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용사] 기분 좋은 날에
다음 마을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상당히 긴장했다.
최근 들리는 마을마다 무언가 문제가 터졌으니, 이번에도 그럴지 모른다는 의심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마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딱히 이상한 점이 보이지도 않았고, 불안한 소문 같은 게 돌지도 않았다.
마을보다는 도시에 더 가까운 규모라 숙소도 충실했다.
그래서 우리는 간만에 숙소에 짐을 풀고 하루 휴식시간을 가졌다.
고작 며칠 걸었다고 침대에 눕자마자 그동안의 피로가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늦은 밤에 도시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일단 우리는 하룻밤 푹 잤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자 다들 자유 시간을 만끽하러 나갔다.
“안녕, 에릭. 늦게 일어났네?”
“응 안녕… 다들 이미 나갔나봐?”
나는 살짝 졸린 눈으로 유니에게 인사했다.
숙소 안에는 유니 밖에 없었는데, 보아하니 나머지 셋은 이미 나간 것 같았다.
…하필 또 그 셋이다.
“응. 세리아는 제렌 씨랑 같이 재료 정산하러 갔고, 아린은 시장 구경한다면서 나갔어.”
몬스터의 부산물.
슬슬 팔 때가 되기도 했고, 지갑 담당인 세리아와 짐꾼인 그가 둘이 나가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신경 쓰인다.
게다가 아린도 동시에 외출?
자꾸만 불안한 상상이 든다.
“그럼 셋이 같이 나갔어?”
“응? 아니? 따로따로 나갔는데?”
그럼 다행이다.
그래도 여전히 불안은 하지만….
“에릭은 오늘 뭐할 거야?”
“글쎄… 딱히 생각 없는데.”
내 말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녀가 싱글벙글 웃었다.
“그럼 나랑 같이 나가자.”
“그럴까?”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최근 유니에게 소홀해진 감이 없잖아 있었으니 이렇게 둘이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겸사겸사 세리아나 아린이 뭐 하는지도 찾아볼 수 있겠지.
“아참.”
“응?”
유니가 부루퉁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오늘 하루는 다른 애들 생각 금지야.”
운 좋게도 오늘은 이 마을에서 시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아마 그래서 아린도 구경하러 나간 거겠지.
근처에 광산이 있어서 그런지 시장에는 다른 곳에 비해 장신구들이 특히 많았다.
어린 도제들이 자기네 대장간에서 만든 장신구들을 열심히 팔고 있었다.
“와아, 예쁘다. 어떻게 이렇게 오밀조밀하게 만들었지?”
유니는 반지 하나를 집어 들고 그 안에 새겨진 무늬를 보며 감탄했다.
“한 번 껴보시겠습니까?”
이런 상황에 꽤 익숙한지, 물건을 파는 소년이 씩 웃으며 그녀에게 권했다.
“그, 그래도 돼요?”
유니는 해맑게 웃으며 반지를 끼우려다가 소년의 제지에 멈칫했다.
“옆의 연인 분께 끼워달라고 하시죠. 서쪽에서는 상대에게 반지를 끼워주는 게 청혼의 풍습이라고 합니다.”
분명 오랫동안 이 일을 해본 녀석이 분명했다.
유니는 그 말을 듣더니 잔뜩 풀어진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처, 청혼… 에헤헤.”
“내가 끼워줄게.”
이래놓고 안 사고 그냥 가면 거북하잖아.
저 어린 녀석의 상술이 분명했지만, 저렇게나 유니가 좋아하는데 그 정도도 못해줄까 싶었다.
가격은… 괜찮겠지?
내가 잠시 머뭇거리자 소년이 은근슬쩍 다가와 속삭였다.
“별로 안 비쌉니다. 지금 사시면 3할 깎아드리죠.”
나는 속내를 훤히 읽힌 것 같아 부끄러워하며 유니의 왼손을 잡았다.
“앗… 헤헤, 이거 기분 좀 이상하다.”
“나, 나도 그래….”
어디에 끼워야하는 거지?
나는 고민 끝에 새끼손가락에 끼웠다.
딱히 별 이유는 없고 그냥 크기가 그 쪽 손가락에 제일 맞아보였기 때문이다.
“와아, 예쁘다….”
