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 [짐꾼] 열혈교회소녀
아린은 결국 아무런 옷도 사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급한 볼일이 있는 것처럼, 나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무턱대고 걸었다.
“어디 가는 거야?”
“신경 쓸 것 없… 개, 개인적인 볼일이에요!”
자기도 모르게 계속 세리아처럼 말하던 아린은, 뒤늦게 자기 실수를 눈치 채고 말을 바꿨지만 이미 늦었다.
“그런다고 세리아가 되는 것 같아?”
“…시, 시끄러워요!”
결국 얼굴이 새빨개진 아린이 뒤를 홱 돌며 소리쳤다.
이건 아린의 순수한 본심이다.
“왜 그렇게 세리아를 따라하려고 하지? 그녀의 하위호환이 되는 것보단 아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는 편이 더 좋….”
그 말에 아린은 나를 노려보더니 다시 몸을 돌렸다.
아마 나 때문이겠지만, 차마 그녀 입으로는 인정할 수 없는 모양.
미안하지만 나도 이미 그 정도는 안다.
“…으읏, 자, 자꾸 쫓아오지 마요!”
아린은 그렇게 소리쳤지만 여기서 정말로 돌아가는 건 용사나 할 법한 멍청한 실수다.
나는 그녀 뒤를 쫓아다니며 듣든지 말든지 계속 말했다.
“지금도 나쁘진 않지만 그래도 난 예전의 아린이 더 매력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내 말에 아린의 발길이 순간 멈췄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였다.
“그 약속만 아니었으면 벌써 손대버렸을지도 모르겠어.”
“…약속?”
그녀도 이 말만큼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당연히 손대지 않겠다던 약속을 말하는 거지. 설마 벌써 잊어버렸나?”
“…그럴 리가 없잖아요. 당신 같은 짐승이 그런 걸 지키려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에요.”
아린은 시선을 내게서 피하며 그렇게 말했다.
왠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지만, 아까와는 그 성질이 조금 다르다.
방금 전까지는 자기 추태가 들켜서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자기가 괜한 오해를 한 것이라는 점에서 기인한 부끄러움이다.
그녀에게 매력이 없어서 내가 안 덮친 게 아니라, 아린과 했던 약속을 꾸준히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손을 대지 않은 것.
이건 오히려 내가 아린과의 관계를 중요히 여긴다고도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저, 정말 바보 같네요. 그런 걸 아직까지 지키리라고는 생각도 안 했는데.”
아쉬움.
그녀의 말에서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나는 그녀가 원하는 말을 해주었다.
“약속했으니까.”
계집애들이나 보는 연애소설에나 나올 법한 대사지만, 그것만으로도 아린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녀 또한 계집애였던 시절이 있던 것이다. 어쩌면 아직도 그럴지 모르고.
그렇다면 그녀가 바라는 건 의지할 수 있는 왕자님 같은 남자일까?
그런 연기는 못하는데….
“읏….”
아린은 안절부절 못하며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뒤늦게 이곳이 우리 둘밖에 없는 골목이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던 모양이지?
내가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가자, 그녀가 뒤로 물러섰다.
그래서 나는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린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지만, 당연히 내가 더 보폭이 컸기 때문에 금세 그녀를 따라잡았다.
나는 손을 대지 않고 그녀를 벽 쪽으로 몰았다.
“저, 저기… 그….”
나와 벽을 사이에 두고 아린은 겁먹은 듯 잔뜩 움츠러들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점점 얼굴을 가까이 가져댔다.
마치 입을 맞추려는 것처럼.
아린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내가 더 가까이 다가오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나는 그녀와 입을 맞추지 않은 채 다시 멀어졌다.
“으읏… 으?”
그녀는 두 눈을 꽉 감고 양 손을 모은 채 바들바들 떨다가,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슬그머니 눈을 떴다.
“후우… 미안. 손 안 대기로 했는데.”
“아…? 아, 그, 그렇죠….”
아린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나를 바라봤다.
약간 물기를 띈 눈동자는 지금의 아린이 감정과잉 상태라는 것을 보여줬다.
“하…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뭐지?”
진짜 뭐지?
분위기와 안 맞는 뜬금없는 질문이라 나도 무슨 질문일지 예상할 수 없었다.
