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짐꾼-125화 (125/236)

〈 125화 〉 [용사] 그녀의 비밀

엘프의 숲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가끔 마주치는 사람들 중에 조금씩 엘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와, 엘프다….”

“너무 빤히 쳐다보면 실례야.”

신기한 듯 중얼거리는 유니에게 세리아가 한 마디 했는데, 나도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에 뜨끔했다.

정말 사람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귀가 좀 길고 하나같이 예쁘고 잘생겼다는 점을 빼면 정말 인간과 다를 것 하나 없어 보인다.

“되게 폐쇄적인 종족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자주 보이네요.”

아린이 지나가는 엘프 상인을 바라보며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엘프 상인이라니?

엘프가 상인도 하던가?

시골마을에서 들리는 소문이라 봐야 별 거 없으니 내가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약간의 환상을 가지고 있던 종족한테서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보게 되니 살짝 아쉽기도 하다.

뭐, 그래도 언제까지 어린애로만 남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우리는 엘프들의 숲을 지나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엘프도시, 라덴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에는 도착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은 여기서 쉬자.”

슬슬 날도 저물어가는 듯 하여 우리는 적당한 위치에서 야영을 하기로 했다.

아직 숲은 아니지만 그래도 숲에 가까워지고 있기는 한지, 주변에 나무들이 제법 많이 자라있었다.

일단 불을 지피려면 나뭇가지가 필요하니까, 그녀들에게 식사 준비를 맡기고 나는 나뭇가지를 주으러 갔다.

그가 남아있는 게 불안하지만, 그렇다고 하루 종일 제렌 씨를 감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앗, 그럼 나도 에릭이랑….”

“용사님, 제가 도와드릴게요. 같이 가시죠.”

아린이 간만에 같이 나뭇가지를 모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보통 아린은 이런 잡일보다는 식사준비를 하는 편인데, 의외네.

“유니, 혹시 뭐라고 했었어?”

“아… 아니, 별 거 아냐.”

유니는 살짝 아쉽다는 얼굴을 하고 그렇게 답했다.

무언가 말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운 없게도 아린과 타이밍이 겹치는 바람에 제대로 듣질 못했다.

뭐, 중요한 거였으면 다시 말했을 테니 아마 그리 중요한 얘기는 아니었으리라.

“후후, 그럼 가시죠. 용사님.”

아린은 기분 좋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나뭇가지를 줍는 도중에 몇 번 아린의 모습을 살펴봤는데, 그 때마다 나는 금세 눈을 돌려야만 했다.

분명 그냥 나뭇가지를 줍고만 있을 뿐인데 자꾸 그 모습이 음란하게 보이는 탓이었다.

아마 그녀가 노출이 많은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괜히 나뭇가지를 주우려고 허리를 숙일 때마다 가슴골이 보이고 허벅지 사이가 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신경을 안 쓰려고 하지만…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렇게 내가 한 번 더 무심코 그녀를 바라봤을 때, 아린은 자기가 주운 나뭇가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린?”

“아, 용사님.”

나뭇가지의 결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내가 불안한 목소리로 부르자 생긋 웃으며 돌아봤다.

“그… 왜 그러고 있어?”

나뭇가지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서 뭐랄까, 조금 야릇한 열망 같은 게 느껴지는 것 같다.

“아, 좋은 형태다 싶어서요… 잠시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네요. 죄송해요.”

“좋은… 형태라니?”

왠지 물어보면 후회할 것 같았다.

그러나 묻지 않는다면 더 후회할 것 같아서 물어봤다.

“…….”

그러자 아린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왜… 왜 고민하는 거야? 대체 뭔데?

“미안해요. 역시… 역시 말 못하겠어요.”

아린은 그렇게 말하며 나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다.

“…왜? 나한테는, 말 못할 사정이야…?”

아, 이렇게 말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왠지 울컥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생각 없이 말이 나오고 말았다.

“아… 그게, 저…”

“그 녀석이야?”

“네?”

아린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리고 나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또… 제렌이야…?”

아닐 거라고 믿고 싶은데,

자꾸만 정황이 그를 가리킨다.

주먹을 꽉 움켜쥐면서 나는 도려내듯 한 마디씩 뱉었다.

“그 놈이랑… 더러운 짓을… 읏!”

그러나 말을 끝마칠 수는 없었다.

내 왼쪽 팔에서 살점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밀려들어 나는 도중에 힘을 잃고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용사님!”

쓰러진 나는 내 팔목을 바라보았다.

작은 장미 둘과 커다란 장미 하나.

내 팔을 타고 내려갈수록 장미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세리아는 거의 보이지 않는 수준이고, 아린은 이전과 비교하면 눈에 띄게 작아졌다.

그동안 억지로 눈을 돌려왔던 현실이, 부정할 여지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용사님!”

나를 부축하는 그녀를, 나는 손으로 쳐냈다.

아니, 쳐내려고 했지만 힘이 부족했다.

아린은 내 미약한 저항을 무시하고 나를 안았다.

“…이거… 놔….”

“용사님, 미안해요… 제가 말을 못 한 건, 용사님이 이런 걸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참았던 거였어요….”

