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 [짐꾼] 사람 많은 밤길
예상대로 용사는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린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긴 했지만, 내가 눈치를 주자 알아서 티 안 내고 조용히 있었다.
“이봐! 구경 났어? 빨리 꺼지지 그래?”
나는 그와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후, 다시 허리띠를 손에 쥐었다.
“윽….”
용사는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하다 결국 도망가는 것을 택했다.
그래도 나는 그가 확실히 사라질 때까지 몇 번 더 엉덩이를 때려주었다.
짜악! 짜악!
“하읏! …흐읏!”
그리고, 그녀도 꽤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읏, 흐으읏…. 어, 엉덩이가 따가워요.”
아린이 슬쩍 자기 엉덩이를 손으로 문질렀다.
“음… 뭐, 긴급상황이었으니까.”
“당신은 급하다고 여자 엉덩이를 때리나요?”
내민 건 너잖아.
한 소리 하려다가 내가 불리한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시킨 것 맞구나.
“으읏…. 요, 용사님이 눈치라도 채시면….”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가던데?”
“용사님….”
아린은 살짝 침울한 표정이었다.
하긴, 자기를 못 알아보고 갔다는데 아무리 마법이라도 살짝 아쉬울만하지.
“뭐, 환상마법을 쓴 상태였으니 몰라보는 게 당연하지.”
그렇게 말하며 나는 슬쩍 아린을 바라보았다.
눈치… 못 챘지?
아린은 아쉬운 듯 계속 골목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눈치 못 챈 모양이다.
아까 다급한 상황에 은근슬쩍 그녀에게 말을 놓으며 명령투로 얘기했는데, 아직도 그러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모양이다.
“자, 더 늦기 전에 들어가야지.”
“…그렇네요.”
그렇게 우리는 다시 골목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까 손 댄 건 급한 상황이었으니….”
“네, 이해해요. 그보다 그 약속, 생각보다 잘 시키시네요?”
아린은 의외라는 듯 나를 돌아봤다.
크크, 당연하지.
지금이야 내 손아귀에서 자길 보호해주는 보호막처럼 느껴지겠지만, 나중가면 그게 제약이 될 걸?
“뭐, 원래 약속은 깨지 않는 성격이라.”
“푸흣… 앗, 죄송해요. 비웃으려던 게 아닌데….”
아린이 건방지게 내 말을 듣고 웃었지만, 분위기가 많이 좋아진 것 같아 그대로 내버려뒀다.
세리아 때도 그랬지만 어느정도 적절한 분위기 이완은 중요한 법.
너무 몰아세우기만 해서는 오히려 반감만 살 뿐이다.
“그나저나 조용하네요. 오히려 밤이 더 시끄러울 줄 알았는데….”
“잘 놈들은 벌써 집에서 자고 있을 테고, 섹스할 놈들은 이미 가게에 가있을테니.”
내 말에 그녀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아직도 섹스란 말이 어색한가?
“섹스가 부끄럽나?”
“읏… 그, 그렇지 않아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고개를 홱 돌린 걸 보면 속마음은 안 봐도 뻔했다.
“섹스.”
“…….”
“섹스자지보지.”
“하, 하지마요!”
결국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그녀가 소리쳤다.
눈을 꼭 감고 바들바들 떠는게 귀여워서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거참, 이런 말도 못 견디다니 어지간히 답답하게 살아오셨네. 이러니 그런 이상한 취향이 생기지.”
“네? 무슨 소리죠?”
그녀가 처음 듣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음, 사실 그냥 생각난 대로 말해본 건데.
생각보다 진지한 반응이 돌아와서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뭐, 보아하니 상당히 갑갑한 환경 속에서 살아온 거 같은데, 그 엄격한 생활에 지쳐서 오히려이런 일탈 행위에 흥분을 느끼는 건 아닐까 하는….”
“그, 그렇군요.”
맞는 말인가?
몰라, 그냥 지껄이는 건데 내가 어떻게 알아.
그렇지만 적어도 아린 입장에서는 그럴싸하게 들린 모양이었다.
“어릴 때는 갑갑해서 도망치고 싶다고도 생각했었죠. …극복한 줄 알았는데, 사실 아니었던 거군요.”
아린은 그렇게 말하며 자기 목걸이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워낙 목까지 조이는 갑갑한 복장이라 몰랐는데 목걸이를 항상 차고다녔나 보다.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 안에서 자랐어요. 교회에서 거둔 고아들이 다 그랬지만요. 경전을 못 외우면 때리고… 설교도 재미없고… 어릴 땐 정말 싫었죠.”
처음 듣는 그녀의 얘기다.
