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짐꾼-97화 (97/236)

〈 97화 〉 [용사] 마지막 일주일

“흐음… 무슨 얘기를 해볼까요?”

세라는 한 손가락으로 자기 턱을 콕콕 찌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본인이 말을 꺼내긴 했지만 구체적인 생각은 안 해본 모양이다.

이거, 어쩌면 기회인가?

그녀에게서 정보를 더 빼낼 찬스일지도 모른다.

“…마왕은 어떤 사람이죠?”

“우후후, 자기 질문에 답해달라는 건가요? 속이 뻔히 보이네요, 귀여워라.”

세라는 내 볼을 쭈욱 잡아당기며 쿡쿡 웃었다.

왠지 어린애 취급 받는 것 같아 살짝 불쾌하지만, 정보의 가치를 생각하며 꾹 참았다.

“뭐, 이정돈 괜찮겠죠. 마왕님이라… 무서운 분이죠.”

무섭다라. 역시 그렇겠지.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으니까, 평범한 놈일 리가 없다.

보통 정신머리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항상 길고, 두터운 망토를 입고 다니고, 걸을 때마다 뚜벅뚜벅 소리가 참 크게 나요. 성 안에 있는 마족들은 그 소리만 들어도 겁에 질리죠.”

이런 게 궁금한 건 아니었는데….

일부러 이런 쓸데없는 얘기만 하는 건가?

“그런데 사실, 자세히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죠. 마왕님은 그저 기운이 다 빠진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늙은이!

마왕은 노인이란 말인가?

이건 들어보지 못한 정보였다.

노인이라면 마왕 자체의 힘은 그다지 강하지 않은 걸까?

“아, 그래도 지금의 당신보다는 훨씬 강해요. 꿈도 꾸지 마시길.”

내 가슴을 콕콕 찌르면서 세라가 웃었다.

살짝 분해서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실 당연한 거에요. 인간은 결코 마족의 신체능력을 따라잡을 수 없거든요. 전 오히려 인간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은데요. 자기보다 더 신체능력이 강한 마족들을 상대로 이렇게 잘 버틸 줄이야.”

“…왜 그렇게 인간에게 호의적인 거죠?”

처음 봤을 때부터 이게 궁금했다.

왜 그녀는 나에게, 우리 인간에게 호의적인가?

첫 사천왕인 해골장수와는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 않았지만, 딱히 인간을 좋아하는 것 같진 않았다.

루엘라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세라는?

그녀는 인간들을 해치는 마족들의 사천왕이지만 동시에 교회에서 인간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봉사하는 수녀이기도 했다.

그녀의 양면적인 모습 속에 무엇이 감춰있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호의라… 사실 호의라기보다는 미안함이랄까… 음, 제 얘기는 이쯤할까요?”

뭔가 더 있다.

그렇지만 그녀의 이 완곡한 거부의사는, 평소 그녀의 행실을 생각했을 때 무척이나 단호한 거절이었다.

“용사님은 여기서 나가시면 어디로 갈 생각인가요?”

“…으음.”

그러고보니 그걸 안 정했다.

지금 당장 나갈 수가 없는 상황이라 그런지, 나가면 어디로 가야겠다 하는 것 보다는 어떻게 나가지? 하는 고민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한 번 숲에 들러보세요.”

“숲?”

숲이라 하면 어느 숲을 말하는 거지?

이 대륙에 널린게 숲 아니던가.

“엘프들의 숲.”

“엘프….”

엘프들은 너무나 폐쇄적이라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다.

인간들과도 최소한의 교류만을 하며 지낸다고 들었다.

“조, 조금 머네요.”

문제는 거기까지의 거리였다.

바로 옆이면 또 몰라, 거기까지 가려면 한참을 더 가야한다.

당연히 마왕성과도 멀어지는 방향이다.

“후후, 시원하고 좋은 곳이에요. 엘프들이 좀 시끄럽긴 하지만 그거만 제외하면 경치 좋고, 물 좋고, 다 좋은 곳이죠.”

