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짐꾼-89화 (89/236)

〈 89화 〉 [짐꾼] 밑작업

“왜, 왜 여기에…”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앉으시죠.”

내가 옆 자리를 가리키자 그녀는 얌전히 앉았다.

상황에 납득했다기 보다는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이해를 못한 것 같았다.

“저기, 그….”

“자, 자. 우리 새로운 여왕님을 위해 뭐라도 내어드려야지!”

사장은 미리 합의했던대로 호들갑스럽게 행동하며 아린에게 뭐라 말 붙일 틈 하나 주지 않았다.

“저, 저기…!”

“차 좋아하나? 아니면 그냥 물로 가져다드릴까? 뭐든 말만 하게!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으니.”

아린은 어쩔 줄 몰라하며 나를 바라봤다.

자기 말은 듣지도 않으니 믿을 구석이 나밖에 없는 것이다.

“사장님. 일단 진정하시죠.”

“아, 그렇지 참! 내가 너무 호들갑을 떨었구만. 미안해.”

내가 한마디 툭 던지자 그는 미리 정해뒀던대로 금세 조용해졌다.

자기 말은 듣지도 않던 그가 내 말을 듣자 아린은 의아한 듯 잠시 나를 보더니,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기… 이제 질문을 좀….”

“아아, 그랬지. 뭘 물어본다고 그랬지?”

그러나 아린은 막상 기회가 생기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른 걸 찾기 시작했다.

“세리아는 어디있죠?”

“같이 있던 그 마법사? 자리를 하나 내어줬지. 필요한가?”

“네… 불러주시겠어요?”

그랬나?

세리아가 어디있는지는 별 관심이 없어서 몰랐네.

그가 손뼉을 치자 왠 떡대 하나가 나와 고개를 끄덕거리며 세리아를 데리러 갔다.

세리아가 들어오기 전까지 그는 다시 공연얘기로 화제를 되돌렸다.

“그보다 정말 오늘이 처음인 것 맞나? 처음이라기엔 너무나 익숙해보이더군!”

“네? 다, 당연히 처음이죠! 제가 언제 이런 걸…!”

“흐음… 그런 것치곤 너무 잘하시던데.”

내가 턱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하자 아린이 움찔했다.

“하하! 처음이라면 오히려 좋네. 대단한 재능 아닌가! 정말 여기서 일해볼 생각 없어? 이 가게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지.”

“피, 필요없어요….”

아린이 나를 힐끔 바라보곤 답했다.

“사장님. 데려왔습니다.”

타이밍 맞게 떡대가 세리아를 데려왔다.

세리아는 아린을 보고 미소지었다.

“에리, 공연 잘 봤어.”

“…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진심이야.”

세리아가 내 맞은 편에 앉자, 아린은 세리아와 가까워지는 것 대신 내 쪽으로 몸을 굽혔다.

역시 아직 오해는 풀리지 않은 것 같다.

미안하다…!

“자, 그래서 관계자들이 다 모였군. 대체 뭐가 그리도 궁금해서 이렇게 찾아오셨나?”

그는 자기 의자에 털썩 앉으며 나와 시선을 교환했다.

“음….”

세리아는 무엇을 먼저 질문할지 잠시 고민했다.

잠시 찾아온 침묵 속에서 정신을 가다듬은 아린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오자마자 절 납치하지 않나, 미리 준비된 무대에 다짜고짜 사람을 세우질 않나… 대체 이게 무슨 짓이죠?”

오, 화난 건가?

하긴 이런 상황에서도 화가 안 나면 사람이 아니지.

“오, 그건 말이지….”

“어설픈 변명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여기 앉아있는 이유는 당신께 물어볼게 있어서입니다. 아니었으면 벌써 나갔을 겁니다.”

냉랭하기 짝이 없는 말투다.

말에서 고드름이라도 뚝뚝 떨어지겠구만.

“음….”

“저희가 바로 찾아올 거란 사실은 또 어떻게 아셨죠? 무대가 미리 준비되어 있던데.”

