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짐꾼-90화 (90/236)

〈 90화 〉 [용사] 아세일라의 일상

이어지는 그녀들의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교회의 타락, 게다가 이미 도시 전체에 뿌리내린 마물의 영향력.

정령이 사라졌다는 유니의 증언까지 합쳤을 때, 이미 이 도시는 마족의 영향권 내에 속해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나가죠, 용사님. 저희끼리 해결할 사안이 아니에요. 교회와 왕궁에 이 사실을 전해서 군대를 파견해야해요.”

아린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이렇게 큰 도시 하나가 통째로 적의 손에 넘어갔다면, 그건 더 이상 우리가 손 댈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아무리 여신님의 선택을 받았다 하더라도 고작 네 사람, 아니 다섯 사람이서 도시 하나와 대적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세리아와 유니, 그리고 제렌 씨에게 동의를 구했다.

제렌 씨는 살짝 탐탁잖아 하는 것 같긴 했지만 위기 상황이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아침해가 뜨자마자 바로 나갈까?”

“그냥 지금 나가면 안 돼? 여기 오래있기 싫어….”

유니는 팔뚝을 문지르며 불안하게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는 로비였지만, 그래도 그녀는 불안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용사님. 지금 당장 나가죠.”

갑자기 아린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무언가를 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우리를 급히 닦달하며 짐을 챙기고 지금 당장 떠야한다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방금 불안한 기운을 느꼈어요. 저희를 눈치챈 걸지도 몰라요, 빨리!”

우리는 허겁지겁 방으로 올라가 짐을 챙기고 나왔다.

숙소에서 나가기 전에 주인에게 한 마디 인사라도 남기려 했는데, 어디갔는지 보이질 않아 포기했다.

“빨리, 빨리 나가… 윽!”

급하게 문을 열던 아린이 깜짝 놀라 한 발짝 물러섰다.

문 밖에 사람들이 서있었다.

한 두 사람이 아니다. 이 도시 사람들 전체가 몰려온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끝이 보이지 않는 인파가 이 숙소 앞에 바글바글 몰려있었다.

탁하게 풀린 눈동자를 보니 제 의사로 여기까지 걸어온 것 같진 않았다.

“버, 벌써 이렇게….”

아린이 당황하며 중얼거렸다.

우리는 모두 전투 태세를 갖췄지만, 그들은 숙소 안으로 들어올 생각은 않고 그저 이 숙소 전체를 빙 둘러싼 채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아. 지금이라면 탈출 할 수 있을지도.”

“어떻게?”

세리아가 우리에게만 들리게 조용히 속삭였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그냥 밀치고 지나간다고 그들이 순순히 비켜줄까?

그렇지만 세리아의 대답은 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녹여서 길을 뚫을까? 그 사이로 탈출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뭐라고?”

나는 내가 잘못 이해했기를 바랬다.

“마력이 바닥나긴 하겠지만, 전력으로 힘을 쓰면 우리가 지나갈 길 정도는 뚫을 수 있어.”

“세리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어… 사람들한테 마법을 쓰겠다는 걸로 들렸는데, 아니지?”

아린과 유니가 경악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냥 해본 소리야. 그런 방법도 있다고.”

세리아는 우리 모두에게서 경악과 당황으로 가득찬 시선을 받자 고개를 홱 돌리며 작게 말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고개를 돌린 방향은 제렌 씨가 있는 방향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정 안 되면 그런 방법도 있겠죠.”

“절대 안 돼요!”

아린이 단호히 소리쳤다.

“용사님. 저들은 그냥 조종당하고 있을 뿐이에요. 행여라도 이상한 생각은 품지도 마세요.”

아린은 내가 세리아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경고했다.

“당연하지. …절대 무고한 이는 베지 않아.”

세리아. 농담치고는 너무나 지독한 발언이었어.

“나는 그냥… 모두가 살 방법을….”

세리아가 중얼거렸지만 너무 작은 목소리라 아무도 듣지 못했다.

“에릭. 어쩌지?”

불안해하는 유니의 목소리.

슬프게도, 우리에겐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이 하나밖에 없었다.

기다리기.

차마 저들을 공격할 수는 없다.

저 쪽에서도 우리를 공격할 의사가 느껴지지 않는 걸로 봐서는, 세리아의 말처럼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고만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아마 그 사람, 아니 마족은 이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겠지.

우리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그들과 마주하며 대치했다.

10분, 아니 5분 정도가 지났을까?

인파 사이로 서서히 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오네요.”

“혹시 루엘라일까?”

“아무리 사천왕이라도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도시 사람 모두를 제압하는 건 불가능해.”

유니의 조심스러운 추측을 세리아가 곧장 부정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루엘라가 했다기에는 너무 빠르다.

이런 규모의 마법이라면 고작 하루이틀 만에 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음마라면?

꽤 오랜 시간동안 여기에 숨어들었을 음마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내 이런 의문을 입밖으로 내지 않아도,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맨 앞 줄의 사람들마저 비켜서자, 우리는 그제야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과 마주할 수 있었다.

아니, 장본인이 아니라 장본인들이었다.

두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한 명은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루엘라!”