나는 직감적으로 용사도 이 얘기는 모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헤일이랑 같이 몰래 밖으로 빠져나가기도 했어요. 이 친구는 그 때 엉뚱한 책을 읽고 이상한 길로 빠져버렸지만… 후후.”
헤일이 누군데?
보아하니 자기 친구 같다.
나한테 말한다기보다는 그냥 혼잣말이군.
“아… 제가 너무 혼잣말이 많았네요.”
“아냐, 재밌던데. 그런 과거가 있을 줄은 몰랐어.”
아린은 자기가 부끄러운 얘기를 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화끈거리는 얼굴을 애써 감추려 했다.
“이, 잊어주세요.”
“흐흐… 그건 좀 어려울 거 같은데.”
아린이 째릿 노려봤다.
진심으로 노려보는 것 같진 않아 씩 웃어줬다.
“후우… 용사님….”
한창 분위기 좋나 싶더니 이 년이 또 용사를 들먹이고 오는군.
“후회되나?”
“…제 잘못이니까요. 남을 원망하거나 하진 않아요.”
조금은 하는 것 같은데.
나를 원망하는 마음이 약간은 있으니 애써 없애고 싶어하는 것 아닌가?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게 보였다.
그렇지만 결국 거부하지 않은 건 그녀니까.
아린도 그 점을 아니까 별 말 하지 않은 것이겠지.
“이 도시에서 너무 많은 일이 있었네요. 정말이지… 어쩌다 이런 꼴이….”
“그건 당신의 본성이 처음부터 그랬기 때문이랍니다, 신관 아가씨.”
우리 뒤편에서 다른 사람이 아린의 말을 받아쳤다.
“루, 루엘라!”
아린이 당황하며 뒷걸음질쳤다.
뭐야, 시발. 이 년은 또 왜 여깄어.
자꾸 뜬금없는 사람들하고만 마주치는데?
“후후, 이 조합은 뭐죠? 당신은 용사를 좋아하는게 아니던가요?”
“읏… 이, 이건….”
“대답할 필요 없어.”
초 치지마 미친년아!
나는 아린을 내 뒤에 숨기고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어머, 누가 보면 용산줄 알겠어요.”
“…무슨 볼일이야?”
루엘라. 세라도 그렇지만 이년도 이해가 안 가는 년인 건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나한테 호의적으로 굴지 않았나?
뭐 지금도 딱히 적대적인 것 같진 않지만, 그녀에게서는 위험한 분위기가 났다.
언제든지 죽여버릴 수 있다는 그런 무언의 협박. 그런 게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아뇨, 그냥 우연이에요. 마침 익숙한 얼굴 둘이 지나가길래….”
그녀는 자기 입술을 매만지며 우리 둘을 바라보았다.
저, 저 눈길 그윽한 것 봐라!
날 꼬실 생각인가?
“죽일 생각은 정말 없었는데… 생각이 좀 바뀌려하네요.”
내가 스태프를 치켜들고 그녀를 겨누자 루엘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차피 용사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마왕님의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데… 차라리 그냥 전부 죽여버리면….”
루엘라가 섬뜩한 소리를 중얼거린다.
시발, 당사자 앞에서 죽일까 말까 고민하지 말라고!
슬쩍 아린을 바라보니 그녀는 양 손을 꼭 맞잡은 채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후, 별 도움은 못 되겠네.
“음… 그 뭐냐, 우연히 마주쳤으니까 그냥 서로 못 본 걸로 하는게 어떨까?”
“제가 왜요?”
음… 그러게.
시발, 어쩌지.
여기서 죽일거면 그 때 왜 도와줬는데!
생각해보니 황당하다.
그 땐 자기 의지가 아니었고 지금은 자기 의지인 건가?
방금 말하는 걸 보니 왠지 그런 거 같기도 한데.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뒤지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제발 머리야 나 좀 도와줘…!
그런데 의외로 날 도와준 건 머리가 아니었다.
“어머, 세 분이서 뭐하세요?”
“…세라.”
루엘라는 자기 말고 다른 이의 침입에 기분이 상한 듯 했다.
“루엘라, 제가 방금 여기 오면서 이상한 말 들었는데 알아요?”
“닥치세요.”
“누가 막 마왕님이 하신 말 따윈 개나 줘버리라면서 그냥 다들 죽여버리겠다고….”
“세라!”
루엘라가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당신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에요? 왜 자꾸 적에게 쓸데 없는 말까지 나불거리죠?”
“이번에 나불거린 건 루엘라 당신이 아니던가요?”
세라의 반격에 잠시 루엘라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 표정 뭔지 알 것 같다.
