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짐꾼] 세 송이 꽃
마을을 떠난 뒤, 아린의 태도는 많이 달라졌다.
“아, 제가 할게요.”
“물이라도 드세요.”
암묵적으로 내가 하던 잡일을 그녀가 도와주거나, 나를 조금 더 챙겨주거나 했다.
물론 이것만으로 그녀의 마음이 나에게 기울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저 이제 와서 그녀가 나와 용사를 비슷한 선상에 놓기 시작한 것이다.
적어도 그녀의 행동에 아직 애정 같은 것은 서려있지 않았다.
아마 그래서 용사도 반응하지 않은 것 같다.
그냥 더 친절해졌을 뿐이니까.
“…내가 이미 물 드렸으니 신경 안 써도 돼.”
“그래요? 알았어요.”
잠시 아린과 세리아의 시선이 맞닿았다.
세리아는 살짝 얼굴을 찡그린 상태였지만, 아린은 대조적으로 덤덤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아린의 눈은 살짝 웃고 있었다.
“아린이 마음에 안 드나보지?”
“…아니요. 그냥, 이제 와서 위선적으로 구는 게 조금….”
그녀가 돌아가고 둘만 남자 나는 세리아에게 아린에 대해 물었다.
세리아의 대답은 상당히 날이 선 상태였다. 그리고 본인은 그 점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세리아도 슬슬 불안해하는군.
아린에게 자기의 자리를 뺏길까봐 초조함을 느끼는 것이다.
당연히 내가 아린에게 관심을 기울이면서 상대적으로 세리아에게 소홀이 대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화를 낼 수 없는 세리아는 대신 아린에게 자기도 모르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둘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이 이어지는 것을 나는 즐겁게 지켜봤고, 그러면서 용사 일행은 착실하게 엘프의 숲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
“앗, 그럼 나도 에릭이랑….”
“용사님, 제가 도와드릴게요. 같이 가시죠.”
불을 붙일 나뭇가지를 주우러 가는 용사한테 유니와 아린이 달라붙었다.
그러나 재수 없게도 유니는 아린에게 말이 묻혔고, 결국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용사는 아린과 함께 나뭇가지를 주우러 떠나버렸다.
멀어지는 둘을 바라보던 유니의 표정은 살짝 아쉬워보였지만, 딱히 질투라던가 그런 어두운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자연스레 그녀의 꿈이 생각났지만, 여전히 감이 잡히는 구석은 없었다.
“아린한테 뺏겨버렸네.”
“응… 어쩔 수 없지.”
세리아가 장난스레 그녀에게 말을 걸자 유니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여전히 그녀의 시선은 둘이 사라진 방향을 향한 채였다.
“저녁 준비나 할까?”
“응, 그러자.”
세리아는 유니와 붙어 조잘조잘 계속 무언가를 얘기했다.
원래 셋이 친한 사이기는 했지만, 요즘 유니는 세리아와 그다지 대화를 하지 않았던 터라 제법 낯설게 보였다.
뭐… 물론 세리아가 나하고만 붙어있어서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유니에 대한 정보도 슬슬 모아야하고, 나도 세 여자들의 사이가 진심으로 틀어지기를 바라지는 않기에 세리아를 유니와 친하게 지내라고 보내줬다.
덕분에 나는 간만에 혼자 뒤로 슬쩍 물러나 둘을 관찰하는 중이었다.
유니가 그릇들을 다시 한 번 물로 씻고 세리아는 재료들을 손질한다.
평소와 같은 풍경이지만 나는 그 둘을 바라보다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점을 발견했다.
회화가 세리아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말을 적극적으로 걸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세리아의 말에 유니는 그저 수동적으로만 대답하는 중이었다.
성의가 없다고 할까, 약간 건성건성인 듯한 대답이었다.
유니 성격상 이러는 일이 보통은 아니라 조금 더 주의 깊게 살펴보자, 그녀의 시선이 자꾸 어디론가 향했다가 돌아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닥인가?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그러고 보니 둘 다 늦네.”
