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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짐꾼-108화 (108/236)

〈 108화 〉 [짐꾼] 인간이 개가 되는 마법

나는 슬쩍 세리아를 노려봤다.

어차피 아린한테도 언젠가는 밝힐 사실이었지만, 적어도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함부로 나서기에는 조금 조심스러운데.

아니, 다른 것보다 용사가 문제다.

지금도 얘기를 듣고 있으려나? 아까 얼핏 보기로는 정령이 사라진 거 같기도 했는데.

“왜 두 분 다 대답이 없죠?”

아린은 의심이 확증이 됐는지 팔짱까지 끼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리아. 설명해보세요.”

세리아는 나를 바라보며 도움을 구했다.

네가 벌인 일이니 알아서 해야지, 왜 나한테 물어?

“당신은요? …제가 분명 성욕은 묶어뒀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아린의 표정은 조금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아끼는 제자한테 배신당한 느낌이려나?

“…후우, 어차피 대충은 알고 있었으니 그냥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우리 둘이 대답이 없자 아린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세라아가 다시 나를 흘끗 바라보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알아서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뭘 물어보고 싶은데?”

“방금,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주인님’이라는 말을 들은 거 같은데… 맞나요?”

세리아는 주변을 잠시 살폈다.

“뭐, 안 듣고 있는 거 같으니… 맞아. 제대로 들었어.”

세리아의 당당한 대답에 아린의 눈썹이 휘었다.

“…뭐라구요?”

“주인님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게 뭐가 잘못 됐어?”

과연 이렇게 당당하게 나가는 게 옳은 짓일까.

이젠 나도 잘 모르겠다.

“…혹시 저 남자가 당신에게 최면 같은 거라도 걸었나요?”

“주인님이 그런 비겁한 짓을 할리 없잖아.”

이젠 거리낄 것이 없는지 세리아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당당하게 나섰다.

그래. 난 언제나 정정당당했다.

최음독? 그게 뭐더라?

“이리와.”

“네에, 주인님.”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난 과시하기 위해 세리아를 내 곁으로 불렀다.

“다, 당신들 무슨….”

아린은 세리아가 쫄래쫄래 다가와 내 가슴에 머리를 부비는 모습을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뭐, 이런 거지.”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린을 바라봤다.

“그치만… 저주가… 아니, 설마 그 전에 이미….”

“시끄러, 아린.”

내 가슴에 부비적거리던 세리아는 아린이 계속 뭐라고 중얼거리자 고개를 홱 쳐들고서는 그렇게 말했다.

“세, 세리아… 정신 차려요! 이건, 이건 분명 무슨 저주에….”

“네가 보기엔 저주인 거 같아?”

아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라면 알겠지. 이게 저주도 뭐도 아니라는 것을.

“요, 용사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요?”

“왜? 내가 에릭이랑 사귀는 사이였던가?”

세리아가 용사를 좋아했던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둘이 연인이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세리아의 일방적 짝사랑이었고, 용사는 간만 보다가 놓친 거다.

내가 한 짓은 도의적으로는 지탄 받을만한 행동이었지만, 바꿔 말하면 그거 말고는 별 문제없다는 소리다.

“뭐, 말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혹시 또 몰라? 충격 먹을 때 한 번 대주면 사귈 수 있을지도.”

세리아가 내 품에서 키득거렸다.

“세리아!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후후, 그렇게라도 안 하면 유니한테 뺏길걸? 아, 애초부터 유니가 봐줘서 성립된 관계였던가?”

“세리아…!”

아린 놀리기에 맛 들린 세리아와, 괜히 더 놀리고 싶어지게 반응하는 아린 사이에서 나는 홀로 제정신을 지키고 있었다.

“둘 다 그만하고 이 상황이나 어떻게 좀 해보자고.”

“네에!”

“…으읏.”

아린은 애정을 숨길 기미도 없는 세리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지만, 내 말이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으므로 얌전히 수긍했다.

“그래서 결국 이 남자가 그 개였단 말이지. 그럼 그대로 전해주면 끝 아니야.”

“그치만 주인님, 그럼 다들 충격 받지 않을까요?”

세리아가 내 가슴에 대고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그녀가 사소한 행동을 하나 할 때마다 아린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세리아는 키득거리며 그녀를 놀리듯 더욱 열심히 달라붙었다.

평소에는 어리광 못 부리게 막아두니까 이럴 때라도 더욱 달라붙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이미 방향이 이렇게 잡혀버린 이상 아린의 욕구에 부채질하는 수밖에 없으니 나도 이번에는 관대하게 넘어가줬다.

“…으읏, 그래도 그게 진실이니까 어쩔 수 없죠… 그리고 세리아, 제발 부탁이니 그렇게 붙어있지 좀 마요!”

“왜, 부러워?”

세리아의 말에 아린이 얼어붙었다.

“무, 무, 무슨 말을! 전혀! 아니에요!”

