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 [짐꾼] 수확의 날이 다가온다
내가 아린의 방어를 조금씩 무너뜨리는 사이, 용사 일행은 다음 마을에 도착했다.
간만에 아무 문제없는 평범한 마을이었기 때문에 용사는 여기서 하루 푹 쉬었다 가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적어도 아직 이 파티의 짐꾼이었으므로 날이 밝자마자 세리아를 데리고 부산물을 정산하러 갔다.
용사가 우릴 보기라도 하면 굉장히 불쾌해하겠지?
굳이 상황을 악화시킬 필요는 없으니 그냥 아침 일찍 나가기로 했다.
다음날 용사가 깨지 않게 주의하며 방을 나서니, 열심히 치장한 세리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하러 가는 거야.”
“아, 알아요….”
세리아는 안다고는 말했지만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나는 연인이 아니라 주인이라는 것을 몇 번 각인시켜줬지만, 그래도 그녀는 이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은근슬쩍 내 여자인 척을 하려고 했다.
뭐… 부산물을 정산하고 나면 딱히 할 게 없는 것도 사실이니, 잠깐쯤은 시간을 내줘도 되겠지.
채찍만으로는 사람을 길들일 수 없는 법이다.
그렇지만 나는 굳이 그 사실을 티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세리아는 용케 눈치를 챘는지 싱글벙글한 얼굴로 내 뒤를 따랐다.
“둘 다 일찍 일어났네.”
“유니, 웬일이야?”
1층에는 유니가 졸음이 덜 깬 얼굴로 앉아있었다.
“응… 이따 에릭 내려오면 같이 시장 구경하려고….”
“너도 참 열심이다.”
세리아는 쿡쿡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이것 참, 알콩달콩한 연인 사이구만 그래.
용사에게 매달리는 그녀의 모습이 살짝 마음에 안 들었지만, 아직 그녀는 때가 아니다.
나는 별 미련 없이 그녀를 지나쳤다.
“재료 팔러 가시나요?”
“아… 네, 그렇죠.”
간만에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간만인 것 같다.
예전에는 가끔씩 말을 걸어오곤 했는데.
유니는 잠이 덜 깼는지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 말했다.
“잘 갔다 오세요.”
“네, 아가씨도요.”
***
정산을 마치고 나오자 세리아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주인님, 혹시 하실 일이 더 있으신가요?”
없다는 걸 알고 물어본 거다.
귀여운 유도심문이라 나도 모르게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설마 이것까지 노린 건가?
“없다, 없어. 그리고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너는 내 연인 같은 게 아니라….”
“알아요. 저 같은 게 주인님과 동등하게 설 수는 없다는 거.”
그녀는 여전히 나보다 세 걸음 쯤 뒤에 서있었다.
왠지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한 소리 툭 뱉었다.
“뭐, 알면 됐어. 따라와.”
“…네!”
세리아는 기쁜 목소리로 내 뒤를 졸졸 따랐다.
그런데 말은 이렇게 했지만, 어딜 가지.
나는 잠시 걸으면서 고민했다.
으음… 시장이 열린다고 했던가.
솔직히 그런 곳을 돌아다니는 건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사람 사이에 부대껴서 내 돈만 쓰는 게 뭐가 그리 즐겁단 말인가?
원래 내가 시장에 갈 일이 있으면 그건 둘 중 하나였다.
어리숙한 행인들 지갑을 훔치거나, 아니면 가게 물건을 슬쩍할 때.
뭐, 그 때는 나도 살기 어려웠으니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세리아도 있으니 그런 추한 짓을 하진 않겠지만.
나는 세리아에게 보상을 주는 마음으로 그녀를 데리고 시장이 열렸다는 곳으로 향했다.
잠시 그녀와 돌아다니다보니, 익숙한 긴 금발을 발견했다.
“앗, 아린이에요, 주인님.”
“나도 보인다.”
저 쪽에서는 우리를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인데, 그녀는 허리를 숙여 장신구를 구경하고 있었다.
딱히 오늘 아린이랑 뭔가 할 생각은 없었지만, 저러고 있는 걸 보니 괜히 또 욕심이 생기네.
그렇지만 아쉽게도 이미 세리아한테 말을 해뒀단 말이지.
“갔다 오세요, 주인님. 전 구경 좀 하다 들어갈게요.”