“…응. 원래 오래 걸릴 일이 아닌데.”
그녀들의 대화를 들으니 문득 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하는데 이렇게 늦지?
“식사는 다 됐는데 어쩌지? 기다릴까?”
식사용으로 만든 임시 모닥불에서 스튜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뭐 둘이 늦는다고 해봐야 그렇게 늦지는 않을 테니 잠시만 기다렸다가….
“먼저 먹자.”
“어? 안 기다려도 돼?”
그런데 여기서 유니가 의외의 대답을 했다.
세리아도 놀랐는지 다시 유니를 바라봤는데, 그녀는 평소의 그녀처럼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늦었으니까 벌이야.”
“…후후, 그러네.”
그녀의 웃음에 세리아도 슬쩍 미소를 지었다.
결국 우리는 그들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식사하기로 했다.
용사와 아린이 돌아온 것은 식사를 거의 마칠 때쯤이었는데, 아린의 표정을 본 나는 곧장 둘 사이의 무언가 변화가 있었음을 직감했다.
뭐지 저 표정은.
무언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저 애매한 표정은 뭐지?
굳이 표현하면 기쁨 반 아쉬움 반 정도가 될 것 같다.
세리아를 바라봤지만 그녀도 감이 잡히는 게 없는지 어깨만 으쓱했다.
하지만 일단 둘의 거리가 많이 가깝다.
적어도 좋은 일이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제 와서 둘의 관계가 개선될 일이 있나?
살짝 예감이 안 좋은데, 일단 밤에 두고 봐야겠다.
***
“쮸읍, 츕….”
“용사한테 네 취향을 죄다 밝혔다고?”
“어, 어쩌다보니… 놀라시긴 했지만 전부 이해해 주시더라구요.”
나는 내 자지를 빨고 있는 세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했다.
용사 같이 순진한 애가 그런 취향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정말 전부 받아들인 게 맞을까?
살짝 의심은 가지만 아무튼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꽤나 안 좋은 신호였다.
나를 통해서만 해소하던 노출증과 피학성애의 방향이 이제 용사한테도 향할 수 있다는 얘기 아닌가.
제길, 멍청한 짓만 하더니 이번에는 제법 선택을 잘했네.
너무 방심하긴 했다.
내가 세리아의 엉덩이를 툭툭 치자, 그녀는 입을 떼고 내 위로 기어 올라와 자기 구멍으로 자지를 받아들였다.
평소보다 세리아의 움직임이 더 격렬했다.
“하읏… 하아….”
“너무 태연하게 제 앞에서 즐기시는 거 아닌가요?”
아린은 이제 익숙해졌는지 눈을 가릴 생각도 안 하고 한숨을 쉬며 우리를 향해 말했다.
나를 안으며 허리를 들었다 내리던 세리아는 슬쩍 고개를 돌려 아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부러워? 부탁하면 너도 받아주실지 몰라.”
“…아뇨, 별로.”
아린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저는 당신과 다르게 용사님을 사랑하거든요.”
“…그래?”
명백한 비웃음.
이미 별의별 짓을 다 했으면서 뭘 이제 와서 그러느냐? 하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내 생각하고 똑같네.
“뭐죠, 그 표정은….”
“아니, 좀 뻔뻔하다 싶어서.”
그 말에 아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미 주인님과 즐길 만큼 즐겨놓고 에릭한테 허락을 받았으니 이제 갈아타겠다고? 네가 생각해도 뻔뻔하지 않아? 주인님과 뭐 했는지는 에릭한테 차마 말 못 했지?”
“그, 그냥 그건 어디까지나 훈육을….”
말하는 장본인도 설득력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아린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언젠가 용사님이 받아들이실 수 있을 때가 오면….”
“후후, 그 때가 오면 너무 늦을 거 같은데. 한 번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어. 네 목의 문양이 그 증거지.”
