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 [용사] 여로
“안 된다고 하시면 안 보실 건가요?”
아린의 말에 나는 정곡을 찔려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슬며시 옷자락을 더 들추자 나는 당황해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용사님은… 이런 거 싫어하시나요?”
내가 그녀를 피하자, 아린이 살짝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니, 그게… 그….”
대체 뭐라고 말해야하지?
좋아한다고 하면 내가 스트립쇼 같은 천박한 걸 즐기는 사람이 되는 것 같고, 아니라고 하면 왠지 아린이 슬퍼할 것만 같다.
아니, 대체 왜?
아린이 그런 걸로 슬퍼할 이유가 있단 말인가?
내 직감은 그러지 말라고 답했지만, 머리를 열심히 굴려 생각해보니 아린이 이런 걸 싫어한다고 나에게 실망하거나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신관 아닌가.
누구보다 청렴하고 올바른 마음을 가진 신관.
“…벼, 별로 안 좋아해.”
이번 일도 어차피 그녀의 장난이겠지.
내가 자꾸 추잡한 시선을 그녀에게 보내니까, 경고 차원에서 이렇게 돌려 말하는 것이리라.
“……그렇군요.”
아린의 대답이 돌아온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혹시 내 말을 못 들었나 싶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을 때,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린?”
그녀의 음색은 무척이나 낮았다.
예상하던 대답을 듣지 못한 것 같은 반응.
그럼 거기서 그렇다고 말하는 게 정답이었단 말인가?
“그렇죠. 역시 그게 정상이겠죠.”
“…아, 아니 그게, 그 뭐야, 그래도 딱히 이상할 건 아니라고 생각해. 사, 사람이 그럴 수도 있잖아, 응.”
으, 급하게 말을 바꾸느라 꼬이고 말았다.
그보다 대체 이 상황은 뭐란 말인가?
마치 아린이 자신의 숨은 성벽을 은근슬쩍 밝혔다가 내가 매몰차게 부정해버린 듯한 이 느낌은?
아린이 그런 이상한 취향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잖아.
당연히 그렇다.
그래야만 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 때 아세일라에서 봤던 여자가 아린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불안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죠.”
아무튼 내 대답이 그녀에게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했음은 분명해보였다.
그녀는 누가 봐도 겉치레인 대답을 돌려주고서는 말없이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 상황에서 내가 먼저 말을 거는 게 맞는지 열심히 고민하고 있었다.
말을 건다면? 뭐라고 해야 하지?
사실 나도 누가 내 앞에서 옷 벗는 거 좋아해?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애초에 그녀가 말한 이런 것이 대체 뭐지?
내 앞에서 옷을 벗는 것? 아니면 더 광범위한 성적인 행위 전반을 가리키는 말인가?
“저희는 딱히 성행위를 부정하거나 하지는 않아요.”
아린이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사람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기르고 싶어 하는 건 그 분이 우리를 만들면서 부여하신 자연스러운 욕구잖아요. 그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죠.”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어쩌면 나한테 얘기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녀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면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린은 내 옆에 쪼그려 앉아 모닥불만 바라보고 입을 여는 중이었다.
바로 옆에서 내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분은 저희에게 어디까지의 욕구를 허락하신 걸까요?”
아린은 어딘가 쓸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3개월 전에 북부의 한 영주가 어린아이들을 겁탈한 사건이 발생해 처벌을 받았어요. 그 또한 성욕에서 기인한 범죄죠. 그런데 이 성욕도 결국 그분이 저희에게 내려준 것 아니던가요? 이건 사람이 잘못된 걸까요 아니면 욕구가 잘못된 걸까요?”
글쎄… 적어도 나보다는 아린이 더 잘 알지 않을까?
늘 그랬듯 이런 건 종교의 영역이었고, 종교와 별 접점이 없는 그녀 외의 사람들은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세리아 정도라면 생각해봤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도 머리가 좋으니까.
나 같이 우둔한 녀석에게는 그저 뜬구름 잡는 소리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이런 게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귀족들 사이에서는 여신님이 허락한 욕구라는 명목 하에 온갖 부도덕한 짓이 벌어지고 있어요. 저희는 가끔 이를 알면서도 침묵하죠. 그들의 지원금 없이는 교회가 돌아가지 않으니까요.”
그런가?
그런 생태 같은 거 나는 모른다.
“어릴 때 이 점에 대해 수녀님들께 따졌는데, 아무도 명쾌하게 대답해주지 않았어요. 용사님. 혹시 용사님은 대답해주실 수 있나요?”
“…….”
당연히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도 나름 어떻게든 답을 하려고 머리를 굴렸지만, 떠오르는 말이 아무 것도 없었다.
“…미안해요. 괜한 걸 물었네요. 이런 얘기도 원래 하면 안 되는데.”
“아냐, 그… 고민도 털어놓지 않으면 마음속에서 썩어가는 법이잖아.”
그 말에 아린이 쿡쿡 웃었다.
“누구한테 들은 말이에요?”
“초, 촌장님이었나….”