아린은 바들바들 떨면서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그렇게 열심히 부정하면 진짜 같잖아, 아린.

“푸흐흣… 하긴, 너한테는 주인님 말고도 남자가 많으니까.”

“…무슨 소리죠?”

세리아가 농담처럼 던진 말에 아린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남자라면 누구든지 상관없잖아?”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시는 거죠?”

“너, 남자들이 네 알몸 보면 흥분하잖아.”

“……흣.”

아린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기분 좋았지, ‘에리’?”

물론 아린과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세리아도 전부 다 안다.

내가 말해줬으니까.

어차피 머리는 나보다 세리아가 더 똑똑하니까, 나는 그녀에게서도 조언을 받곤 했다.

세리아는 이미 내 것.

그렇다면 세리아의 지능도 이제는 내 지능이나 다름없다.

아무 말도 못하는 아린을 내버려두고 세리아는 다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주인님,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요.”

세리아는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린한테 목줄을 채워서 마을로 데려가죠.”

“…뭐라고?”

얘도 날이 갈수록 점점 무섭게 변하는 것 같다.

순수한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발상을 저렇게 태연하게 늘어놓다니!

“어차피 쟤 저런 거 좋아하잖아요. 노출, 피학 뭐 이런 거요. 환영 마법 걸어서 개라고 속이면 될 거 같은데….”

“아니, 뭐 하러 굳이 그렇게까지?”

뭐, 설득이 가능한가는 둘째 치고 그야 할 수는 있겠지.

그렇지만 굳이 여기서 그런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재밌잖아요.”

악동처럼 짓궂은 미소를 짓는 세리아.

그래, 이유는 원래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나는 뭐 언제 투철한 사명감으로 세리아를 따먹었나?

원래 삶은 내 꼴리는 대로 사는 것이다.

“…두,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죠?”

우리 둘의 시선이 불길했는지 아린이 살짝 겁먹은 태도로 물었다.

세리아는 말없이 내 가슴에서 벗어나 아린에게 다가갔다.

“뭐, 뭐죠? 거기서 말하세요! 오지 마요! 이 벼, 변태…!”

아린은 여전히 오해가 안 풀렸는지 자기 가슴을 가리며 뒷걸음질 쳤다.

“변태는 너잖아, 아린. 세상에 알몸 보여주고 흥분하는 변태가 또 어디 있어?”

“으, 으읏….”

바들바들 떠는 아린 앞에서 세리아는 마치 맹수가 먹잇감을 갖고 노는 것처럼 그녀 몸 곳곳을 둘러보았다.

“으음… 좀 작긴 한데, 그 정돈 착각이라고 우기면 어떻게든 될 거 같고….”

“무, 무슨 생각이죠?”

무슨 물건 고르듯 꼼꼼하게 자신을 살피는 세리아의 모습에 아린은 불안해진 것 같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우리가 할 짓은 그녀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일이 될 것이다.

“아린, 너 개 해볼래?”

“……네?”

세리아는 용사와 마을 주민들을 속이러 자리를 뜨고, 현장에는 나와 아린만 남았다.

원래라면 반쯤 녹아내린 시체도 포함해야겠지만,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체는 온데간데없고 그 흔적만 미세하게 남아있었다.

뼈까지 다 녹아버린 건가.

굳이 현장에 손을 대보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나에게 아린을 설득하는 역할을 맡겼다.

어떻게 보면 노예 주제에 건방지게 주인을 부려먹는 것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이건 그녀가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다.

아린에게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될 계기. 그것이 주인인 내 주도하에 돌아가도록 만든 것이다.

이는 보다 더 확실한 주종관계를 주입시키는데 도움이 되리라.

아린이 노예가 되더라도, 내가 아닌 세리아의 노예가 되면 상황이 좀 그렇지 않겠는가.

물론 세리아가 이미 내 노예이기에 딱히 큰 문제는 없으나, 이건 기분의 문제다.

세리아는 그 점을 용케도 눈치 채고 주제넘게 나서지 않는 것을 택한 것이다.

…물론 정말 귀찮아서 떠넘긴 걸 수도 있지만.

난 우리 충실한 세리아를 믿고 있다.

“저, 저한테 설교까지 하시고선… 당신도 남 말 할 처지가 아니잖아요…!”

아린은 진심으로 내가 교화됐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내가 여전히 쓰레기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자지에 건 저주도 풀었다고 알려주면 기절까지 하겠네.

“그건 애초에 신관님이 잘못한 거지. 안 그래?”

“당신이 그런 말 할 자격… 으읏….”

아린은 반박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그녀를 속였든 말든 아무튼 아린이 먼저 문제소지가 될 행동은 한 것은 맞으니까.

서로 물어뜯기만 해서는 이득이 안 된다는 걸 빠르게 깨달은 것이다.

“아, 아무튼… 전 죽어도 그럴 생각 없으니….”

