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짐꾼] 즐거운 꿈나라 여행
아린의 심경에 큰 변화가 있던 그 날 이후, 아린의 모습은 바뀌었다.
그녀는 더 노출도가 높은 신관복을 입게 되었다.
처음 보는 옷이었는데 세리아가 말하길 시련의 동굴에서 얻은 신관복이라고 했다.
옛날 신관들은 다 창녀였나?
솔직히 옆이 트여있고 가슴골도 패여 있는 걸 보면 그렇게밖에 안 보인다.
왠지 모르게 야한 신관복을 보니 세라가 생각나기도 했다.
대체 그년은 목적이 뭘까.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제가 제일 좋은 여관으로 안내해드리죠!”
세리아에게 질투하는 아린을 적당히 상대해주며 도착한 다음마을.
왠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나만 그런 인상을 받은 게 아니었는지 다들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아이씨, 그나저나 왜 다들 이렇게 싱글벙글해? 비웃는 거 같아서 기분 나쁘네.
어째 하나같이 입가에 미소가 가득하다.
심지어 부랑아들도.
아니, 잠깐. 왜 다들 웃고 있지?
혹시나 싶어 주변을 둘러봤는데 다들 하나같이 웃고만 있다.
최면? 정신조작?
그런 것치고는 사람들에게서 활기가 넘친다.
뭔가 굉장히 찝찝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도 딱히 없었다.
용사는 이거 알아챘으려나?
“방 두 개 말이죠. 알겠습니다!”
심지어 여관주인도 싱글벙글했다.
아, 원래 장사꾼들은 돈 받으면 좋아하니 이건 그대론가?
방은 딱히 특별하지 않았지만, 대신 놀라울 정도로 침대가 고급품이었다.
“잠 못 잘 걱정은 없겠군요.”
“그러네요.”
나는 용사와 실없는 농담을 조금 나누고는 일찍 잠들었다.
아니, 일찍 자려고 했다.
***
“어으, 씨….”
자다 깼다.
무언가 이상한 꿈을 꾼 거 같기도 한데 일어나니 생각이 안 나네.
흘끔 옆을 보니 용사가 기분 좋게 입을 헤 벌리고 자고 있었다.
대체 뭔 꿈을 꾸는데 저리 기분 좋게 자는지.
남정네 자는 꼴 봐서 좋을 거 하나 없으므로 곧장 고개를 돌리고 방 밖으로 나왔다.
1층에 물이 있던가.
그거나 마시고 자야지.
“엇.”
“응?”
복도에 이상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 있을 수 없는 상황에 마주한 것처럼 화들짝 놀랐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사람에게는 없는 꼬리가 달려있었다.
“히약! 자, 잡지마요!”
“너 마물이지.”
나는 본능적으로 꼬리부터 잡아챘다.
꽤 민감한 부위였는지 그녀는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는데, 제법 큰 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근데 왜 마물이 이런 곳에 있지?
“너 뭐냐?”
“제, 제가 하고 싶은 말인데요… 왜, 왜 깨어났지….”
그녀는 갸웃거리며 도리어 나를 이상한 놈 보듯 쳐다봤다.
꼬리에 왜 깨어났냐는 질문. 그리고 어딘가 익숙한 생김새.
나는 그녀의 정체를 서서히 알 것 같았다.
“시발 너 음마지.”
“히엑…! 어, 어떻게!”
그녀는 자기 입으로 거의 술술 털어놓은 주제에 바들바들 떨면서 자기 입을 가렸다.
늦었어, 이년아.
“일단 죽여 놓고 보면 왜 여기 왔는지 알겠지.”
아쉽게도 스태프를 두고 왔기에 나는 주먹을 꾹 쥐면서 그녀 앞에서 위협적으로 흔들었다.
“주, 죽으면 아무 말도 못하는데요…! 살려주세요!”
생각보다 겁이 많은 개체인지 그녀는 보는 내가 불쌍해질 정도로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껏 만난 마물은 인간 같지도 않은 덜떨어진 근육몬스터 혹은 사천왕 같은 강력한 년, 이 둘 중 하나였는데 이런 마물은 또 처음이었다.
사람처럼 말하고, 사람처럼 행동하는데 정작 나보다 약하다.
뭐야, 이런 것도 마물인가?
“그럼 아는 거 전부 말할 거야?”
“네, 네에! 전부! 전부 말할게요!”
그렇게 심야의 심문이 시작되었다.
뭐, 거칠게 협박하고 고문할 것도 없었다.
대체 이런 겁도 많은 년이 왜 인간마을에 기어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내가 자길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지 자기가 아는 걸 술술 불었다.
“음, 그러니까 너희가 여기 있는 인간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고 있었다는 거지?.”
“그… 렇죠? 저기, 근데 실험이라고 하니 꼭 나쁜 짓 하는 거 같은데….”
