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짐꾼-96화 (96/236)

〈 96화 〉 [용사] 마지막 일주일

나는 내 방에서 세라가 알려준 사실들을 토대로 탈출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알려준 정보가 전부 사실일 것이라는 가정하에서지만.

내가 그녀에게 물어본 것은 세 가지.

루엘라의 목적, 탈출할 수 있는 방법, 그리고 사천왕의 정체였다.

루엘라의 목적은 딱히 우리들의 인식과 다르지 않았다.

이 세상을 마왕의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루엘라의 목표였다.

이 말을 한 뒤 세라는 선심쓰듯 루엘라가 사천왕 중에서도 특히나 마왕에게 충성하는 편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그 말은 곧 자기나 다른 사천왕은 그렇게까지 마왕을 섬기지는 않는다는 말 아닌가?

생각해보니 대부분의 사천왕을 다 만나봤다.

그 해골장수는 이미 소멸했고, 루엘라와 세라는 지금 이 도시에 있다.

여기서 둘을 확실하게 소멸시킬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겠지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도시 사람들 모두가 인질로 잡힌 상태에서 섯불리 행동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차선은 여기서 도망치는 것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도망쳤다고 도시 사람들을 모로지 죽여버릴 지도 모르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가만히 앉아서 모든 사람들이 죽는 결과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걸어볼만한 도박이었다.

그러니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그녀에게 가르쳐달라고 했다.

그러자 세라는 걸어서 나가면 된다는 황당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게 가능하면 이렇게 물어봤겠는가?

그렇게 따지려던 나는 어쩌면 여기에 더 숨은 뜻이 있진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묘하게 호의적이었던 그녀의 태도.

물론 그녀의 성격으로 보아 정말 놀리려고 한 말일수도 있지만, 어쩌면 정말로 이게 답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 점에 관해서는 조금 더 고민을 해봐야할 것 같았다.

예전처럼 다같이 모여 상의할 수도 없다.

그랬다가는 저번처럼 들키고 말 것이다.

사실 탈출법을 사천왕에게 물어본 시점부터 별로 의미없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지만…….

똑똑.

노크소리가 내 집중을 흐트려놓았다.

나는 살짝 짜증이 났지만 티를 내지 않고 말했다.

“들어오세요.”

그렇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혹시 못들었나 싶어 다시 말해봐도, 문 밖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문을 열어보니 바닥에 편지 하나가 놓여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데, 도대체 누가?

발신인도 편지봉투도 없다.

그저 반으로 접힌 종이 한 장이 전부였다.

[일주일 뒤, 루엘라 도시 밖으로 외출]

편지에는 이 한 문장만 적혀있었다.

***

다음날.

우리 파티원 모두를 한명씩 찾아다니며 편지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사실 나부터도 이걸 믿어도 되는 걸까 의심스러웠지만, 지금은 믿을 구석이 이것밖에 없었다.

“와아! 드디어 나갈 수 있겠네, 에릭! 그런데 그 여자는 왜 우리를 도와주는 걸까?”

“그러게….”

유니는 순수하게 우리가 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물론 나도 그녀도 세라가 이렇게까지 우리를 도와주는 이유는 몰랐다.

“…조금 이따가 답해도 될까?”

세리아는 내 말을 듣고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믿어도 되는 건지 고민하고 있는 걸까. 역시 믿음직스러웠다.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살짝 빨개진 얼굴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주일 뒤? 아… 알겠습니다.”

아린은 왠지 나와 얼굴을 맞대는 것을 살짝 꺼려하는 것 같았다.

조금 충격이었지만 몸상태가 안 좋아보이는 것 같아 그것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내 간병을 정중하게 거절한 아린은 무언가 고민하면서도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니 빼고 다들 반응이 조금씩 이상하긴 했지만, 어쨌든 전부 전달했다.

아참. 제렌 씨에게 얘기를 안 했구나.