“그렇군요….”

혹시 우리를 마왕성에서 멀리 떨어뜨리려는 수작이라던가?

…아니, 그런 거라면 애초에 우리를 도와주지도 않겠지.

“꼭 가야 할 곳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아니라면 제 말을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음… 그러죠.”

뭔가 이유가 있는 것 같긴한데, 알려주진 않겠지?

어차피 반드시 들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가능성 중 하나로 고려하는 것 쯤이야 어렵지 않지.

“자, 이쪽 얘기는 이제 그만할까요? 이제 용사님이 얘기를 들려주세요.”

“그 쪽이 듣기에는 조금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괜찮아요.”

나는 마족들을 죽인 얘기를 최대한 빼면서 우리의 여정을 짧게 설명했다.

전투나 능력에 관한 측면은 자세하게 얘기하자니 우리의 정보가 새어나갈 것 같아 제외했다.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가 해결했던 일들도 애매모호하게 들려줬다.

그러다보니 결국 이야기의 대부분은 우리 파티원 개개인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소꿉친구 정령사에 도도한 마법사, 순수한 신관… 푸훗, 너무 욕심이 과한 거 아니에요?”

“아, 아니… 그녀들은 어디까지나 그냥 동료….”

세라가 능글맞게 웃었다.

나는 열심히 변명을 했지만 내가 듣기에도 별로 설득력은 없어보였다.

“제가 보기에 용사님은 여자 하나 챙기기도 바쁠 것 같은데요. 한 명에게 집중하는 건 어떠실지?”

“…으음.”

도리적으로도 그게 맞다.

그녀들이 나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질질 끄는 건, 어떻게 보면 그녀들을 기만하는 행위 아닌가?

세라의 말대로 마음을 확실하게 굳히는 것도….

“그럴 마음이 없다면 더 열심히 그녀들을 관리하세요. 방치하면 다른 나쁜 사람이 채가도 모른답니다?”

“과, 관리라니….”

사람을 무슨 물건처럼….

내가 살짝 꺼려하는 기색을 보이자 세라는 재밌다는 듯 쿡쿡 웃었다.

“그런 당신께 좋은 걸 선물해드리죠.”

세라는 주머니를 뒤지더니 나에게 작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뭐죠?”

“어머, 정말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나 보네요. 이것도 못알아보고.”

그녀가 내 손에 종이를 쥐어주길래 직접 확인해보니, 천의 얼굴 입장 티켓이었다.

“…윽!”

“아하하, 뭐야 그 반응! 귀여워라. 이거 비싼 거에요, 알아요?”

알게 뭔가.

이런 곳에는 가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내려다본 티켓의 날짜는 내일이었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 초대형 신인의 공연이라구요. 용사님도 한 번쯤 보고가는게 어떨까요?”

“…….”

아린을 무척이나 닮은 에리.

그녀의… 마지막 공연.

“관심이 좀 생기시나요?”

“…피, 필요없어요.”

나는 눈을 꾹 감고 그녀에게 다시 티켓을 내밀었다.

“확인하고 싶지 않나요? 그녀가 정말 그녀가 맞는지….”

“…….”

어떻게 알고 있지?

아니,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어차피 둘은 무척이나 닮았으니까.

다른 사람이라 믿고 넘기려고 했는데… 왜 하필 이런 기회를 준단 말인가?

“이대로 그냥 넘어가면 불안해서 잠이 오겠어요? 이런 건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구요. 자, 맨 앞자리니까 더 잘 보일거에요.”

“…그, 그치만….”

내 불안감을 이해한 세라가 내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못 믿으시나요? 당신의 동료를?”

“그건… 아닌데….”

아닐 것이라 믿고 있지만, 그래도….

“그럼 내일 확인해보면 되겠네요. 그쵸?”

그녀는 내 손에 다시 티켓을 꾹 쥐어준 채 손을 흔들었다.

