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용사] 아세일라의 일상
“그럼 우리보고 여기서 죽으라는 거야?”
세리아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나가지 말라.
그 말은 계속 여기 남아있으란 뜻 아닌가?
“죽이지는 않아요. 그냥 여러분의 모험은 여기서 끝이라는 거죠. 이 향락의 도시에서 남은 여생을 마무리하도록 하세요.”
“…여러분이 이 땅을 모조리 정복할때까지 말인가요?”
그 말을 들은 세라가 웃었다.
“생각보다 나쁘진 않을 거야. 너희들은 툭하면 마족들을 무슨 지성도 없는 몬스터처럼 취급하는 모양인데… 아, 맞나?”
“하아… 그냥 돌아갈래요, 세라?”
“알았어, 알았어. 조용히하면 될 거 아냐.”
루엘라의 마지막 경고에 세라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지만, 루엘라 뒤에서 계속 우리들을 향해 히죽히죽 웃는게 여간 거슬리는게 아니었다.
“흠흠, 자꾸 미안해요. 아무튼 저희가 여러분에게 바라는 것은 모든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여기에 머물러달라는 것 뿐이에요. 의식주는 물론이고 평생 놀고먹고도 남을 돈을 마련해드리죠.”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제렌 씨를 돌아보았다.
솔깃한 표정으로 그녀의 얘기를 경청하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뭐, 음… 용사님의 의견에 따르죠.”
그는 내심 내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길 바라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이대로 도시가, 아니 전 대륙이 마족들의 손에 넘어가는 걸 방치하라고?
여신님의 선택을 받은 용사로서 결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에릭. 여기선 일단 알겠다고 해. 지금 당장은 승산이 없어.”
세리아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의 입김이 간지러워 나도 모르게 부르르 떨자, 루엘라와 세라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으읏….”
“그녀 말대로랍니다.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우선은 저희 말을 듣는게 현명한 선택 아닐까요?”
“…몰래 말할 필요도 없었네.”
세리아가 풀죽은 듯 중얼거렸다.
“이게 다 내 덕분… 아, 아냐! 아무 말도 안 했어!”
세라가 뒤에서 으쓱거리며 자랑하다가 루엘라의 경고가 생각났는지 입을 합하고 막았다.
저 여자, 왠지 아린과 유니를 반씩 합쳐둔 것 같다.
“어때요? 우선 숙소부터 옮겨드리죠. 이 도시에서 제일 좋은 숙소고, 원한다면 시종들도 붙여드릴 수 있어요.”
“…필요 없어.”
나는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현실적으로 지금은 어쩔 대안이 없었다.
당장 우리들의 힘으로는 이 둘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럼 시종은 빼드리죠. 자, 따라오세요.”
그녀는 생긋 웃으며 등을 돌렸다.
“당신들의 새 숙소를 안내해드리죠.”
우리는 치를 떨면서도 그녀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
그렇게 우리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아무도 우리를 감시하지 않지만, 동시에 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잠재적인 간수였다.
그 날 이후 루엘라와 세라는 우리에게 아무런 손도 대지 않았다.
음식에 독이 들어있지도 않았고, 몰래 우리를 암살한다거나 공격하는 일도 없었다.
정말 우리를 방치해두기만 했다.
몇 번 탈출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했다.
아무의 눈에도 안 띄고 빠져나가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루엘라 그녀 자체가 상당한 수준의 마법사라 투명마법으로 빠져나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우리는 조금씩 이 일상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만.”
세리아의 말에 나는 열심히 자지를 훑던 손을 멈췄다.
한창 자극을 받던 고추가 덜렁거렸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따라 얌전히 서있었다.
“잘했어.”
그녀가 내 머리를 쓰다듬자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애완동물이 된 것 같은 기분.
아무래도 세리아에게는 다소 이상한 취향이 있는 것 같았다.
“저기, 세리아….”
“응?”
“우리, 정말 이러고만 있을 거야?”
생활이 불편하진 않다.
아니, 오히려 너무 호화스러워서 어색할 지경.
푹신한 침대에서 일어날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이런 삶도 괜찮지 않을까?
매일매일이 심심한 건 내가 하루종일 검만 휘두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도시 내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루종일 여자들을 품에 끼고 놀고 먹고 마시며 하루를 보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지 않는 건 순전히 내가 괜한 욕심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혹시나, 어쩌면이라는 낮은 가능성에 걸고 매일을 허비하고 있다.
우리 실력에 사천왕을 쓰러뜨린다니 불가능하다.
그 해골… 이름도 헷갈리지만, 그 때는 어디까지나 운이 좋았을 뿐이다.