본 적은 없지만 마치 유니에게 말싸움에서 진 세리아가 지을 법한 표정이다!
“…당신 대체 누구 편이에요?”
“저야 당연히 우리의 주인이신 마왕님의 편이죠.”
루엘라를 바라보며 생긋 웃는 세라.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다소 인위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을 말리려는 거 아니겠어요? 루엘라, 설마 마왕님의 명을 거역하려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루엘라는 불만스럽다는 듯 팔짱을 꼈다.
“저, 저기…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일까요?”
“…저도 모르겠는데요.”
당황스러워서 말투도 그만 이전처럼 돌아와버렸다.
나와 아린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채 머리만 열심히 굴렸다.
우리 둘이 소곤거리는 모습을 루엘라는 굉장히 마음에 안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더 이상 우리에게 위협을 가한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후후, 두 분 다 험한 꼴을 겪었네요. 방금은 루엘라의 장난이라 여겨고 이만 돌아가주시겠어요?”
곱게 말은 하지만 결국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만 꺼지란 소리다.
“아참, 이 일은 두 분 만의 비밀로 해주세요. 아, 네 명이니까 넷 만의 비밀인가요? 네 명이면 조금 많네요. 후후.”
세라는 장난스럽게 손가락 하나를 입술 위에 세우고 윙크했다.
솔직히 무슨 사정이 얽혀있는 것 같긴 한데, 깊게 파고들고 싶진 않다.
더 파고들었다가는 정말로 목숨이 날아갈 것 같잖아.
대충 말하는 걸 보아하니 마왕이 우릴 죽이지 말라고 명령한 것 같은데, 루엘라는 그걸 생까고 우릴 죽이려 했던 것 같다.
이 파티의 목적이 마왕을 죽이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우리를 죽이려는 루엘라의 판단이 더 정상적으로 보이기는 하다만….
“이만 가죠.”
“네? 아, 네….”
아린도 눈치껏 여기선 발을 빼기로 결정한 듯 싶다.
괜히 막 용사님께 도움이 되겠다며 설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후후, 그럼 다음에 봐요.”
“…당신은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군요.”
우리 뒤로 그녀들이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가장 먼저… 배신….”
“…음마는 당신이….”
어렴풋이 들려 둘이 하는 말을 해석하기는 무리였다.
“…왜 그녀는 저희를 도와주는 걸까요?”
어느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아린이 뒤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으음…. 그건 저도 모르겠군요.”
“혹시 내분이라던가….”
사천왕끼리도 세력이 갈리는 건가?
끽해봐야 네 명 아닌가 싶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최고 대가리인 마왕 밑에 비슷한 권한을 가진 놈만 넷이란 소리다.
음, 서로 치고박고 싸울만 하군.
그것만으로는 아직 완벽한 설명이 되지 않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 정도 발상이 한계였다.
“그보다 세라가 이 일은 다물라고 했었죠.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용사님한테도 말씀드리고 싶지만, 그녀가 살려준 목숨이나 다름없으니 여기선 그녀 말에 따르죠.”
이렇게 우리는 이 일을 불문에 부치기로 했다.
끼익.
마침내 도착한 숙소에는 밤 늦게 우리를 기다리는 용사의 모습이 있었다.
“늦게 들어왔네, 아린.”
용사는 그다지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린은 노골적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거 죄송합니다, 용사님. 사실….”
“제렌 씨.”
용사는 어쩐 일인지 내 말을 자르고 자기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계속 아린과 있으셨습니까?”
으음, 이 분위기 익숙한데.
한창 세리아 조교할 때 느꼈던 그 분위기다.
또 나를 의심하려는 건가.
아린의 상태를 보니 아무 말도 못할 것 같고, 내가 열심히 변명을 해야….
쿵쿵!
“와아, 아린! 드디어 돌아왔구나! 어디 갔다 이제 온 거야. 기다리고 있었잖아.”
“유, 유니….”
우리의 말소리를 들었는지 유니가 1층으로 내려와 아린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앗, 에릭도 깨어있었네? 다들 이 늦은 시간에 뭐하는 거야?”
“아, 그냥, 별 건 아니고….”
용사는 당황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나 아린 데리고 갈게? 세리아가 아린이 없으니 쓸쓸하다잖아! 빨리 와!”
…별로 쓸쓸해할 것 같진 않은데.
아무튼 유니는 막무가내로 아린을 끌고 방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저희도 이만 잠이나 자러 갈까요?”
“그, 그러죠….”
용사도 이 상황에서 다시 캐묻는 건 무리다 싶었는지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뜬금없이 유니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흐지부지 됐네.
예상치 못한 등장이었지만 나한테 도움이 되는 쪽이라 다행이다.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