그녀의 반응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세상 어느 누가 발가벗고 개처럼 다니라는 말을 듣고 바로 고개를 끄덕이겠는가.

하지만 아린이라면 하지 않을까?

“기분 좋을 텐데.”

“…지금 그걸로 설득하시는 건가요?”

아린이 황당하단 얼굴을 했다.

나는 아랑곳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개처럼 기는 너를 사람들은 인간 취급하지도 않겠지. 재롱을 부려보라고 말하면 재롱부리고, 핥으라면 신발까지도 핥아야 할 거야.”

“…누, 누가 그런 걸 좋아하나요.”

“내 허리띠로 목줄도 만들어줄 수 있어.”

“그, 그런 작은 걸로 무슨….”

아린이 중얼거렸다.

음, 반응이 오는가?

“아세일라에서는 그렇게나 솔직하더니, 그 솔직한 마음은 어디에 두고 오셨나?”

“그… 그런 적 없어요! 게다가, 아세일라는, 도시 자체부터가 그런 곳이니….”

변명을 늘어놓으며 시선을 피하는 아린.

자세히 보니 발가락이 꼼지락거리는 것 같다. 신발 때문에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여기나 거기나 다를 게 뭐가 있다고? 그 땐 신관님이 신관님이 아니기라도 했나?”

“…그, 그 때는 저도 그 분위기에 오염돼서….”

나는 일부러 큰 소리로 웃었다.

아린은 자기 말이 잘리자 살짝 나를 노려봤으나, 진심이 실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분이 왜 속옷은 안 입고 있지?”

“그… 그냥… 답답해서….”

“그럴 거면 그냥 답답한 옷까지 아예 다 벗어버리지?”

“그, 그건 그냥 변태잖아요!”

속옷 안 입고 은근슬쩍 티내는 것도 충분히 변탠데.

그녀의 머릿속 기준은 아무래도 우리와 조금 다른 것 같다.

하긴 변태 머릿속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나.

나는 가만히 아린을 지켜봤다.

그녀는 안절부절 거리며 가만히 서있질 못했다.

한쪽 발로 애꿎은 바닥만 긁고 있거나, 손가락을 괜히 꼼지락거리거나, 몸을 괜히 이리저리 조금씩 비틀거나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 했다.

“갔다 오면 체벌도 필요하겠군.”

“체벌을 무슨 포상 주듯….”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지만, 이 말을 뱉은 순간 그녀의 신경이 곧장 나에게 향하는 것을 숨기지는 못했다.

나는 회초리가 되어버린 나의 옛 스태프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

아린의 시선이 내 회초리에 꽂힌다.

“엎드려.”

움찔.

아린의 몸이 순간 앞으로 쏠릴 뻔 하다 말았다.

“…읏.”

“크흐흐.”

내 웃음에 아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자기도 믿기지 않는지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잘 생각해봐. 그 남자는 어차피 흔적도 안 남았어. 우리가 말한들 믿어주기는 할까?”

“…….”

“그럴 바에는 그냥 그들의 걱정을 덜어주고 사건을 마무리하는 게 제일 좋지.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니까 좋고, 죽은 그 남자는 명예도 지키고. 모두가 행복한 결말 아닌가?”

“제, 제가 안 행복하잖아요…!”

아린이 소리쳤다.

아니, 그야 보통은 그렇겠지만 아린에 한해서는 예외다.

지금은 필사적으로 부정하지만 그녀도 개 역할을 맡으면 좋아하지 않겠는가.

그 증거로 그녀의 눈동자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정말로?”

“……”

“아린. 난 몇 번이고 네 본성을 봤어.”

신관님 대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린은 움찔하면서도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약속은 아직도 유효해. 난 너에게 손 하나 까닥하지 않을 거야.”

“…세리아를 시킬 셈인가요?”

“세리아도 손 못 대게 해주지.”

“…….”

아린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은 거의 다 넘어온 것 같은데, 아직 명분이 없으니 차마 응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이러면 명분을 쥐어줘야지.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거짓말로요?”

“잘못되진 않았지. 더 이상 그 개가 마을 사람들을 덮칠 일은 없잖아?”

“그래도, 그건….”

아린은 우물쭈물 거리며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용기를 내지 못하고 계속 망설이는 그녀의 태도에 나는 슬슬 짜증이 나 툭 뱉었다.

“거 참, 고민도 많군. 무슨 문제 생기면 내가 억지로 시켰다고 해.”

“그건….”

“알겠어? 나는 너한테 지금 협박하고 있는 거야. 내 마수에 걸린 세리아를 걸고 말이지. 넌 친구이자 동료인 세리아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내 말에 따르는 거고. 알겠나?”

“……제가 개처럼 굴면 세리아를 풀어주는 거구요?”

“그런 셈이지.”

아린은 잠시 망설이더니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을 쥐었다.

어느새 돌아온 세리아는 나를 보며 소리 없이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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