“맞잖아.”
“으읏… 아닌데에….”
내가 그녀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자 그녀가 무릎 꿇은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이름은 별로 안 중요하니 안 들었지만, 아무튼 그녀의 말에 따르면 여기는 일종의 실험소였다.
그녀 말로는 뭐 인간과 마족의 공존가능성을 모색하는 어쩌구 그랬는데, 그게 무슨 말이나 되는 소린가?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
“그리고 그 실험이라는 건 인간들이 원하는 꿈을 꾸게 해주는 거고.”
“네에… 인간들은 좋은 꿈을 꿔서 좋고, 저희는 연구 데이터를 얻음과 동시에 인간 사회에 융합될 가능성을 탐구하는 거죠!”
“흥분하지 마.”
나는 열의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치는 그녀를 제압시키고 잠시 생각해봤다.
그러니까, 그녀 말대로라면 음마들은 원하는 꿈을 꾸게 만들 수 있다는 거 아닌가?
뭔가 무척 좋아 보이면서도 쓸데없는 능력이다.
“저… 제가 아는 건 이게 전분데 이제 가도 될까요?”
“아니.”
“히잉… 늦으면 혼나는데….”
“혼나? 상급자도 여기 있나?”
“앗.”
그녀는 다시 자기 입을 막았지만,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다고 나온 말이 사라지냐?
“상급자는 뭐하는 년이야.”
“그… 저희랑 같은 음마인데… 훠, 훨씬 세요! 아마 못 이기실 걸요! 지금이라면 못 본 체 해드리죠!”
그다지 신뢰 가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녀 말대로라면 제법 체계적으로 굴러가는 것 같으니 나 혼자 이를 더 파고드는 건 그리 현명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이건 용사가 알아서 하겠지.
적어도 내가 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너희는 어떻게 우리가 원하는 꿈을 꾸게 해준다는 거지?”
“어… 저희는 인간의 욕망을 볼 수 있거든요.”
이런 시발.
존나 무서운 능력이었네.
“그럼 나도 보이냐?”
“아… 뇨? 왜 안 보이지?”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개싸구려 능력이네.”
“아, 아니거든요! 당신 빼면 다 되거든요!”
내 말이 그녀의 자존심을 찔렀는지 그녀가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증거 보여줘.”
“저 인간! 저 인간은 막 자기 주변 여자들이랑 전부 결혼하려는 음습한 욕망이 있구요, 저 방에는 막 건물이 타는 걸 보고 좋아하는 변태녀도 있어요! 하여간 인간들은, 왜 이렇게 이상한 취향들을 가지고 있는지….”
그녀가 가리킨 건 순서대로 에릭과 여자 파티원들 방이었다.
음습한 욕망… 좀 많이 찔린다.
그보다 후자는 대체 누구야?
그녀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아무튼 많이 당황스러운 일이다.
이걸 어쩌지. 용사한테 전부 얘기해야하나?
“모, 못 믿나요? 으으, 그럼 이거밖에 없는데… 그치만 이건….”
또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대체 이렇게 허술한 년을 왜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다행인 일이다.
“결국 그 말이 진짜라는 증거는 없네?”
사실 증거 안 보여줘도 되는데.
멍청한 년.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자꾸 놀리고 싶어진다.
“으, 으으… 좋아요! 따라와요! 제가 직접 보여드리죠!”
“엉?”
그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당당하게 나한테 손가락질했다.
“직접 보면 믿을 수밖에 없겠죠? 저에게 감사하세요! 원래라면 인간이 남의 꿈속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어… 꿈속에 들어간다고?”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저희가 누군데요? 몽마, 꿈의 마족이랍니다! 꿈을 자유자재로 조작하는 것은 물론 그 안에도 들어가 볼 수 있죠!”
들을수록 점점 무서워지네.
이런 멍청한 애가 상대라 다행인걸까.
아마 왜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지도 기억하고 있지 못할 그녀는 나에게 원하는 사람의 꿈속에 들여보내주겠다고 했다.
“딱… 딱 한 명이에요! 더 늦으면 진짜 혼나거든요, 으으….”
설마 내가 상대 꿈속을 훔쳐보는 동안 입막음으로 죽여 버린다거나 그런 건 아닐까 걱정도 됐지만, 그녀의 지능으로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흠….”
나는 잠깐의 고민 끝에 아린으로 정했다.
그녀의 마음을 확실하게 내 쪽으로 돌리려면 그녀에 대해 더 알아야겠지.
가만히 있어도 슬슬 굴러들어올 것 같기는 하지만, 시간을 줄일 수 있다면 굳이 안 할 이유도 없다.
“좋아, 보고 인정하세요! 저희 몽마의 위대함을!”
