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짐꾼-101화 (101/236)

〈 101화 〉 [용사] 탈출

7일째 아침이 되었다.

세라의 말에 따르면 루엘라가 도시 바깥으로 나가는 날.

드디어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마음에 두근거려 아침 일찍 일어났다.

제렌 씨는 아직 자고 있긴 했지만, 나머지는 다들 1층에 내려와 있었다.

세라 말로는 본인이 찾아온다고 했으니, 오늘은 어디 나가지 말고 여기 모여있는 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해 다들 가만히 앉아있었지만 하나 같이 긴장한 표정이었다.

“에릭, 잘 잤어?”

계단을 내려오는 내 모습을 가장 먼저 발견한 유니가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안녕.”

세리아가 나를 보며 살며시 미소지었다.

그 요염한 미소에 살짝 두근거렸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린은?

옆에 앉은 아린을 바라보니 그녀 또한 나를 바라보다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왜 그래 아린?”

“아, 아뇨, 그냥… 그, 조, 좋은 아침이에요 용사님….”

유니가 묻자 그제야 아린은 당황한 기색으로 나에게 간신히 인사를 건넸다.

“응, 아린도 안녕.”

그런데 어딘가 아린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뭘까?

옷도 그대로고, 평소와 달라진 점은 딱히 없는 것 같은데.

내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자 아린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였다.

아, 그렇구나.

아린의 머리카락이 조금 푸석푸석했다.

언제봐도 항상 매끈하던 그녀의 머릿결이 오늘은 유독 관리가 덜 되어있는 것 같다.

나름 아린과도 오랫동안 함께했지만 처음 보는 모습이다.

역시 어제 일과 관련이 있는 걸까?

살짝 마음 속에 돌덩이가 얹힌 듯 불편했다.

“제렌 씨는 아직 안 일어났어?”

세리아가 위층을 바라보며 물었다.

“응, 어차피 언제 올 지도 모르는데 굳이 깨울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그럼 이제 깨우셔야겠네요.”

나는 화들짝 놀라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숙소의 뒷문을 통해 어느샌가 세라가 들어와 있었다.

“여러분, 너무 무방비하신 거 아니에요? 제가 딴 마음을 먹고 있었다면 다 죽었을 거라구요.”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보통 이런 경계는 유니의 정령들이 하던 일이었는데, 도시에 정령이 하나도 없다보니 미처 거끼까지 신경을 못 썼다.

도시 내에 딱히 다른 위협이 있지도 않았고.

그래도 그녀의 말대로 주의가 부족했던 건 사실이다.

이걸 설마 적에게 지적받는 입장이 되다니.

부끄러워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앗, 미안 에릭… 내가 잘 했어야 하는데.”

유니가 자기 잘못이라는 듯 나에게 사과했다.

아니, 그녀 잘못은 아니다.

도시 내에 정령이 없는 게 어떻게 그녀 잘못이란 말인가?

오히려 잘못은 그런 점을 고려하지 못한 나에게 있었다.

물론 유니도 말을 해줬더라면 무슨 조치를 취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와서 그녀의 잘못으로 떠넘기고 싶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유니는 왜 말을 안 해줬지?

아니, 애초에 최근 유니와 별로 마주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단련을 그만두고 난 뒤로는 딱히 유니와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것 같다.

음, 조금 미안해지는 걸.

“그보다 에릭, 이 여자 믿어도 되는 거야?”

세리아는 세라가 마음에 안 드는지 팔짱을 끼고 그녀를 살짝 노려봤다.

“후후, 못 믿으면 어떻게 하시려구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녀에게 뭐라 불평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녀의 이 이유 모를 호의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탈출할 기회도 잡지 못했을 테니까.

“자세한 얘기는 가면서 할까요? 곤히 잠든 동료 분도 깨우고 오세요.”

“내가 갈게.”

세라의 말이 끝나자 세리아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냐, 내가 할게. 앉아서 쉬고 있어.”

그 모습을 본 나는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어 그녀를 말렸다.

신경 안 쓰려고 했는데, 어제 이후로 자꾸 그녀와 제렌 씨와의 관계가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이미 마음 속에 묻어둔지 오래였지만 하필이면 아린을 보며 다시 그 문제가 떠오르게 된 것이다.

누가 보면 추하다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내가 봐도 그렇게 보이니까.

그렇지만 그녀들이 처음부터 오해가 생길 여지도 없게 행동했더라면 내가 이럴 일도…….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책임을 그녀들에게 전가할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나는 엉뚱한 생각을 털어내고 그를 깨우러 올라갔다.

계단을 다시 올라가다 세라와 눈이 마주쳤는데,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렌 씨를 깨우고 우린 간만에 다 같이 거리를 걸었다.