나는 서둘러 그의 방을 두드렸다.

“지금 거기 안 계실걸?”

“어? 그래?”

내가 문을 쿵쿵 두드리고 있자 때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유니가 한 마디 했다.

밖에 나간건가?

“어디 갔는지 알아?”

“으음, 잘 모르겠는데 세리아 방에 있지 않을까?”

“……왜?”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덜컥하고 멈추는 것 같았다.

…왜 그가 세리아 방에 있다고 하는 거야?

“응? 요즘 자주 들락날락하시던데. 그래서 그런거 아냐? 에릭 몰랐어?”

몰랐다.

세리아는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물론 제렌 씨도.

“…둘이, 거기서 뭐하는데…?”

“으음… 마법을 배운다고 했던 거 같은데….”

유니는 기억을 더듬으며 누군가한테 들었던 말을 간신히 기억해냈다.

“앗, 에릭, 어디가?”

나는 곧장 세리아의 방 앞으로 뛰어갔다.

그녀의 문을 거칠게 노크하니 잠시 뒤 산발머리가 된 세리아가 부스스한 몰골로 나왔다.

“으음… 왜그래?”

“세, 세리아… 자고 있었어?”

이렇게 엉망이 된 세리아는 처음이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항상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만 봤는데, 이렇게 무방비한 측면도 있었구나.

“아… 도중에 피곤해서 잠깐. 그보다 무슨 일이야?”

“아, 그… 호, 혹시… 제렌 씨 못 봤나 해서….”

세리아는 그 말을 듣더니 눈을 날카롭게 떴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유, 유니가… 요즘 둘이 같이… 그, 마법 공부 한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남의 여자를 뺏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지금의 나는 안다….

“유니한테 들었나보네. 여기 없어.”

“…그래?”

“됐지? 난 이만 들어가볼게.”

세리아는 하품을 하며 문을 닫았다.

찝찝한 구석이 남아있긴 했지만,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 조금 두근거렸다.

이, 이건 사이가 좋아졌다는 뜻일까?

허물없는 모습까지 전부 다 보여도 괜찮다는 믿음… 뭐 그런 거 아닐까?

그럼 그렇지.

세리아가 나를 이렇게 믿어주고 있는데, 내가 먼저 그녀의 믿음을 배신해선 안 되겠지.

나는 그렇게 여기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만 나의 마음속 한 구석에는 다시금 불신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둘째 날.

이 날은 아무 것도 안했다.

왠지 몸이 나른하고 날씨도 너무 좋아 잠시 산책이나 조금 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당황스러웠는데, 지금은 시선이 자연스러워졌다.

오히려 내가 그들의 몸을 훑어보지 않으면 그게 그들에게는 더 어색한 일이었다.

그렇게 의도치 않은 눈호강을 하고 돌아왔다.

…아니, 처음부터 이러려고 나갔던가?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셋째 날.

왠지 도시가 시끌벅적했다.

저번에 그 스트립 극장에서 봤던 신인배우의 두 번째 일정이 잡혔다는 소문이 도시 전체에 퍼다했다.

당연히 우리는 곧 나갈 사람이니 그 여자의 공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난 처음부터 아린을 믿고 있었지만 그래도 걱정을 조금 덜어내 상쾌했다.

넷째 날.

조금 불안한 소식을 들었다.

그 신인배우의 두 번째 공연이 마지막 공연이라는 소문이었다.

전대미문의 최단기 은퇴.

당연히 난리가 났지만 입장이 번복되는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신경쓰이는 점은 공연이 이틀 뒤라는 사실이었다.

하필이면 탈출 전 날.

그냥 우연이겠지?

다섯째 날.

거리 한복판에서 익숙한 사람을 발견했다.

헐벗은 주변 사람들과 비교해도 어색함이 없는 타이트하고 노출도 높은 수녀복.

세라였다.