사실 맞게 말한 건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지나가면서 얼핏 들었던 거 같은데.
“그렇죠. 혼자 끙끙 앓고만 있어봐야 아무 것도 해결이 안 되죠.”
아린은 그렇게 말하며 비로소 모닥불에서 시선을 떼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말 몰라서 물어본 질문도 아니었구요.”
“…그래?”
“어릴 땐 모든 어른들이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거라 믿었는데.”
마지막 말은 나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왠지 아린에게 이 얘기만큼은 해주고 싶었다.
“그, 그래도… 나는 아린만큼 믿음이 투철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그 말에 아린의 손이 우뚝 멈췄다.
나는 기회다 싶어 조금 더 말을 늘어놓았다.
“아, 아린은 항상 교리를 따르면서 살아가잖아? 머리를 항상 소중하게 관리하는 것도 그렇고… 나쁜 짓도 안 하고… 아, 다른 동료들이 나쁜 짓을 한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벌떡.
머리 얘기가 나오자 슬쩍 자기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아린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산책 좀 하고 올게요.”
“이 시간에?”
“네.”
하지만 위험할 텐데….
그러나 그녀는 단호했다.
금방 돌아오겠다며 내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어둠 속으로 향하던 아린은 갑자기 제자리에 멈춰 서서 이런 말을 했다.
“그거 아세요, 용사님?”
“뭐를?”
그녀는 나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그대로 서서 계속 말했다.
“재작년에는, 길거리에서 옷을 벗고 다녔다는 남녀 8명이 과하다는 이유로 처벌받았어요.”
“…응?”
“저는 거짓말쟁이네요.”
마지막 말은 작았지만, 거짓말쟁이라는 말 만큼은 똑똑하게 들었다.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대체 무슨 말이지?
아니, 그보다 내가 대체 무슨 실수를 한 거지?
그녀의 반응으로 봤을 때, 뭔가 내가 말실수를 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대체 뭐가? 역시 처음에 그런 거 안 좋아한다고 했던 게 문제였나?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나는 문득 불안한 상상이 들었다.
…다들 잘 자고 있겠지?
어둠 속에 홀로 있을 그녀를 생각하니 자꾸 나쁜 상상이 떠오른다.
아니, 이러니까 내가 이상한 말로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것 아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의 관계를 의심하다니.
그렇지만 신경 쓰인다.
그녀를 쫓아갈 수는 없으니 하다못해….
나는 슬며시 일어나 천막들을 몰래 확인했다.
일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들 자고 있다.
역시 괜한 의심이었구나.
아린을 의심한 것 같아 미안한데.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자리로 돌아오려던 나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아린과 마주했다.
어, 언제 돌아왔지?
“…아, 아린….”
“저희 텐트는 왜…?”
하필이면 그녀들이 자는 천막을 확인한 직후에 딱 들켜버렸다.
사실 제렌 씨가 자고 있는 것만 확인해도 되지만, 왠지 모르게 세리아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왠지 세리아도 그녀에게 이상한 장난을 치지는 않을까 하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후후… 몰래 엿보는 게 취미신가요?”
“아, 아니야!”
아린은 나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엿보기범 취급 받은 건 조금 억울하지만, 그래도 한 편으로는 그녀가 기운을 되찾은 것 같아 다행이라는 심정이기도 했다.
“정 보고 싶으시다면 용사님을 위해 제가….”
“아, 아니라니까!”
아차.
소리가 좀 컸다.
나는 황급히 입을 막고 주변을 살폈다.
누가 일어… 나지는 않았지?
별 반응이 없는 걸 보고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자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그녀가 보였다.
“미, 미안해요… 제가 또 눈치도 없이 같은 실수를….”
“어? 아, 아냐! 그게 아니라, 나는….”
아린이 축 처진 표정을 짓자 나는 당황해 그녀의 오해를 풀려고 했다.
“아니에요. 제가… 조금 더 조심할게요.”
“그, 그게 아니라….”
“슬슬 교대시간이죠?”
아린은 내 변명을 듣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제가 이어서 할 테니 이제 들어가 쉬세요.”
“잠깐만, 아린….”
아린은 그렇게 말하고는 나에게 등을 돌렸다.
그녀가 모닥불을 바라보며 앉아 있어 등이 훨씬 어두워보였다.
“…….”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뭐라고 말을 더 덧붙이려다가, 결국 터덜터덜 내 천막으로 돌아왔다.
***
“잘 잤어, 에릭?”
“아, 응….”
아침에 일어난 나는 바로 아린의 상태부터 살폈다.
그녀의 표정이 어둡다.
역시 어제 일을 신경 쓰고 있는 거겠지.
나는 슬며시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을 붙이려고 했다.
“에릭! 잠깐 여기 좀 와줄래?”
“어? 아, 알았어!”
하필이면 세리아랑 타이밍이 겹치다니.
나는 조금 이따가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자꾸 주변에서 이상할 만큼 우연이 겹쳐 오후가 다 되도록 그녀와 단둘이 있을 시간을 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