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용사] 마지막 일주일
그녀는 아린이 아니라 아린을 무척이나 닮은 사람.
그러니까 나를 보고 놀랄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하하! 여러분의 반응에 놀란 것 같군요! 우리 귀여운 여왕님께 다시 한 번 환호를 보내드립시다!”
“와아아!”
“에리! 에리!”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부정할 여지가 없는 사실.
에리는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곧 고개를 돌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녀는 더 이상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의 옆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린.
누가 봐도 아린의 얼굴이었다.
이윽고 음악이 흐르기 시작한다.
음색에 꿀이라도 바른 듯 달콤하게 늘어지는 음악 소리.
음악에 맞춰 그녀의 팔이 천천히 올라간다.
짤랑짤랑.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장신구들이 비명을 지른다.
저 손가락도, 저 팔도, 전부 익숙한 것이다.
허리를 숙인 그녀의 자그마한 가슴골도, 살짝 벌린 그녀의 허벅지도 왠지모르게 낯이 익다.
에리는 모르는 남자들 앞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자기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리 사이가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벌어지고,
자기 몸의 모든 부위를 더러운 남자들에게 그대로 노출시킨다.
나는 그런 그녀의 공연을 내 두 눈에 하나도 빠짐없이 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린이 아니다.
아린은 이렇게 천박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천박한 여자가 신관일 리가 없다.
둘을 동일시하는 건 이건 아린에 대한 모독이자 세상 모든 신관들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아니, 그러길 바랬지만 내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아무리 부정해도 그녀의 천박한 낯섦에는 약간의 익숙함이 섞여들어가 있었다.
저 눈빛,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저 손놀림도 어디선가 본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나는 발기하고 말았다.
낯선 여자의 매혹적인 유혹에 끌린 것인지, 그녀 사이에서 보이는 익숙함에 반응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확실히 흥분하고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
당장이라도 뛰어 올라가고 싶다.
그리고 모두에게 알리고 싶다.
이 여자는 내 여자라고.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추하다.
대체 이게 무슨 욕심인가.
그녀가 아린인지 아닌지를 떠나 여자를 난폭하게 다루는 상상을 하다니, 나답지 않았다.
그렇지만 저 남자들이 내 소중한 동료를 그런 추잡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버틸 수가 없었다.
아니지.
그녀는 아린이 아니잖아.
자꾸 헷갈리지 말자.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입술에 피가 나도록 꽉 깨물어야만 했다.
에리의 공연은 잠깐이었지만, 관객 모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가지마! 가지마!”
“돈은 얼마라도 낼 테니까, 제발 가지마!‘
공연이 끝나자 그들은 거의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며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자, 자, 진정하세요! 저도 눈물이 나올만큼 아쉽습니다! 세상에 이렇게나 재능이 넘치는 여자를 그냥 보내야하다니! 정말 마음만 같아서는 납치라도 하고 싶군요!”
나는 끓어오르는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손을 계속 쥐락펴락했다.
그녀는 아린이 아니니까, 그녀에게 흥분해도 괜찮다.
나쁜 상상을 해버렸지만 괜찮겠지.
얼굴이 후끈한 걸 보면 아마 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나가서 밤바람이라도 쐬면 조금 나아지겠지.
적어도 숙소에 돌아갈 때 즈음에는 원래대로 되돌아올 것이다.
…돌아갈까.
사실 지금이라도 그녀를 붙잡고 정체를 묻고 싶었지만, 그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민폐니까 참을 수밖에 없었다.
벌떡!
그 때 내 뒤에서 누군가가 일어나 소리쳤다.
“잠깐! 아직, 아직 그녀의 뒷자리는 남아있겠지! 내가 사겠네! 얼마면 되지?”
영주였다.
그는 뱃살을 출렁이며 사회자에게 소리쳤다.
…뒷자리? 그게 뭐지?
“…뭣! 그, 그러고보니…!”
관객들이 웅성거렸다.
뭐지? 대체 그게 뭐지?
“아, 아아… 뒷자리 말이군요…. 크흠, 대단히 죄송하지만 에리의 뒷자리는 이미 예약이 잡혀있습니다.”
“뭐라고! 대체 누가 이 나를 제치고 그런…!”
영주는 잠깐 이성을 잃을 뻔 했던 것 같지만 근처의 여자들이 말리자 곧 투덜거리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나는 그 뒷자리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불안한 기분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네, 여러분들도 궁금하신 모양이군요. 사실 이번에 한 고객 분께서 저희 ‘황금티켓’을 사용해 그녀를 우선예약했습니다! 이런, 다들 놀라셨나요? 그래도 역시 그녀에겐 그만한 가치가 있죠! 네, 그렇습니다!”