남자들을 유혹하듯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걷던 그녀는 갑자기 골목길에서 뛰쳐나온 남자들에게 납치당해 골목 안 쪽으로 사라져버렸다.

“엇?”

구해야 하나?

그렇지만 사천왕인데?

당황스러웠지만 이미 내 몸은 그 쪽으로 뛰어가는 중이었다.

꾸직!

그렇지만 나는 골목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무언가 과일 터지는 소리를 듣고 발을 멈췄다.

과일… 은 아니겠지.

이런 골목 안에 과일이 있을리 없지 않는가.

그렇다면 대체 뭐가?

“어머, 용사님이네. 혹시 도와주러 오신 거에요? 로맨틱하다.”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더니 그녀가 먼저 골목 사이에서 고개를 쑥 내밀며 나를 바라봤다.

“우왓! 아, 그… 무, 무사하시네요….”

…얼굴에 묻은 빨간 자국이 무척이나 신경쓰였다.

세라는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악동처럼 히죽 웃었다.

“신경쓰여요?”

“아… 설마 그….”

“전부 죽였어요.”

내 표정이 딱딱하게 굳자, 세라는 까르르 웃으며 내 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뭘 당황하고 그래요. 그쪽도 이미 마족들을 수 십 단위로 베어왔으면서. 그렇죠?”

“그, 그거랑 이건….”

생각해보니 이 여자도 마족이었다.

그것과 이것이 다르다고 주장하면, 그건 그녀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리라.

내가 마족들을 베는 것과 그녀가 인간들을 죽이는 것에 차이가 있나?

“그거랑 이건?”

세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눈과 입은 웃고 있었지만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결코 평온한 것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어머나.”

난 곧장 그녀에게 사과했다.

마족들의 생태라던가, 그들의 존재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그녀가 보기에 나는 자신의 동족을 죽인 나쁜 존재겠지.

그런 내가 인간을 죽였다고 그녀를 비난하는 건 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리아와 아린이 들으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고 화를 내겠지만, 내 솔직한 심정은 그랬다.

“지금 인간의 용사가 마물한테 고개를 숙이시는 거에요?”

“…인간인 제가 마족인 당신에게 사과하는 겁니다.”

공식명칙은 마물.

그렇지만 예전에는 이들을 마족이라고 불렀다.

마족이라는 이름이 우리와 동등한 생명체인 것처럼 들리니까 마물로 바꿔부르게 되었다던가.

“후후… 재밌네요. 아직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세라는 내 볼을 넘어 귓불까지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저기….”

아무리 내가 사과하는 입장이라지만 이건 좀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는가?

어색함에 내가 한 마디 하자 그녀는 웃으면서 내 얼굴에서 손을 뗐다.

“사과는 잘 받았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인간을 대표하는 용사지, 우리들의 용사가 아니랍니다. 당신이 우리의 사정을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 그러니 앞으로는 마족에게 머리를 숙이지 마시길.”

“네? 아… 네.”

사천왕인 그녀에게 용사의 마음가짐에 대해 설교를 들어버렸다.

이게 무슨 아이러니인지.

세라도 이 모습이 우스웠는지 픽 웃음을 터뜨렸고, 결국 나도 어색하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하하… 아, 재밌네요. 그럼 용사님, 이왕 절 지켜주려면 교회까지 데려다주시겠어요?”

어차피 할 일이 있던 것도 아니니 상관은 없지만, 왠지 그녀와 너무 친해지는 것 같아 순간 망설임이 들었다.

“후후… 저는 당신들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답니다. 루엘라는 아니겠지만.”

세라가 내 고민을 읽었는지 슬쩍 말했다.

…그래. 이 기회에 그녀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자.

그녀가 했던 세 번째 대답도 신경쓰이고.

“따라오면 겸사겸사 재밌는 얘기도 들려드리죠.”

세라가 자기 볼을 손등으로 닦으며 말했다.

피가 지워진 그녀의 얼굴은 인간과 다를 것 하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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