“제… 제가 건 저주… 어떻게 푸셨나요…?”
아하, 하긴 궁금하긴 하겠지.
자기는 푼 기억도 없는데 나는 아랑곳 않고 그녀 앞에서 세리아에게 박아댔으니.
전부터 묻고 싶었겠지만 물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흠.”
뭐라고 답하지.
잠깐 고민한 나는 세라가 풀어줬다고 둘러댔다.
조금 더 나에게 의존한 뒤라면 모를까, 지금 문신에 대한 얘기를 했다가는 그녀 머리에 이성이 되돌아올지도 몰랐다.
“세, 세라 씨가… 역시….”
그녀가 생각했던 대답도 이런 것이었는지 아린은 별 의심하는 기색 없이 믿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슬며시 내 눈치를 살피며 한 가지 더 물었다.
“…저는 잘못된 걸까요?”
“질문은 하나라고 하지 않았나?”
내 말에 그녀가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
아린의 기분을 한 번 떨어뜨린 후 나는 다시 그녀를 달래주었다.
“뭐, 그렇지만 들어주지. 계속 말해봐.”
“아… 네, 네! 그… 사실….”
우물쭈물하며 아린이 한 질문은 사실 질문이라기보다는 그녀 개인의 고민상담이었다.
지긋지긋한 그녀의 종교와도 관련된 얘기였는데, 어쨌든 핵심은 자기 성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관한 점이었다.
딱히 교회에서 성행위와 그에 동반되는 쾌락을 거부하진 않으나, 그것도 정도가 있지 옷 벗고 돌아다니거나 엉덩이를 맞으며 쾌락을 느끼는 건 좀 아니지 않는가?
라는 것이 그녀의 고민이었다.
뭘 이런 걸로 고민하고 그러나 싶었지만, 그녀의 앞날을 결정할 중요한 분기점인 것 같아 나도 신중히 생각했다.
“…역시 대답 못 하시는….”
“크흠, 왜 고민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네?”
그럴 줄 알았다며 노골적으로 실망한 기색을 보이길래 나도 모르게 입부터 열었다.
시발, 이제 어쩌지?
이제 와서 말을 되돌릴 수도 없고, 나는 생각나는 대로 대충 말했다.
“넌 사람이잖아. 사람이 흥분하는 건 당연한 거 아냐? 거기에 무슨 좋고 나쁘고를 따지는지 모르겠네.”
깊은 생각 없이 떠오르는 대로 말해서 그런가? 나는 정신없이 말하다보니 발언의 수위를 조절하는데 실패했다.
“애초에, 시발, 하지 말라는 것도 다 성직자 새끼들이 나중에 지들끼리 정한 거 아냐. 나도 전에 몇 번 설교를 들어봤는데 그 여신인지 뭔지 하는 작자는 딱히 별 말도 안했더구만?”
그래, 나는 항상 이게 마음에 안 들었다.
항상 신의 뜻이다 어쩐다하는데, 정작 그 신이라는 년은 별 말 한 적 없다.
그러니까 뭐, 옷 벗고 돌아다니는 걸로 흥분하지 말라, 맞는 거에 흥분하는 건 변태새끼니까 처벌해라 이딴 소리를 한 적은 없단 말이다.
결국 신관들이 세상 좀 살아보니 ‘아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 싶은 걸 정해서 신의 뜻이네 어쩌네 나불거리는 거 아닌가.
물론 신관들 중에는 똑똑한 년놈들이 많으니 내가 이렇게 말하면 유식하게 반박하겠지만, 어쨌든 내 생각은 그랬다.
그리고 이걸 신관인 그녀 앞에서 말하는 건 그리 옳은 판단이 아니었다.
좆됐다!
“…크흠.”
나는 적당히 말을 끊고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아린은 고개를 숙인 상태라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화났나? 역시 좀 화났겠지?
기껏 얻은 기회를 날려먹은 것 같아 속이 쓰라렸다.
“…교리중심….”
“응?”
그녀가 뭐라고 중얼거리길래 되물었다.
“…그렇군요. 그 말 대로에요.”
“…응?”
뭐, 뭐지 이 반응은?