나를 안은 채 그녀는 더듬더듬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듣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럼에도 내 마음은 그녀를 믿고 싶다는 쪽으로 기울어 있어 결국 그녀의 얘기를 가만히 듣게 되었다.

아린의 얘기는 좀 많이 충격적이었다.

“…맞는 거랑, 노출을 좋아한다고…?”

“……네.”

어느새 통증도 잠잠해지고 내 감정도 진정이 되었을 무렵, 아린은 나에게 자신이 숨겨왔던 가장 비밀스러운 얘기들을 들려주었다.

“아니, 그게 무슨… 잠깐, 그럼… 설마 아세일라에서….”

“네… 저에요.”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져 나는 바닥에 손을 짚고 넘어지지 않게 용을 써야했다.

“그치만, 어떻게… 아니, 대체 왜….”

“…기, 기분 좋으니까요!”

아린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그녀의 대답에 나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으읏… 저, 저도 고민 많이 했다구요! 그치만, 그치만 그게 기분 좋아서….”

뭔가 하고 싶었던 다른 질문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녀의 충격적인 말 앞에 전부 잊혀져버렸다.

아린에게 그런 취향이 있었다고?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의문이 풀렸다.

어느 날부턴가 속옷을 입지 않더니 급기야 이런 변태 같은 옷까지 입고 있는 이유라던가, 방금 전 나뭇가지를 보고 묘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던 점 같은….

“…시, 실망하셨죠? 분명 그렇겠죠, 용사님은 이런 거 안 좋아한다고….”

“잠깐만, 아린.”

나는 그녀를 우선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아린은 이미 내가 그녀를 경멸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눈을 꾹 감고 부르르 떨고 있었다.

“…괘, 괜찮아요. 제가 이상한 거죠… 용사님이 이상한 게 아니에요.”

“아린! 나, 나는 괜찮아!”

결국 그녀를 정신 차리게 하기 위해 나는 아린의 어깨를 붙들고 소리쳤다.

“…괜, 찮아요?”

“으, 응…! 솔직히, 잘 이해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린을 비웃거나 경멸하지는 않을 거야. 정말이야. 약속할게.”

“용사님….”

아린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아직도 이해는 안 간다.

어떻게 그런 것을 좋아할 수가 있지?

당연히 부끄럽고 아픈 것을 싫어하는 게 정상 아닌가?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었나보다.

그러면… 그러면 최대한 이해해보려고 노력해야겠지.

“나, 나도 최대한 노력해볼게. 나는 이런 걸 잘 모르지만… 그래도 그걸로 아린을 폄하하거나 그러고 싶지는 않아. 진심이야.”

나는 내 진심을 최대한 솔직하게 표현했다.

“고마워요, 용사님. 역시 말하길 잘했네요.”

“응…. 나도 아린이 이런 것 때문에 고민하는 줄은 몰랐어. 앞으로는 숨기지 말고 전부 말해줘.”

“네, 그렇게 할게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아린의 미소는, 옛날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그럼 용사님.”

“응?”

“죄송하지만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훈훈하게 잘 마무리되던 와중, 그녀가 갑작스런 부탁을 했다.

살짝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각오를 하고 대답했다.

“응… 뭔데?”

그러자 아린은 아까 넋을 놓고 바라보던 나뭇가지를 꺼내더니 슬쩍 내 손에 쥐어주었다.

“조, 조금만 때려주세요….”

“아….”

여, 역시….

***

“아… 조, 조금만 더 세게….”

“이, 이렇게?”

나는 어색한 손짓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나뭇가지로 톡 건드렸다.

“용사님, 정말 세게 하셔도 전 괜찮아요.”

“아, 응, 노력하고는 있는데….”

괜찮다고 계속 그녀는 말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그녀를 때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 동료를 때릴 수가 있겠는가!

때문에 나무에 양 팔을 올리고 다리를 걷어 올린 아린은 살짝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자제 안하셔도 괜찮아요.”

“아니, 나도 그러고 싶은데 잘 안 되네….”

잠시 망설이던 나는 눈을 딱 감고 그녀에게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착!

미묘한 수준의 음량이 들렸다.

“으음….”

“여, 역시 별로야?”

하긴 조금 약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이것보다 세면 아플 텐데….

“그, 그냥 다른 거 하죠, 다른 거!”

결국 보다못한 아린이 먼저 포기했다.

나는 부끄러움에 살짝 얼굴이 빨개져서 괜히 헛기침을 했다.

“저… 그럼, 이거 벗고….”

“아, 아참! 아린, 우리 돌아가야 해!”

너무 시간을 오래 끌었다.

이렇게 오래 있으면 다들 오해할 것 아닌가!

아니, 오해는 아니구나.

“네? 아, 아아!”

아린도 잊고 있었는데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리고는 창백해졌다.

우리는 재빨리 나뭇가지를 마저 줍고 모두가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갔다.

“…늦었네.”

뾰로통한 얼굴을 한 유니가 팔짱을 끼고 우리를 바라봤다.

“미, 미안….”

“미안해요 유니….”

그녀는 아린을 잠시 바라보더니 나를 보며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흥. 이미 건더기는 우리가 거의 다 건져먹었거든? 안 돌려줘.”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어색하게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