이 문양이 조금이라도 더 늦게 나타났거나, 그가 이 문양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포기해도 되는 게 아닐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꾸욱. 꾹.
그녀의 발이 내 자지를 자극했다.
“…읏, 아, 아니… 딱히 없지만….”
금방이라도 싸버릴 것 같아 허리를 굽히며 최대한 버텼다.
“그럼 별 수 없잖아. 우린 아직 힘이 부족한 걸.”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힘이 부족하다면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힘을 길러야하는 거 아닐까?
요 근래, 세리아가 마법연구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뭐야, 그 얼굴?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세리아가 한 쪽 양말을 벗다 말고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 것도 아냐.”
“흐음. 뭐, 그럼 말고. 자, 더 가까이 와. 발로 빼줄게.”
양말을 벗은 그녀의 발가락이 꼼지락거린다.
요즘 세리아는 발로 하는 것에 맛들렸는지, 자꾸만 나를 발로 보내버리려고 했다.
아직은 그녀도 많이 미숙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정말 발 하나만으로 가버리는 한심한 남자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읏, 세, 세리아 그건 다음에….”
“싫다는 거야, 지금?”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어? 그, 그건 아닌데….”
그녀의 정색하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자꾸 그녀의 장단을 맞춰주게 된다.
“그럼 이리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녀가 침대를 탁탁 두드리며 나를 불렀다.
내가 쭈뼛거리며 조금씩 다가가던 그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에릭, 방에 있어? 오늘은 수련 안해?”
유니의 목소리였다.
세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다시 양말을 신으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 대신 방문을 열었다.
“…으음? 왜 세리아가 여기있어?”
“잠깐 에릭이랑 얘기중이었거든.”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 안의 모습을 살폈다.
조금 아슬아슬했지만 나도 그 사이 다시 옷을 입어서, 얼핏 보기에는 이상한 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으래? 나도 들어가도 되지?”
“당연하지. 난 볼일 다 봤으니 먼저 가볼게.”
세리아는 유니가 들어오자 그녀에게 곧장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가면서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눈웃음을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윽.
그녀의 고혹적인 미소를 보니 가슴이 뛰었다.
“에릭.”
세리아의 자태를 제대로 감상하기도 전에 유니가 나를 불렀다.
“응? 왜?”
“…오늘은 왜 안 나왔어?”
“…….”
그녀는 불안해보였다.
매일 아침일찍부터 일어나 검을 휘두르며 연습하던 내 모습이 보이지 않아 불안했던 모양이다.
사실 오늘도 나갈 생각이었지만, 세리아가 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아니, 이건 결국 다 변명이다.
“…미안.”
“에릭도… 포기한 거야? 정말 여기에 남고 싶은 거야?”
“아,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럴 생각은 없다.
여기서 나가야지. 반드시.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세리아는… 이미 포기한 걸까? 아린도… 매일같이 어딘가로 나가고.”
첫날에는 우리 모두가 아침 일찍 일어났다.
탈출 방법을 모의하고, 더 강해지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어느 날부턴가 세리아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아린도 아침 일찍 나오지 않게 되었다.
“…이젠 정말 에릭, 우리밖에 안 남았어.”
남은 건 우리 둘 뿐이었다.
“세리아도, 아린도 이제 나가자는 말을 하지 않아. 세리아는 완전히 포기한 것 같고, 아린도… 잘 모르겠지만 큰 기대를 걸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아.”
반복된 실패가 우리의 의욕을 앗아가버렸다.
“…에릭. 난 포기하지 않아.”
“응. 나도 마찬가지야.”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차라리… 차라리 이럴 바엔 우리 둘 만이라도….”
“유니.”
점차 눈이 흐려지던 그녀가 결국은 말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렸다.
“아… 미, 미안.”
그녀는 내 심각한 표정을 보고 곧장 사과했다.
그녀들을 버리고 우리끼리만이라도 탈출하자고?
그럴 순 없다.
그녀들도 소중한 동료다.
우리는 넷이서 한 팀이고, 누구 하나 빠져서는 안 된다.
“…그렇지. 에릭한테는 모두가 다 똑같이 소중하니까.”
“응. 그러니까…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아줘.”
“나도 좀 다급해졌나봐. 미안해.”
유니가 의기소침해지자 방 안에 침묵이 맴돌았다.
나는 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어떻게든 해소하고자 애써 화제를 돌렸다.
“그, 그보다 말이야…. 아린이 요즘 어디 가는지 알아? 매일 바빠보이던데.”
“글쎄…? 잘 모르겠지만, 아마 교회가 아닐까?”
교회라.
교회에는… 그녀가 있다.
세라.
아마도 세 번째 사천왕.
그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정말 수녀가 맞기는 한가?