황금티켓? 이건 또 뭐야.
누가, 누가 나한테 설명 좀 해줘…!
“제길, 역시 돈을 아무리 갖다바쳐도 소용이 없군.”
“하긴. 그 년이랑 단 둘이 있을 수 있다는데 돈이 대수겠어? 그랬다간 도시 내의 모든 부자들이 단숨에 달려들텐데.”
뒤에서 소곤거리며 대화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단 둘.
그들의 말은 굉장히 의미심장했다.
“그보다 정말 황금티켓이 있는 물건이긴 했구만. 난 저들이 또 거짓말 하는 줄로만 알았지 뭐야.”
“나도 그걸 썼다는 얘긴 이번에 처음 듣네. 대체 누가 그런 귀한 걸 갖고 있지?”
황금티켓. 그러고보니 내 티켓도 황금색 아니던가?
…설마, 세라가 나한테?
나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티켓을 확인했다.
티켓은 황금색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그럼 오늘도 천의 얼굴을 찾아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사회자는 마무리 멘트를 던지고 있었다.
쇼는 여기서 끝인가.
이 티켓에 대해 얘기해볼까.
정말 그 자리가 어쩌면 나를 위해 마련된 자리일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나는 모두가 나가느라 혼란스러운 틈을 타 직원 한 명을 붙잡고 티켓을 보여주었다.
“어머, 죄송하지만 그건 일반 티켓이에요.”
“…그런가요?”
황금색인데?
점원의 말에 따르면 황금 티켓은 이렇게 색만 황금색인 종이가 아니라, 진짜 황금으로 만든 티켓이라고 했다.
대체 어떤 미친 놈이 황금을 고작 티켓 만드는데 쓰는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지만 점원이 아니라는데 붙잡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그녀는….”
“아마 이미 방에 들어가셨겠죠?”
“윽….”
빠득.
절로 이가 갈렸다.
그럼 지금 그녀가 누군지 모를 남자와 단 둘이 방에 있다는 것 아닌가?
“남는 무희라도 불러드릴까요?”
“…됐습니다.”
여기 더 있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그냥 나왔다.
나와서 찬 바람을 잠시 쐬고 있으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래.
어차피 그녀는 다른 사람이니까, 지금쯤 아린은 숙소에 있을 것이다.
최대한 빨리 달려가서 그녀가 있는 걸 확인하면 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숙소까지 단걸음에 달려갔다.
“허억… 허억… 유, 유니, 아린은?”
“어? 괜찮아 에릭?”
내가 숙소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제일 먼저 보이는 유니에게 묻자,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살폈다.
“괘, 괜찮아… 그보다, 아린, 아린은?”
“오자마자 아린부터 찾는 거야?”
살짝 삐진 듯한 유니의 모습.
나는 또 유니의 장난이 도졌구나 싶어 대충 받아넘겼다.
“아… 그, 볼 일이 있어서… 신경쓰지마.”
“아린이 더 소중하구나?”
그녀가 불만스럽게 툴툴거렸다.
“…흥, 에릭이 그렇지 뭐. 아린은 아직 안 돌아왔어.”
과장되게 삐진 척을 하며 홱 돌아앉는 유니.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은 그녀에게 신경쓰고 있을 여유가 없다.
…잠깐. 뭐라고?
“아직… 안 왔다고?”
“응. 저녁은 먹었는지 모르겠네.”
살짝 걱정된다는 듯 유니는 아린이 곧 돌아오진 않을까 문가를 살폈다.
“어디 갔는지 알아?”
“으음… 모르겠어. 정령이라도 있으면 찾아볼 텐데….”
유니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으니 더욱 불안했다.
왜 아직도 안 들어왔지?
도대체 어딜 갔길래?
“…잠깐 나갔다올게.”
“이 시간에? 에릭, 잠깐만!”
나는 유니의 외침을 뒤로 한 채 다시 숙소를 나왔다.
분명 여기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교회? 일단 교회부터 가볼까?
…왠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목적지도 없이 주변을 뛰어다녔다.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녔지만, 나도 모르게 나는 천의 얼굴이 있는 방향 쪽으로 뛰고 있었다.
방금 전에 지나왔던 길이라 무심코 다시 선택한 걸까.
그렇지만 아까 지나면서 볼 때는 아린이 없었다.
다른 길을 찾아보자.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엇….”
두 남녀가 골목길에 접어드는 모습이 보였다.
살짝 나보다 덩치가 큰 남성, 제렌 씨다.
그 옆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아린이다!
“아린!”