괜히 신경 쓰는 것 같아 그녀를 슬쩍 바라봤더니 생각보다 덤덤한 표정이었다.
딱히 아쉬워한다거나 그런 반응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그게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
그게 아니라면 세리아가 나조차 속일만큼 연기에 능해졌다는 소리겠지.
“나랑 같이 다니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저보다는 주인님의 의사가 더 중요하죠.”
올바른 대답이었다.
그렇지만 이게 그녀의 본심인가?
“본심은?”
“똑같아요.”
내가 세리아를 잠시 바라보자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음… 예전이었으면 좀 아쉬웠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저는 한 명의 여자이기 이전에 주인님의 노예니까요. 진심으로 주인님을 더 우선해서 생각하고 있어요.”
기특하기도 하고, 그녀가 이렇게까지 망가져버렸다는 사실에 살짝 미묘한 심정이 들기도 했다.
그녀는 이미 이전의 세리아가 아니다.
과거의 세리아는 죽어버린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나는 살인자 비슷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 쓸데없는 감상이 들었다.
“그래…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나는 문득 내 앞에 있는 좌판을 바라봤다.
이쪽도 장신구를 팔고 있다.
“이걸로 하나.”
“어이구, 감사합니다.”
세리아는 갑자기 목걸이를 하나 사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눈빛에 대답하는 대신, 방금 산 목걸이를 그녀에게 던져주었다.
“지금까지 수고했고, 앞으로도 잘 하라는 의미에서 주는 거야.”
“…감사합니다.”
세리아는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목걸이를 잠시 바라보더니 슬며시 웃으며 품에 꼭 안았다.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 되겠네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총총걸음으로 멀어졌다.
나는 세리아가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린에게 접근했다.
“이거 잘 보십쇼. 이렇게 광택이 나는 금속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와아, 처음 봐요!”
“그렇죠! 그럴 겁니다, 이건 아무데서나 나는 금속이 아니거든요! 이걸로 목걸이나 반지 같은 걸 만들면, 아주 그냥, 크…! 죽여줍니다.”
아린은 무슨 이상하게 생긴 금속을 들고 있는 상인과 대화중이었다.
앞뒤 상황은 몰라도, 저대로 내버려뒀다가는 멍청하게 속아 넘어갈 것 같은데.
“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몇 가지 더 보여드리겠습니다!”
상인이 이 때다 싶었는지 뒤쪽으로 가 물건들을 뒤적거렸다.
나는 그 사이 그녀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거 다 구라니까 속지 마.”
“앗… 깜짝 놀랐잖아요.”
아린은 내 얼굴을 보고서는 흠칫 놀라더니, 곧 가슴에 손을 얹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거 보십쇼, 이거! …여, 옆의 분은 일행입니까?”
히죽거리며 아까랑 비슷하게 생긴 걸 들고 오던 상인은 나를 보더니 순간 당황했다.
“그렇다만.”
“그… 그렇군요. 하, 하하….”
“그래서 그게 뭐라고? 무척 흥미로운데, 다시 설명해줄 수 있나?”
그는 내 표정에서 위기라는 걸 깨달았는지, 땀을 뻘뻘 흘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자.”
“앗, 잠시… 고, 고마웠어요!”
그녀는 먼저 떠나는 내 뒷모습을 보며 당황하다가 그에게 대충 사과하고 나를 따라왔다.
“…저도 그런 상술에는 안 속거든요.”
그녀가 가장 먼저 한 말이 이거였다.
나한테 도움 받은 것 같아 분했나?
“아는 사람이 왜 그랬대?”
“정면에서 지적하면 부끄러워할 테니까요. 사기는 죄악이지만 사람을 창피 주는 것도 그리 떳떳한 일은 아니죠.”
알면서 모르는 척 해주는 것도 그다지 떳떳한 것 같진 않은데….
나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속에만 담아두기로 했다.
“그, 그래서 무슨 일이시죠? 저한테… 이, 이상한 짓이라도….”
“아니, 별 이유는 없고. 속고 있는 것 같길래 그냥 불쌍해서 와본 거지.”
그 말에 아린은 자기가 괜한 오해를 했음을 깨달았는지 샐쭉거리며 한 마디 했다.