이미 정체가 마족인 시점에서 수녀라고 부를 순 없겠지만, 평소의 그녀는 정말 어느 도시에나 있는 평범한 수녀 같았다.
도시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정해진 시간마다 예배도 드린다.
그 날의 기억만 없었더라면 정말 의심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그녀는 위험한 인물이다.
아린이 교회에 들리는 거야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교회에 있는 건 그 정체모를 여자가 아닌가.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아린 찾으러 가는 거야?”
나를 바라보는 유니의 얼굴.
어쩐지 살짝 쓸쓸해 보였다.
“금방 올 거야.”
“…알았어.”
아세일라의 교회는 어쩌면 이 도시 내에서 가장 허름한 건물일지도 몰랐다.
당장 그 옆에 있는 으리으리한 천의 얼굴과 비교하면 더욱 초라해보인다.
현재 이 교회에는 세라 그녀밖에 머물지 않았다.
아린을 덮치려 했던 그 신관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혹시… 그녀가 죽인 걸까?
세라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솔직히 좀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묘하게 호의적인 듯 보이지만, 그녀의 정체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곧이곧대로 신용하기는 어렵다.
…그러고보니 전에 찾아오면 재밌는 걸 알려준다고 그랬지.
꽤 입이 가벼워보이던데 어쩌면 중요한 정보를 주워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사실상 무장이 전무한 수준이다.
어차피 진심으로 그녀가 날 죽이려들었다가는 버티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럴 바엔 처음부터 경계심을 낮추고 가는게 좋겠지.
끼익.
문 앞에서 들어갈지 말지를 망설이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엇, 용사님 아닙니까.”
“…제렌 씨?”
밖으로 나온 건 제렌 씨였다.
왜 그가 이런 곳에 있지?
“무슨 일로 교회에?”
“아, 잠시 볼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뭐지, 이 불안한 예감은?
“제 죄를 덜어내고 왔죠.”
“…죄?”
“하하, 아닙니다. 그럼 전 먼저 가보죠.”
그는 내 어깨를 툭툭 치고선 먼저 돌아갔다.
이미 아세일라에 적응한 듯 주변 남자들처럼 가벼운 차림이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살짝 환멸을 느끼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넓은 예배당.
의자가 잔뜩 비치되어 있었지만, 사람이라곤 맨 앞 줄에 있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아니, 사람도 아니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어머, 드디어 왔구나?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지 뭐야. 그래도 걱정하지마. 고작 목이 떨어진 정도로는 안 죽거든. 아하하!”
수녀복을 입은 그녀는 얼핏 보기에 정말 수녀처럼 보였다.
“나한테 뭔가 듣고 싶어서 찾아온 거야? 아니면… 너도 ‘고해’를 하고 싶은 걸까?”
고해.
아까 제렌 씨가 했던 말도 그렇고 뭔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고해가 뭐죠?”
“그런 것도 몰라? 자기가 지은 죄를 고백하는 거잖아. 우리 용사님은 아직 어휘력이 많이 부족한가 보구나? 괜찮아, 용사는 잘 싸우기만 하면 되니까.”
장난하자는 건가?
내가 그런 의미로 물어본 게 아니라는 걸 알텐데.
내 표정이 안 좋아지는 걸 봤는지 그녀가 후후 웃었다.
“농담이고, 궁금하면 따라와. 어차피 뭐라고 대답하든 고해실로 갈 예정이었으니까.”
그러더니 세라는 홱 몸을 돌려 구석의 작은 방으로 날 데려갔다.
“자, 먼저 들어가.”
뒤쪽에 작은 문이 하나 더 나있다.
아마 그녀는 저 쪽으로 들어가겠지.
저번에 아린도 그렇게 했으니까.
아린. 그러고 보니 아린은?
“저, 저기….”
“응?”
“혹시 아린… 아, 그녀는 신관인 제 동룐데, 그녀도 여기 있나요?”
“…후후, 어떨까?”
세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재촉해도 답해주지 않을 것 같았기에 나는 결국 대답 듣기를 포기하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담한 방.
촛불이 하나 켜져있고, 정면은 나무판자로 막혀 있다.
대화를 위해 판자 곳곳에 작은 구멍들이 뚫려있었는데, 유달리 밑에 있는 구멍은 제법 크기가 컸다.
팔뚝정도까진 무리없이 들어갈 것 같다.
…무슨 용도지?
내가 의아해하고 있으니 문득 건너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벌써 들어온 건가?
내가 의자에 앉자, 건너편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자, 자. 세라 수녀님의 고해시간이 돌아왔어요! 오늘의 죄 많은 어린양은 누구일까?”
지금 들어온 건가.
그럼 방금 났던 소리는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