그 때와 똑같은 얼굴을 한, 익숙한 녹색 머리의 여자가 미소지었다.

“오랜만이에요, 여러분.”

“역시 여기 있었군요.”

아린이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루엘라는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응은 그녀 옆에서 튀어나왔다.

“안녕, 귀여운 신관아가씨. 우리 구면이지?”

“…수, 수녀님?”

아린은 자기한테 말을 건 여자를 바라보고는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수녀라고? 저 여자가?

“수녀?”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유니가 되물었다.

“…교회에 있던 수녀야. 도망갔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아예 잘못 생각하고 있었나보네.”

교회라면, 아린이 덮쳐질 뻔했다는 그곳 아닌가?

그렇지만 눈 앞의 여자는 아무리봐도 수녀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검은 스타킹과 높은 힐.

화장은 창녀의 화장 못지않게 진하고, 그녀의 수녀복은 한 사이즈 작은지 몸에 쫙 달라붙어 몸매를 여실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심지어 옆부분은 트여있어 그녀의 다리와 허벅지가 그대로 다 드러났다.

“자매님, 오랜만이에요. 아니, 오랜만은 아닌가? 꺄하하!”

“…인간이 아니셨군요.”

그녀가 수녀처럼 보이지 않는 가장 큰 이유.

그것은 그녀의 등에 커다란 박쥐날개가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음마….”

그녀에게서는 진한 향이 느껴진다.

사람들을 홀리고, 타락시키는 더러운 향기다.

그녀는 자기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네가 용사구나? 역시 닮았네.”

그리고는 제렌 씨를 쳐다봤다.

“흐응…. 그래, 그렇구나.”

뭐지?

그녀가 다시 키득 웃자 옆에서 루엘라가 타박을 놓았다.

“세라, 진정해요. 이러려고 온 거 아니잖아요?”

“맞는데?”

“하아….”

루엘라는 세라라는 여성의 대답에 한숨을 쉬더니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제가 설명을 좀 해야겠네요. 괜찮으시죠?”

“…무슨 속셈이야.”

나 또한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그녀들을 보호했다.

“꺄아, 귀엽다! 애써 폼 잡는 모습을 보니 그거 생각나네. 얘, 너 그거 아니? 사실….”

“세라, 말이 많아요.”

“…후후, 나중에 누나한테 찾아오면 재밌는 거 잔뜩 알려줄게.”

그녀는 나한테 부담스러운 윙크를 보내며 묘한 호의를 보였다.

속지말자. 그녀는 적이다.

이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 중 하나다.

마왕의 지팡이라고 불리는 사천왕 루엘라.

그녀와 같이 다니는 걸 보면 아마 그녀도….

“당신도 사천왕이었군요.”

“에휴, 그 명칭 엄청 촌스럽지 않아? 대체 누가 지은 거야?”

아린이 입술을 깨물며 그녀를 노려봤지만 세라는 가볍게 받아냈다.

“내 소개를 할까? 난 세라. 너희 예상대로 마왕님을 섬기는 그 분의 갑옷….”

“세라, 제발 나불거리지 말고 닥쳐요.”

“아핫, 말하지 말라네 미안!”

순간 적이지만 루엘라에게 왠지모를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저를 쫓아 여기까지 오셨군요. 제법 도주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어떻게 눈치를 채셨나 몰라.”

“인간의 저력을 너무 낮게 평가하는 거 아냐?”

세리아가 비아냥거리자 루엘라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후후. 그렇군요. 하긴, 인간은 발전하는 생물이죠.”

“무슨 소리야?”

“뭐, 됐어요. 이 얘길 하려고 온 건 아니니.”

그녀는 세리아의 의문을 일축하고선 다시 우리 전체를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여러분이 하는 얘기는 잘 들었어요. 나가서 이 도시의 진실을 알리겠다고 하셨던가?”

전부 새어나갔나?

아니, 그렇지만 여긴 우리밖에 없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덜컹!

뒷문이 열리고 사라졌던 가게 주인이 공허한 눈동자로 터벅터벅 들어왔다.

“설마 조종만 하는게 아니라 소리까지….”

“후후, 신기하지? 너도 조금만 노력하면….”

“세라!”

아린을 바라보며 무언가 또 정보를 흘리려던 그녀를 루엘라가 통제했다.

세라는 입을 비죽이며 루엘라에게 혀를 쏙 내밀더니, 루엘라가 자기를 돌아보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뗐다.

“…하아. 들뜬 마음은 이해하지만 제발 좀 조용히 있어요.”

“그치만… 흥, 그래 알았어. 조용히 있으면 될 거 아냐.”

팔짱을 끼고 툴툴 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봐도 영락없는 인간 그 자체였다.

대체 뭐지, 이 분위기는.

분명 심각한 상황인데 자꾸 손에서 힘이 빠지려고 한다.

“흠흠… 아무튼. 어수선하니까 짧게 전달하죠.”

루엘라도 분위기가 풀어지는 걸 눈치챘는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모았다.

“여러분들은 여기서 나갈 수 없어요.”

역시 그런 거였나.

아무래도 그녀들은 우리가 이 도시의 진실을 밖으로 전달하는 걸 막으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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