그동안은 그녀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모여있지 못했는데, 이러고 있으니 간만에 우리 파티가 재집결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물론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 껴있었지만.

“이러고 있으니 저도 용사 파티 같지 않아요?”

세라는 아까부터 방긋방긋 웃으며 유니에게 말을 붙이고 있었다.

왜 하필 유니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유니는 그녀의 대응에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 그러게요….”

“후후, 저도 신관 역할 잘 할 수 있는데… 어때요, 용사님?”

“무, 무슨 소리에요!”

그녀가 농담삼아 나에게 슬쩍 말을 건네가 아린이 발끈했다.

“그치만, 제가 당신보다 더 할 줄 아는게 많은데요?”

“으읏… 저, 저도 곧….”

아린은 뭐라고 더 말하다가 우물거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열심히 연습하세요. 당신이라면 금방 쓸 수 있을 테니까요.”

그녀가 아린에게 뭔가 가르쳐준 걸까?

왜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지?

무언가 의도가 있어보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아, 슬슬 성문이 보이네요.”

그녀의 말대로 길 저 편에 성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곳을 넘어가기만 하면 아세일라의 밖이다.

정말 이렇게 간단하게 탈출할 수 있다고?

싸우거나 그런 일 없이 쉽게 나가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동안 고생했던 건 대체 뭐였을까 싶어 허탈하기도 했다.

“제가 했던 말 기억하시나요?”

어느샌가 유니 대신 내 쪽으로 다가온 그녀가 은근하게 물었다.

“…그, 엘프들의 숲 얘기 말인가요?”

“후후, 기억하고 계시다니 다행이에요.”

이게 그녀의 목적인 걸까.

우리를 그 곳으로 유인하는 것?

“우리는 여기 나가자마자 교회랑 왕궁에 연락할 거야. 그래도 괜찮은 거지?”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세라를 노려보던 세리아가 툭 던졌다.

이걸 말해도 되나?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세라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이제 이 도시의 역할도 거의 다 끝났으니까요.”

“…이미 늦었다는 거야?”

“여기가 남아있든 말든 의미가 없다는 거죠.”

세리아가 그녀를 노려보자 세라도 태연하게 그녀의 시선을 받아넘겼다.

“…후후, 자존심 강한 건 루엘라랑 똑같네요.”

“누, 누가 그런 년이랑…!”

세리아는 그녀의 이름을 듣자 분개하며 이를 갈았다.

년이라니, 그만큼 루엘라가 미운 걸까.

하긴, 믿고 의지하던 교수가 사실 적이었다면 나라도 미울 것 같기는 하다.

그렇게 투닥거리다보니 어느새 성문 앞까지 도착했다.

경비병들이 우리를 알아보고 뭔가 조치를 취하려고 했지만, 세라가 손짓하자 멍한 표정으로 비켜서는게 조금 무서울 지경이었다.

“…축복으로 이런 것도 가능하다니.”

아린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믿기지 않는 건 그 말을 들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그 축복이라고?

아린이 우리에게 걸어주던 그것과 똑같은 축복?

아무리 봐도 축복이라기보단 정신조작에 가까워보인다.

과연 우리가 그녀와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이길 수 있을까?

“자, 이제 정말 끝이네요. 그동안 재밌었어요. 안녕히 가시길.”

세라는 담백하게 말을 마치고는 공손하게 인사했다.

무슨 자세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굉장히 예의바른 동작이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건….”

아린은 그 동작을 알아본 것 같았다.

나중에 물어봐야지.

우리는 서로를 잠시 바라보고는 성문 앞으로 다가갔다.

이렇게나 간단하게 밖으로 나오다니,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지금 당장이라도, 성벽 옆에서 루엘라가 나오지는 않을까…

“그럼 그렇지. 세라, 이 배신자 년.”

…그래, 이렇게 말이야.

“루엘라…!”

속였구나 싶어서 뒤를 홱 돌아보니 세라도 그녀의 등장에 당황한 눈치였다.

“당신이 용사 일행이랑 속닥거리는 걸 제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요?”

“루엘라, 당신이 저한테 거짓말을…?”

“속인 건 당신이 먼저죠.”

둘 사이에 불안한 기류가 느껴졌다.

우리는 그 사이에 낀 채 열심히 눈치만 봤다.

“어, 어쩌지?”

“…일단 상황을 좀 보자.”

유니의 물음에 세리아가 대신 대답했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일이 잘 풀릴 리가 없는데.

“오해하고 있는 거 같은데, 전 마왕님을 배신하지 않았어요.”

“적이 탈출하도록 도와주는 게 그 분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할 셈인가요?”

루엘라가 인상을 쓰자 세라의 표정도 점점 험악해졌다.