“하나 사줄게.”
꼬맹이와 미리 말을 나눈 대로 나는 선심 쓰듯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유니의 얼굴이 밝아진 건 물론이다.
“진짜? 그, 그치만 이거 비싼 거 아냐…?”
“괜찮아. 그 정돈 사줄 수 있지.”
3할… 진짜지? 믿고 있다!
다행이 반지의 가격은 내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반지를 구매했다.
“헤헤, 고마워! 그, 그런데 하나만 사도 괜찮은 거야…?”
“응?”
유니는 쭈뼛거리면서 말했다.
“그, 아린이나 세리아 건 안 사도 괜찮아?”
“아… 그거 하나면 돼.”
세 개 사기에는 돈이 부족하니까.
그랬다간 지갑이 거널난다.
“…그래? 헤헤, 그렇구나…. 나만….”
유니는 반지가 그렇게 좋은지 방긋 웃으며 반지 낀 손가락을 자기 손으로 감쌌다.
“좋아하는 거 같아서 다행이다.”
“응, 고마워. 소중하게 쓸게!”
그녀가 반지를 소중히 하는 걸 보니 문득 작은 궁금증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 목걸이는 계속 차는 중이야?”
“목걸이?”
유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뒤늦게 내 말을 이해하고 자기 목에 건 목걸이를 보여주었다.
“이거 말이지? 당연히 계속 쓰고 있지.”
시련의 동굴에서 얻었던 목걸이.
세리아의 새 스태프나, 아린의 봉인된 새 신관복 같이 눈에 띄는 장비는 아니라서 나도 한동안 잊고 있었다.
정확하게 무슨 효과지?
“이걸 쓰고 있으면 뭐랄까, 정령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목소리? 정령이 말도 해?”
“히히, 당연히 안 하지.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거야.”
유니는 웃으면서 다시 목걸이를 집어넣었다.
처음 봤을 때는 몰랐는데, 가운데에 박힌 녹색 보석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안쪽이 무언가가 든 것처럼 살짝 탁했는데, 아마 그게 정령과의 교감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 그럼 가자 에릭! 저기서는 옷을 판대!”
유니는 내 손을 잡고 다음 길목을 향해 나아갔다.
옷을 판다는 그녀의 말 그대로, 여기에서는 정말 다양한 옷들을 팔고 있었다.
이런저런 예쁜 옷을 구경하며, 유니의 얼굴에서는 한동안 웃음이 떠나가질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몸에 활력이 도는 것 같았다.
“앗, 이거 봐. 세리아랑 비슷한 옷이다, 그지.”
“네가 입어도 예쁠 것 같아.”
“히히… 그래? 고마워!”
세리아가 한 때 자주 입고 다니던 어깨가 탁 트인 시원한 느낌의 옷이었다.
요즘에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어깨를 노출한 옷 대신 단추가 달린 걸 자주 입었는데, 솔직히 나는 전에 입었던 게 더 예쁘다고 생각한다.
“어이구, 역시 사람이 예쁘니 옷도 더 예뻐 보이는군요. 하나 사시렵니까?”
“으음… 예쁘긴 한데, 잠깐 생각해볼게요! 다른 옷들을 조금 더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이거 참, 이 옷은 생각보다 별로인가… 벌써 두 번째네.”
아쉽다는 듯 혼자 중얼거리는 주인의 말에 나는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들어 물었다.
“두 번째라뇨?”
“어유, 들렸나요? 미안해요, 딱히 별 의미는 아니었는데….”
“괜찮으니까 좀 더 자세히 들려주시겠어요?”
그는 내 말에 눈만 잠시 깜빡이더니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아니, 뭐 딱히 특별한 얘기는 아닌데… 조금 전에도 연인 같은 손님이 와서 말이죠, 똑같은 옷을 집어보고 가셨습니다. 그냥 그게 전부에요.”
연인 같은 손님… 세리아를 닮은 옷….
나도 내가 과민반응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한 번 이상한 상상을 하고 나니 멈추기가 힘들었다.
“혹시 그 손님이라는 사람… 빨간 머리였나요?”
아니겠지?
그냥… 그냥 다른 사람이겠지.
“빨강? 으음… 아뇨, 아니었습니다.”
그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휴, 역시.