“자, 벌써 도착했네요. 그럼 전 이만 가볼테니 좋은 구경하고 오세요. 이틀 뒤에는 제가 직접 찾아갈 테니 준비하시구요.”

그리고 세라는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홀로 남겨진 나는 한동안 티켓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여섯째 날.

복잡한 마음으로 오전을 보냈다.

아린을 찾았지만 하필이면 아침부터 어디론가 나가있었다.

대체 어디에 갔단 말인가?

혹시 몰라 교회도 찾아갔지만 그곳에 아린은 없었다.

거리는 이미 에리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부르지 마.

그 천박한 말로 아린… 아니, 에리를 더럽히지 말란 말이야.

자꾸만 머릿속에서 에리를 아린이 동일시되는 게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직접 내 눈으로 보고 다른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는 수밖에.

그래. 그녀는 아린과 많이 닮은 다른 사람.

다른 사람이다.

저녁 시간이 되자 나는 그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가기 전 세리아가 슬쩍 웃으며 나를 바라봤는데, 왠지 내 목적지가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음… 확인했습니다. 들어오시죠.”

가게 앞에서 경비를 서는 사람이 내 티켓을 확인하더니 안으로 들여보내줬다.

여전히 시끄러운 가게 안.

그래도 한 번 와봐서 그런지 저번처럼 어색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영주는… 역시 저번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아는 체 하기에는 부끄러워서 슬쩍 고개를 피하며, 내 자리를 찾아갔다.

가장 앞자리라고 그랬지.

“여기에요.”

가게 점원이 안내해준 자리는 정말 무대 바로 앞이었다.

손을 뻗으면 바로 무대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이정도라면 아무리 어두워도 얼굴을 못 알아볼 리가 없다.

나는 입이 바싹 타들어가 연신 음료를 들이켰다.

지출이 살짝 걱정되지만, 그런 건 이미 사소한 문제였다.

주변 사람들은 자꾸만 에리를 가지고 온갖 추잡한 소리를 떠들어댔다.

엉덩이가 작은 게 애 낳을 때 고생 좀 하겠다느니, 가슴이 작아서 흠이라느니 등등.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가슴이 작은 건 그녀의 매력이다.

애 낳기가 힘들다? 어차피 본인들의 애를 낳아줄 것도 아닌데 뭐하러 그런 걱정을 하나?

나는 자꾸만 그들에게 한 소리하고 싶어지는 걸 꾹 참으며 기다렸다.

“자아,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아, 벌써부터 다들 눈이 번뜩이는데요. 여기 다들 똑같은 생각으로 오셨나요?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길다.

쓸데없는 말은 필요없다.

빨리. 빨리 그녀를 보여줘…!

“…우선 그녀들을 먼저 만나보시죠!”

무대 위로 등장하는 세 명의 여성.

하나 같이 입은 듯 안 입은 듯 아슬아슬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화려한 장신구로 감추고 있지만 딱히 예쁜 얼굴은 아니다.

나는 고작 이런 걸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게 아니란 말이야.

천박한 춤.

추잡한 미소.

전부 필요 없다.

내가 바라는 건, 이런 여자들이 아니다.

“…다음으로….”

길다. 왜 아직도 그녀가 나오지 않는 거지?

“…그리고 이번에는….”

아니야.

이 여자도 아니다.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초조해졌다.

특히 손님들이 여자들을 더러운 눈초리로 훑어대기라도 하면 더욱 불안했다.

뭘 그렇게 불안해 하는 거지?

어차피… 어차피 그 여자는 아린이 아니잖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드디어 오늘의 메인 디쉬! 단 한번! 단 한 번만에 그녀는 아세일라의 모든 남자들을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꽃은 일찍 지는 법! 이번이 마지막이 될, 아세일라의 최단기 여왕을, 큰 소리로 맞이해주십시오!”

왔다.

그녀의 차례다.

곧 가게가 떠나갈 듯한 함성으로 가득 찼다.

“에리! 에리! 에리!”

“왜 벌써 가는 거야!”