왜 둘이?
나는 소리치며 그들이 접어든 골목길로 뛰어들었다.
내 외침을 듣지 못했는지 그들은 날 돌아보지 않았다.
“아린! 제렌 씨!”
제길, 왜 둘이 같이 있는 거지?
나는 그들이 사라진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어…?”
분명… 여기로 들어갔는데.
골목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잘못 본 건가?
그런 것치곤 너무 선명했는데.
안 쪽을 잠시 걸었지만 정말 골목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쓰레기와 퀘퀘한 냄새 뿐.
사람의 흔적 따윈 보이지도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들어가는 걸 봤는데.
혹시나 싶어 자세히 둘러봤지만, 딱히 더 보이는 것은 없었다.
짜악!
포기하고 돌아갈까 고민하던 순간, 더 깊은 곳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뭔가 부딪히는 소리인가?
왠지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낯선 것 같기도 한 소리였다.
나는 소리가 향하는 방향으로 뛰었다.
안 쪽에는 골목이 하나 더 있었다.
그 쪽으로 곧장 뛰어든 나는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당황하며 다시 밖으로 뛰쳐나오고 말았다.
뭐, 뭐하는 거지 이 사람들…?
눈 앞의 광경은 많이 당혹스러웠다.
골목 깊숙한 곳에는 두 남녀가 있었다.
조금 전에 본 건 착각이었는지, 남자는 제렌 씨가 아니었고 여자도 아린이 아니었다.
비슷하게 생기긴 했다.
그렇지만 확실히 다른 인물이었다.
“히이잇… 아, 아파요!”
짜악!
“아프라고 때리는데 당연하지! 앞으로 다섯 대!”
“하읏… 하앙….”
남자는 여자에게 매질을 하고 있었다.
벽에 손을 댄 채 엉덩이를 내민 여성을 향해, 그는 채찍 같은 것을 휘두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남자가 여자에게 벌을 주는 모습이다.
왜… 왜 밖에서, 그것도 이런 시간에 이러고 있는 거지?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러는 거지?
아니, 애초에 둘 다 성인 같은데 왜 여자는 남자의 매를 맞고 있지?
어린아이가 매를 맞는 거야 자주 있는 일이지만, 성인이 매를 맞는 일은 거의 없지 않는가.
노예라기엔 그녀의 모습이 단정했다.
“응? 형씨, 뭐요?”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남자가 나를 돌아봤다.
“히익!”
여자는 누가 자기를 봤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는지 몸을 웅크리며 얼굴을 가렸다.
짜악!
“일어나! 누가 멈추랬어!”
그는 위협적으로 허공에 채찍을 휘둘렀다.
“그, 그치만….”
“흐흐, 그러게 애초부터 잘못을 하지 말았어야지.”
아무래도 저 여자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았다.
“아니, 저기…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말로 해결하시는 게….”
“너 우리 알아?”
남자가 대뜸 나한테 물었다.
“아, 아뇨….”
“그럼 방해말고 꺼져. 아님, 네가 나 대신 때려줄래?”
그가 씨익 웃으며 나한테 다가왔다.
미친 남자다.
나는 그에게서 광기와도 같은 무언가를 느끼고 뒷걸음질쳤다.
용사가 한낱 일반인에게 겁을 먹다니?
누가 보면 비웃고도 남을 모습이지만, 그만큼 눈 앞의 풍경은 내 이해의 범주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못 하겠으면 꺼져. 남의 일에 간섭 말고.”
그러고서 그는 몸을 홱 돌려 다시 그 여자에게 다가갔다.
“일어나. 아직 체벌 끝나지 않았어.”
“으읏… 그, 그치만….”
“쓰읍, 여기까지 와서 망칠래?”
여자는 고개만 빼꼼 든 채 나를 바라봤다.
왠지 부끄러워져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는 사람도 아니잖아. 그치?”
“…….”
남자의 물음에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머뭇거렸다.
“이봐! 구경 났어? 빨리 꺼지지 그래?”
“윽….”
나는 후다닥 도망쳤다.
딱히 그가 무서워서는 아니다.
그저 이 풍경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이해의 범주를 벗어난 저 정신나간 모습이 공포스러웠다.
짜악! 짜악!
“하읏! …흐읏!”
달리는 내 등 뒤로 채찍 소리와 여자의 비명소리가 계속 맴돌았다.
착각인지 그녀의 소리가 다소 달콤하게 느껴졌다.
***
그리고 제렌 씨와 아린은 둘 다 밤늦게 들어왔다.
어딜 갔다온 거냐는 질문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 손으로 엉덩이만 살짝 쓰다듬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