그녀는 방문을 벌컥 열더니 곤히 잠든 셋 사이로 다가갔다.
“이 여자 맞죠?”
확인을 마치고 그녀는 아린과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오래 안 보여줄 거예요. 그냥 구경만 하고 오는 거니까, 알았죠? 괜히 가서 이상한 짓 하면 꿈이 꼬이니까 하지말구요.”
그 말과 함께 내 정신이 흐려졌다.
“이건 되네… 대체 뭐지….”
그녀의 중얼거림이 구름처럼 둥둥 떠다니다 흩어졌다.
***
내가 아린의 꿈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본 것은, 활활 타오르는 교회건물이었다.
“응?”
화르륵.
불길에 휩싸인 교회 앞에 성난 군중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부패교회 청산하라!”
“사기꾼들!”
“여신님을 우롱한 죄! 죽어서 갚아라!”
…아린 꿈 맞지?
아무래도 잘못 온 거 같은데.
잠깐 현실부정도 해봤지만, 내 눈이 잘못되었던 게 아니라면 분명 나는 아린의 꿈에 온 것이 맞다.
아까 했던 말이 얘 꿈이었구나.
이게 그녀가 바라는 꿈이라고? 미친 거 아냐?
“여러분! 도망 못 친 신관을 잡아왔어요!”
“와아아!”
곧 한 여자가 아린을 민중들 앞으로 끌고 왔다.
왜 본인 꿈인데 고통을 받고 있지?
“흐윽… 여러분, 진정하세요….”
“더러운 년! 너도 사기꾼이지!”
군중들은 그녀를 둘러싸고 아린에게 한 마디씩 나쁜 말을 던지고 있었다.
아린의 얼굴색이 점점 붉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황당해졌다.
“너는 신관도 아니야!”
그 중 다른 여자가 그녀의 옷을 마구잡이로 찢어버렸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아린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기뻐서 지르는 비명 같았다.
“흐윽… 보, 보지마요….”
“흐헤헤… 신관이 이렇게 음란해도 되는 거야?”
갑자기 악당들로 돌변한 군중 사이에서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이거 그냥 놔둬도 되는 거 맞아?
“크흐흐….”
“히히….”
남자들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런 시발, 설마 윤간 같은 게 취향이라고는 하지 않겠지?
나는 지금 끼어들어서 저 꼬추 새끼들을 모조리 죽여버려야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잠깐!”
그 때 우렁찬 소리와 함께 용사가 등장했다.
“요, 용사님!”
아린이 감격한 눈으로 용사를 바라봤다.
그는 평소의 멍청하고 호구 같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늠름하게 그들을 검으로 내쫓기 시작했다.
꿈에서도 죽이지는 않네.
이 모습은 용사 같긴 했다.
허공에 칼질 몇 번 하자 도망가는 악당들 모습이 좀 우습긴 했지만.
“아린, 구하러왔어.”
“용사님….”
정신없이 흘러가는 꿈을 보다보니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거 이대로 놔두면 안 될 거 같은데.
딱 봐도 아린 본인이 망상하는 연애소설 같은 분위기 아닌가?
이대로 계속 진행되면 용사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의 결말이 날 것 같아 불편해졌다.
아니지, 아니지.
너의 본질은 이게 아니잖아.
나는 그녀의 꿈에 개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느새 화면이 바뀌고 둘은 경치 좋은 풀밭에 서있었다.
“아름답네요, 용사님.”
“너도 그래.”
애들 장난이나 치며 히히덕거리는 그들에게 다가가자 용사의 얼굴이 굳는다.
“용사님? 왜 그러… 앗.”
아린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아… 안 돼요, 저를 두고 싸우시면… 흐읏!”
나는 또 헛소리를 하려는 아린에게 다가가 그녀의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약속? 어차피 여긴 꿈인데 무슨 소린가.
이건 전부 그녀가 바란 꿈이다.
“제… 제렌! 당장 그 손 놔!”
꿈속의 용사가 호기롭게 소리쳤다.
“하읏… 흐읏… 이, 이러지 마세요….”
“솔직하게 살겠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흣… 그, 그게….”
아린의 눈이 팽글팽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자식! 당장 아린을 놔줘!”
용사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지만, 나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이곳은 그녀의 꿈이니까, 이 말은 곧 적어도 아린은 지금 용사가 나를 방해하길 바라지 않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봐. 뭐를 원하지?”
“흐응… 하악….”
“이 자식! 아린을 놔줘!”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용사를 내버려두고, 나는 다시 물었다.
“뭐를 원하지? 여긴 어차피 꿈. 네가 원하는 모든 걸 다 해줄 수 있어.”
“꿈… 속….”
그녀의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내 쪽으로 넘어지려는 그녀를 나는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던 손으로 붙들었다.
그리고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용사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아린은 물기를 띈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를… 저를 무시하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