사방에서 아쉬워하는 소리가 쇄도했다.

그녀는… 그녀는 바쁜 몸이라고.

너희들과 놀아줄 시간 따위 없어!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정면을 노려보았다.

저 커튼.

저 커튼 뒤에 그녀가 있을 것이다.

속이 다 비쳐보이는 음란한 복장과, 번쩍이는 황금 장신구로 치장한 그녀가.

그렇지만 결코 그녀는 아린이 아니리라.

아니여야 한다.

촤르륵.

커튼이 조금씩 걷히면서 그 안에 한 여성이 걸어나온다.

아직은 어색한 걸음걸이.

그녀가 이 일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증거다.

보폭은 작다.

그러고보면 아린도 보폭이 제법 짧았지.

우리 중에 체력도 가장 약해 혼자 뒤처지기 십상이었다.

보통 그럴 땐 유니가 자주 챙겨줬는데.

앞으로는 나도 좀 챙겨줘야겠다.

사뿐사뿐.

어색하지만 그녀의 걸음걸이는 가벼웠다.

첫 공연 때와 같은 불안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짤랑짤랑.

그녀가 걸을 때마다 다리에 찬 장신구가 서로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마치 쇠사슬에 금과 보석을 걸쳐 꾸민 것만 같다.

그녀의 다리와 허벅지에는 금줄이 감겨져 있다.

화려한 줄이 그녀의 허벅지를 꾸욱 조이며 팽팽하게 그녀의 하반신을 뒤감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장미 줄기 같았다.

다리 사이는 가벼운 천으로 가려져 있다.

그렇지만 너무 허술해 바람이라도 훅 불면 흘러내리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배꼽.

그녀의 배꼽과 배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치렁치렁한 장신구로 가득찬 위아래와는 대비되는 여백의 공간.

덕분에 잘록한 그녀의 허리가 오히려 눈에 띄었다.

…아린의 허리가 어느정도더라?

잘은 모르겠지만 비슷한 것 같다.

아니, 그녀 정도의 체형은 흔하다.

넘겨짚지 말자….

착.

딸랑.

무대 앞에 선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흔들리던 장신구들이 마지막으로 소리를 낸 채 일제히 목소리를 죽였다.

나는 시선을 조금 더 위로 올렸다.

작은 가슴과 그녀의 어깨가 보인다.

저 정도 가슴은 귀하지 않다.

딱 그녀 정도의 체형에서는 흔한 사이즈의 가슴.

전혀 이상할 것 없다.

중요한 건 어깨다.

어깨에 그 문양이 새겨져 있는가?

첫 무대에서 봤던 그녀의 쇄골에는 아무런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아린과 에리의 가장 큰 차이점이고.

그렇다면 이번에도 쇄골 쪽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 분명하다.

“…읏.”

그러나 무언가 있었다.

문양은 아니다.

아니, 정확히는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쇄골은 장신구로 가려진 상태였으니까.

뭐지?

마치 만들다 만 옷을 입고 있는 것 같다.

목과 쇄골 부위만 가리는 그 기묘한 장신구는, 마치 황금으로 된 옷의 일부를 잘라온 것만 같았다. 목걸이라기에는 너무 두껍고 크다.

이러면… 알 수가 없잖아.

아린처럼 긴 머리카락과, 비슷한 체형에, 비슷한 보폭을 가진 여자.

이 모든 게 그저 우연일까?

우연에, 우연이 겹치고, 또 우연이 겹쳤을 뿐.

매우 드물지만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이상할 것 하나 없다.

그래.

그러니까… 그 우연에 하나 쯤 더 겹쳐도 이상할 건 없겠지.

그녀의 얼굴이 무척이나 익숙한 건,

그냥 우연에 우연이 겹치고 또 겹치고 그 위에 한 번 더 우연이 겹친 결과일 뿐이니까.

그렇지?

“…아린.”

“아….”

나는 그리고 무대 바로 앞에서, 아린을 무척이나 닮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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