아린은 무심코 자기 목을 가리려다가, 어차피 옷으로 가려져있어 잘 안 보인다는 걸 뒤늦게 기억하고서는 손을 내렸다.
“눈치 못 챈 줄 알았어?”
“…이거에 대해서 알고 계신가요?”
아린은 살짝 불안해하며 물었다.
생각해보니 세리아는 자기 몸의 문신이 새카맣게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았다.
내가 의아해 그녀를 바라보자 세리아는 조용히 속삭였다.
“환각마법으로 가려둬서 그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아린을 바라봤다.
불안한 표정.
그녀도 자기 문신이 점점 까맣게 물들어가는 게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건 알겠지.
“읏차. 그럼 내가 알려주지.”
나는 세리아를 안은 채 그대로 일어섰다.
어우, 생각보다 힘드네 이거.
“햐윽…! 주, 주인니임….”
“가만히 있어. 움직이면 놓친다.”
당황스러운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아린에게 나는 등을 보여주었다.
“세리아. 걷어 올려봐.”
“아, 드디어 보여주나요?”
세리아는 쿡쿡 웃으며 내 가슴에 매달린 채 등 뒤로 옷을 붙잡고 서서히 걷어 올렸다.
“뭐, 뭐죠? 왜 등을 갑자기….”
어리둥절하던 아린의 말이 갑자기 멎었다.
거의 다 벗긴 걸 보니 봤겠군.
“…어? …이게 왜….”
경악에 찬 아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표정은 볼 수 없지만, 아마 상당히 당황했음에 틀림없다.
“아린 네가 주인님에게 마음을 열수록, 주인님 등의 꽃이 개화하는 거야.”
그녀는 이미 수없이 봐서 익숙해진 내 등을 더듬으며 자신의 꽃을 가리켰다.
등이 보이지는 않을텐 데도 그녀는 정확한 위치를 가리켰다.
“이게, 나고.”
그리고는 내 등을 더듬어 조금 밑으로 내려갔다.
“이게 너야.”
세리아보다는 작지만 그 누가 봐도 꽃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크기.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느긋하게 아린의 반응을 기다렸다.
“…아, 아냐… 이건, 이건….”
아린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렸다.
부정하고 싶겠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주인님 등의 꽃이 커지면, 그만큼 에릭의 꽃은 작아져. 네 꽃도 아마 무척이나 작아졌을걸?”
“아…… 아냐, 아니야… 아니야…!”
아린의 마지막 말은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드디어 용사와 맺어질 기회가 생겼는데.
둘 사이에 공유하는 비밀이 생기고, 그로 인해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고, 더 깊은 사이로 나아갈 가능성을 엿봤을 텐데.
우리는 그것을 모조리 박살내버렸다.
“대신 우리의 몸에 새겨진 장미는 점점 까맣게 변하는 거야…. 왜 그런 줄 알아? 주인님의 색이 검정이거든. 에릭은 붉은 색이고… 후후.”
“그, 그럼 이게….”
“네가 그만큼 주인님에게 물들었다는 뜻이지. 잘 됐네, 아린. 그토록 좋아하던 새벽의 색이잖아?”
“히윽….”
세리아는 아린이 안쓰러워질 만큼 그녀를 몰아붙였다.
슬슬 자제하라고 살짝 그녀를 흔들자 그녀의 비방이 곧 신음으로 변했다.
“하응, 읏… 네에, 그만할게요….”
“으, 으으….”
나는 그녀의 다리를 양손으로 지탱하면서 몸을 앞으로 돌렸다.
그제서야 마주본 아린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내가 손을 서서히 내려놓자, 세리아는 땅에 두 다리를 짚고 일어섰다.
자지가 질에서 뽑히자 살짝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녀는 자기 엉덩이를 내 자지에 부비적거리며 허리를 숙여 아린을 내려다보았다.
“잘 해봐, 아린. 이미 늦은 것 같지만.”
우리는 아린을 내버려두고 먼저 자리로 돌아갔다.
혼자 남은 아린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즐거운 상상으로 남겨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