데… 흐읏…!”
그녀의 손이 어쩔 줄 모르고 허공을 배회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힘을 주어 그녀의 어깨를 빨았다.
마치 검게 물든 더러운 것을 빨아내듯이.
“흐윽…! 요, 용사니임….”
아린은 내 예상 밖의 행위에 놀란 것 같았지만, 맞는 것과 보여주는 걸 좋아한다는 그녀답게 금세 몸이 달아올랐는지 내 머리를 살짝 껴안았다.
“하읏… 흐으….”
그녀의 양팔은 내 머리를 감싸고, 나는 그녀의 어깨를 핥고 빨았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흔적을 지우고 싶었다.
더러워진 흔적을.
책장과 책장 사이의 좁은 공간.
그 사이에서 우리는 책과 책 사이의 거리만큼 서로에게 붙어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공간 속에, 갑작스레 다른 무언가가 끼어들었다.
“에릭, 거기 있어?”
“흡…!”
아린이 놀라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책장 바로 건너편에서 유니가 나를 찾고 있었다.
“응? 무슨 소리가 났는데… 에릭이야?”
“요… 용사님…!”
아린이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에릭?”
“요, 용사님!”
그렇지만 나는 입술을 떼지 않았다.
“으읏… 유, 유니! 저에요! 제, 제가 있어요!”
“뭐야, 아린이었어?”
유니는 아쉽다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면서 멀어졌다.
아니, 멀어지는 듯 싶더니 다시 다가왔다.
“혹시 에릭 어디 있는지 알아?”
“아, 그, 그게… 바, 반대쪽에 계시지… 않을까요.”
아린은 안심하다가 화들짝 놀라 말을 더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반대 쪽… 말이지? 알았어. 고마워.”
터벅터벅.
유니의 발걸음이 멀어졌다.
“휴우… 요, 용사님, 이제 그만!”
새빨간 얼굴로 아린이 나를 밀쳐냈다.
그녀는 압력으로 빨개진 자기 쇄골을 문지르며 나를 슬쩍 바라봤다.
“음… 미, 미안.”
나도 그 때 쯤 정신이 돌아와 무척 부끄러워졌다.
내, 내가 뭘 한 거지?
아린의 눈에 살짝 물기가 맺혀있는 것 같다.
역시… 많이 부끄러웠나.
“유, 유니가 볼 뻔 했잖아요…!”
“미, 미안… 잠깐 정신이 나갔나봐.”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잘 몰라 할 말이 없었다.
그냥 마치 홀린 것처럼 그러고 싶었다.
나는 괜히 부끄럽고 머쓱해져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 앞으로는 조심할게. 진짜 미안.”
옷을 주섬주섬 입던 아린은 그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안 그러셔도… 돼요.”
“응?”
아린은 옷을 입으면서 그대로 말했다.
그리고 5분 뒤, 우리는 새빨간 얼굴을 한 채 책장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