뚜껑 열려도 할 말 없겠다 싶었는데, 의외로 그녀는 감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교회는 부패했습니다!”
“어? 뭐, 뭐라고?”
나는 당황해서 주변을 살폈다.
얘가 갑자기 미쳤나, 왜이래?
“지금의 교회는 그 분의 뜻을 올바르게 실천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지금의 교회는 그저 하나의 세속적인 정치기구일 뿐…! 다시 교리를 중시하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뭐야, 이건.
아까까지의 장밋빛 연애소설 분위기는 어디가고 갑자기 열의가 활활 타오르는 그녀만이 남았다.
“다들 번영이 가져다주는 달콤한 과실에 빠져버린 겁니다. 더 많은 부를 위해 현실과 타협하고… 심지어는 그 분이 한 적 없는 말씀조차 만들어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린은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 늦지 않았어요! 빨리 저와 같이 교회를 개혁하고 진정한 가르침을 따르는….”
그녀는 부끄러움은 어디에 갔다 팔고 왔는지 내 팔을 덥석 잡았다.
“…따르는… 따, 따르… 아, 아앗! 죄송해요!”
내가 당황으로 가득 찬 표정을 짓자 그녀는 내 얼굴과 자기 손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말을 더듬으며 화들짝 놀라 손을 떼버렸다.
“내, 내가 무슨 말을… 죄송해요….”
아린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으로 식히며 시선을 돌렸다.
화끈거리는 건 부끄러움인가 아니면 열정인가.
“음… 잘 모르겠지만 고민은 풀린 건가?”
“…그, 그렇네요.”
그녀는 다시 안절부절 못하며 10분 전의 그녀로 되돌아갔다.
대체 이 흐름은 뭐야?
너무 당황스러운 변화라 나도 쫓아갈 수가 없었다.
“미, 미안해요…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아서….”
아린도 그 점을 깨달았는지 부끄러워하며 나한테 사과했다.
“그냥… 제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저희는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거지 교회를 따르는 게 아니었는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그냥, 제가 알고 있던 교회의 상식들을 굳이 따를 필요는 없겠구나 싶었단 거예요.”
“미안한데, 무슨 소리지?”
결국 참다못한 내가 묻자, 그녀는 잠시 내 허리춤을 빤히 바라보더니 부끄러워하며 뒤로 돌았다.
“…여신님께서는 저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리고서 아린은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신관복을 슬금슬금 벗기 시작했다.
“기뻐하며 살라고요. 그리고 이걸 옛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했죠. 주어진 삶에 기뻐하며 살아라….”
아린은 벗은 신관복을 곱게 접어 바닥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 그러니 저는 여신님의 뜻을 따르며 살겠어요. 제, 제가 기뻐할 수 있는 일을… 하려구요.”
대체 뭔 짓을 하려나하는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더니, 아린은 벽에 양 손을 짚고서는 내 쪽으로 엉덩이를 슥 내밀었다.
“그러니까… 때려주세요♥”
잘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자기합리화를 마쳤다고 보면 되겠지?
아린은 적당히 종교적 신념과 타협하면서 자기의 은밀한 성적 취향을 만족시키는 방법을 찾아낸 것 같았다.
“이, 이건 여신님의 뜻과도 반하지 않는… 기쁨을 추구하는 행위…. 그러니, 아, 아무 문제 없어요!”
그럼 나도 그녀에 맞춰줘야지.
나는 그녀가 빤히 바라보던 회초리를 손에 들었다.
“속옷 내려.”
“읏… 네에.”
그녀가 한 손으로 팬티를 잡고 살짝 밑으로 내렸다.
나를 향해 쭉 내민 엉덩이와, 그 밑으로 살며시 보이는 그녀의 구멍.
나는 회초리 대신 손바닥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가격했다.
짜악!
“햐악…! 하으읏…♥ 흐응….”
전신을 부르르 떠는 그녀의 쇄골에는, 검다고는 할 수 없지만 결코 빨갛다고도 볼 수 없는, 그런 장미가 새겨져 있었다.
좋아.
분위기를 보니 조금 더 나가도 될 것 같다.
나는 그녀에게 내 자지를 물릴 상상을 하며 다시 한 번 엉덩이를 때렸다.
짜악!
“흐으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