그런데 이거, 뭐랄까….

사천왕이 싸운다기보다는 그냥 여자 둘이서 싸우는 느낌이다.

물론 실제로 저 둘이 붙으면 그 정도로 그치진 않겠지만.

“당신이 너무 단순하게 해석하는 거 아닌가요? 마왕님이 무슨 생각으로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상식적으로 생각하세요, 세라.”

“상식? 루엘라 당신이 제멋대로 해석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제3자가 된 심정으로 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얌전히 서있었다.

일망타진을 노리지는 못할망정 얌전히 이 상황을 넘기려고만 하다니, 별로 용사다운 모습은 아니었다.

“용사, 그리고 그 일행.”

“…네, 네.”

갑자기 우리한테 시선이 꽂히기에 나도 모르게 얌전히 대답해버렸다.

이러니 마치 우리가 힘싸움에서 밀린 것 같다.

실제로도 그렇지만….

“엘프들의 숲으로 가세요. 그리고 ‘잠든 공주’를 찾아요.”

세라는 여전히 루엘라를 바라본 채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잠든 공주? 그게 뭐지?

파티원들을 돌아봤지만 다들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적어도 우리 중엔 아는 사람이 없군.

“…당신, 설마 아직도….”

세라의 말에 반응한 건 오히려 루엘라 쪽이었다.

갑자기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위압적인 분위기가 사라졌다.

“아직도 포기 못했군요.”

“…….”

루엘라가 아까보다 한결 부드러운 말을 하며 세라를 바라봤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세라의 얼굴은 어딘가 슬퍼보였다.

“하아….”

이제는 루엘라도 복잡한 얼굴로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뭔데? 대체 무슨 상황이지?

“그녀가 다시 깨어나는 걸 그 분이 바라지는 않으실텐데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 시간은 가장 강력한 마법이잖아요?”

세라가 싱긋 웃었다.

루엘라는 가만히 세라를 바라보다 우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 뭐야….”

“이들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고요?”

루엘라는 마치 나쁜 짓을 한 아이를 바라보는 듯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나쁜 건 저 쪽일텐데, 왠지 우리가 나쁜 놈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제가 같이 다닌 거 아니겠어요? 저는 저 어린 용사를 믿어요.”

적한테서 이런 소리를 듣다니.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

“…흥. 멍청한 년.”

루엘라는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팔짱을 꼈지만, 그건 이 상황에서 우리를 공격하지는 않겠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자, 가세요. 그리고 제가 했던 말을 기억해주시면 좋겠어요.”

“정말 기억만 하지는 말고.”

세라가 나긋나긋하게 말하자 루엘라가 우리를 찌릿 노려보며 덧붙였다.

나는 잠시 우리 파티원을 돌아봤다.

각자 생각하는 건 달라보였지만, 하나 같이 다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길래 나도 끄덕여줬다.

“…알겠습니다.”

우리는 세라의 배웅과 루엘라의 압박을 받으며 도시 밖으로 나왔다.

그저 성문을 지났을 뿐인데 벌써부터 시원한 바람이 불어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정말 나온 거 맞지? 그렇지?”

유니가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바람 사이로 사람 형체가 지나다니는 걸로 보아 유니가 불러낸 바람의 정령인 듯 싶었다.

“휴우… 다행이다. 정령들도 그대로야.”

유니의 표정이 이 중에서 제일 밝았다.

이 도시 안에서는 그녀의 힘이 전부 봉인된 것과 다름 없었으니까 우리와는 다른 안도감을 느꼈겠지.

그렇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는 모두 저 도시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것을 기뻐했다.

“이제 어쩌지?”

“일단 저 도시의 진상부터 알려야지.”

내 질문에 세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일단 마을이든 도시든 가장 가까운 곳에 가자. 거기서 편지를 쓰고, 다음 목적지를 정해야지.”

“어? 그 숲으로 가는 거 아니었어?”

유니가 갸웃하자 세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누가 봐도 수상한 곳이잖아. 우리가 미쳤다고 거길 제발로 찾아가겠어?”

“…….”

음, 역시 그런가….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녀의 말이 맞겠다.

그렇지만 사실 내 마음은 어느정도 그 숲으로 기울어져있는 상태였다.

왜냐고 물으면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왠지 그러고 싶었다.

세라에게서 인간성을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

아무튼 지금 당장은 아무도 반기지 않을 것 같으니, 우선은 세리아의 말대로 하자.

나는 우리 모두가 동의한 것을 확인하고, 다음 목적지를 가장 가까운 마을로 잡았다.

걸어서 이틀 정도인가.

“그럼 출발하자.”

그렇게 우리 파티는 다음 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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