“괜한 도움이셨네요. 저… 저도 이정도 쯤은 혼자서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왠지 아린의 태도가 조금 이상한 것 같기도 하지만 우선은 넘어갔다.
내가 별 말을 안 하자 괜히 더 부끄러워졌는지 그녀가 팔짱을 끼며 말을 덧붙였다.
“시장은 많이 와봐서 익숙하거든요. 저는 딱히 이런 경험이 처음도 아니라….”
“그래, 그래. 알겠어.”
나는 그렇게 대충 그녀의 말을 끊으며 계속 걸었다.
아린은 내가 계속 어디론가 걸어가자 주변을 살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저기… 절 어디로 데려가시는 거죠? 왠지 길이 더 좁아지는 것 같은데….”
아린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알 것 같지만, 사실 딱히 목적지는 없었다.
그냥 별 생각 없이 걷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했다가는 기껏 멋진 모습을 연출해놓고 스스로 깨먹는 꼴이 될 것 같아, 나는 급하게 주변을 살피며 변명거리를 찾았다.
그러면서 발견한 게 옷을 파는 어느 상인이었다.
“혹시라도 이상한 생각을 하고 계시다면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란….”
“옷.”
“네?”
“옷이나 좀 보고 가지.”
“…뭐 사시게요?”
아니, 진짜 보기만 할 거야.
내가 좌판 앞까지 다가가자 아린도 조금 뒤에서 나를 졸졸 따라왔다.
“세리아에게 하나 선물하시게요?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그녀를 많이 챙기네요.”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아린이 키득 웃었다.
“어이구, 어서 오십쇼. 여기 예쁜 옷 많습니다.”
나는 상인의 인사를 한 귀로 흘리며 옷들을 적당히 살피는 척 했다.
그러면서 슬쩍 아린의 모습을 보니 그녀도 나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대신 옷을 하나둘 구경하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임기응변이었다며 스스로를 칭찬하고 있었는데, 상인은 내가 지갑을 열 놈이 아니라는 걸 금세 깨닫고 대신 아린에게 붙어 슬쩍 구매를 유도하고 있었다.
“이건 어떠십니까? 이게 또 서쪽에서 유행하는 복식인데….”
별 생각 없이 옷들을 구경하던 아린의 시선이 문득 어딘가에서 멈췄다.
상인은 눈치 빠르게 그 옷을 가져왔다.
어깨가 탁 트였고 가슴골이 살짝 비치는 과감한 디자인.
어디서 본 듯한 옷인데.
그걸 보는 순간 나는 아린의 행동에서 느껴졌던 위화감을 깨달았다.
“안목이 좋으시군요! 과감하면서도 우아한 게 또 이 옷의 매력이죠!”
“…….”
아린의 시선이 그 옷에 못박혀있었다.
나는 그녀의 뒤로 다가가 슬쩍 속삭였다.
“그런다고 네가 세리아가 되는 건 아니야.”
“…히익!”
아린은 펄쩍 뛰며 뒤를 돌았다.
깜짝 놀란 상인은 옷을 떨어뜨릴 뻔했지만, 상인의 본능이 발동했는지 용케 떨어뜨리기 전에 옷을 줍는데 성공했다.
“아, 아니에요! 갑자기 무슨, 무슨….”
“아니었나? 그럼 말고.”
내가 씩 웃자 아린의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역시나.
아린은 불안했던 것이다.
자기에게 손 하나도 까딱 안 하는 건, 혹시 나에게 매력이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닐까?
세리아랑은 잘만 하는데.
“어… 안 사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상인은 분위기를 보고 직감했는지 슬픈 얼굴로 다시 옷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아린은 남들보다 외모에 대한 관심이 많다.
당연히 본인의 외모나 매력에도 자신이 있겠지.
그런데 나 같은 짐승 같은 놈이 그녀 앞에서만 무관심해지니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에게 부족한 점이 있었나?
그리고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겠지.
세리아에게 내가 모르는 매력이 있나?
이를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를 따라 해보는 것.
말투나 행동이 왠지 그녀답지 않게 틱틱거렸던 것도, 세리아나 입을 법한 옷에 관심을 보인 것도 다 그래서였다.
이건 나도 예상 못했는데.
물론 나에게 있어서는 좋으면 좋았지 나쁠 것 하나 없는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