내가 과민반응했다.
유니가 들었으면 또 부루퉁한 얼굴로 한 소리 했겠지?
슬쩍 그녀를 살펴보니, 그녀는 널린 옷들을 하나씩 집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가 괜한 걸 물었네요. 죄송해요.”
“아뇨, 뭘 이런 걸 가지고.”
조금 실례되는 질문을 했던 것 같아 고개숙여 사과하고 나는 유니에게 다가갔다.
“사고 싶은 거라도 있어? 하나 사줄게.”
“와아, 웬일이야 에릭? 그치만 괜찮아! 나는 이걸로도 충분해.”
유니는 자기 옷을 밑으로 죽 잡아당기며 나를 바라봤다.
상당히 예전부터 보던 옷이다.
아마 여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입고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더러워지면 당연히 다른 옷을 입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면 유니는 종종 이 옷을 입고 다니곤 했다.
“이거 기억해?”
“어?”
그 옷…?
나랑 관련있는 옷이던가?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내 기억을 뒤졌다.
아니, 유니에게 옷을 사줬다거나 그런 기억은 없는데… 설마 내가 까먹었다던가….
내가 다급히 생각을 헤집는 모습을 본 유니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당연히 모르겠지.”
“뭐, 뭐야… 놀랬잖아.”
휴, 유니의 장난이었던 모양이다.
그럼 그렇지. 내가 이런 걸 까먹었을 리가 없다.
나는 하마터면 유니에게 쌓일 뻔 했던 미안함을 털어냈다.
“이거 에릭이 골라준 거야. 예전에 상인이 우리 마을에 왔을 때.”
“어?”
그랬나?
듣고보니 뭔가 떠오를 것 같기도 하고.
“간만에 상인이 와서 다 같이 구경 갔잖아. 내가 이거랑 다른 옷 사이에서 고민하는 걸 보고 에릭이 이걸 골라줬고.”
아, 아아. 그랬지 참.
기억이 이제야 난다.
우리 마을에는 딱히 상인이 자주 들르는 편이 아니었는데, 그 날은 웬일로 한 상인이 와서 물건을 팔았다.
다루는 품목도 또 옷이라 다들 관심 있게 눈여겨보곤 했는데, 촌장님 일을 돕고 나도 뒤늦게 따라갔더니 유니가 옷 두 개를 두고 끙끙대며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하나 골라 그 쪽이 더 예쁜 것 같다고, 지나가면서 한 마디 해줬던 기억이 난다.
…그게 이 옷이었다고?
“흐응… 역시 까먹었지?”
“아, 앗, 그게….”
그런 걸 어떻게 기억한단 말인가.
정말 스쳐지나가며 한 마디 한 것뿐인데.
“히히, 장난이야. 아주 잠깐이었는데 모르는 게 당연하지. 그치만 그 때 에릭 덕분에 이걸로 샀어.”
유니는 옷을 꾹 쥐며 살짝 미소 지었다.
“덕분에… 응….”
“유니?”
“앗,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제 들어갈까?”
옷을 빤히 바라보던 유니는 내 부름에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나도 주변을 둘러보니 벌써 저녁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네.
즐거워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돌아갈까?”
“응!”
우리는 그렇게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숙소로 돌아왔다.
“어서와요, 용사님.”
“안녕.”
우리 빼고 나머지는 다 돌아온 상태였다.
나는 곧장 그녀들의 상태를 살폈다.
으음… 딱히 이상한 점은 없는 것 같다.
내 시선이 너무 오랫동안 그녀들에게 가있었는지, 아린이 부끄러워하며 자기 몸을 가렸다.
세리아는 내가 그녀를 쳐다보자 음흉하게 웃으며 테이블에 턱을 괴고 나를 바라봤다.
왠지 부끄러워 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흥.”
유니의 목소리에 슬쩍 그녀를 바라보니 유니가 나를 째릿 바라보고 있었다.
“유니가 원망하잖아, 에릭.”
“아, 아니, 그….”
세리아가 키득거리며 말하자 나는 급히 변명하려했다.
유니가 혹시 실망했으면 어쩌나하고 걱정했는데, 그녀는 자기 손가락을 바라보며 헤헤 웃는 걸로 넘어갔다.
“괜찮아.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