“…보였으니까.”

“뭐라구요?”

사장이 슬쩍 웃자 아린의 표정이 한 층 더 차가워졌다.

쫄지마라! 사장 너는 약속했던 대로만 하면 돼!

“자네가… 이 쪽의 인간이라는 게 보였으니까.”

아린의 표정이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얼굴로 변했다.

일단 확실히 긍정적인 표정은 아니었다.

“…어쩐지.”

“뭐라구요?”

세리아가 피식 웃으며 한 마디 거들자 기분이 상한 아린이 홱 그녀를 쏘아봤다.

“아니, 그야 그렇잖아? 전에도 마법으로 속이고 에릭한테 알몸… 읍!”

아린이 황급히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선 내 눈치를 살짝 보았는데, 차가운 표정에는 이미 금이 가있었다.

목 뒷덜미에 흐르고 있을 땀방울이 보이지 않아도 선명하다.

“…으음.”

나는 살짝 경멸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의 나는 그녀의 설교를 듣고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예비 교인이다.

자기가 존경하는 스승이 사실은 개변태였다는 것을 알게 된 제자의 표정!

자기 얘기를 열심히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 이런 관계에 더욱 목말라했던 그녀에게는 치명적인 상황이리라.

물론 그녀 자체의 명예에 큰 상처가 남는 일이기도 하고.

“…그, 그건 사실이 아니… 아니, 읏….”

아린은 신관으로서 양심에 찔리는지 쉬이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녀의 이런 모습은 실망스럽게 비칠 수 밖에 없다.

“흐… 뭐, 너무 상심할 필욘 없네. 누구나 다 그런 음습한 욕구 하나쯤은 품고 사는 거 아니겠는가.”

사장이 위로 같지도 않은 위로를 던졌다.

이건 미리 합의된 대사가 아니니까 본인 딴에는 진심으로 하는 위로일 것이다.

그녀에게는 오히려 비난처럼 들리겠지만.

“…신관… 아니, 아린 님께선 그런 걸 좋아하시는군요.”

“으, 으읏….”

신관이라고 부르려다가 이름으로 바꿔부르는 척을 했다.

저 사장은 아린이 무슨 직업인지 모른다.

아마 신관이라는 걸 알았다면 이렇게 태평하게 앉아있을 수는 없겠지.

대충 아린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교회 사람을 이런 천박한 무대에 세우겠다는 발상 자체가 말이 안 되니까.

그렇지만, 여기는 이미 이단의 땅이거든.

종교의 권위는 바닥으로 추락하다 못해, 교회마저 유사 창관으로 기능하는 판국이다.

아마 그녀가 이 곳 교회 참회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알면 까무라칠 거다.

“후후… 욕망에 솔직한 것이 뭐가 나쁘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인데. 우리는 그 자연스러움에 맞춰 살아가고 있는 것 뿐이네.”

“…이, 이런 행위는 용납받지 못해요…!”

“이미 교회도 허가했는데? 바로 옆에 지어진 것을 보면 모르겠는가? 슬슬 솔직해지게.”

분명 믿지 못하겠지. 그렇지만 전부 사실인… 뭐야, 별로 안 놀라네?

아, 그러고보니 얘네 여기 오기 전에 교회도 들렀다 왔지.

설마 보고 왔나?

“자네는 변태야. 그리고 우리는 그런 변태들을 환영하지. 자네가 있을 곳은 바로 여기밖에 없어.”

아니 이 자식, 은근슬쩍 아린을 빼먹으려고 하네?

연기 맞지?

“윽, 으읏….”

아린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변명은 불가능했다.

수많은 남자들 앞에서 허리를 흔든 건 그 누구도 아닌 본인의 의사니까.

“자, 우리와 함께 가세. 그 재능은 썩히기엔 너무나도 아까워.”

그는 그러면서 은근슬쩍 계약서를 내밀었다.

이 자식 어디까지가 연기인지 모르겠네.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아린. 아직 저 계약서를 집을 생각은 없는 것 같다.

물론 그녀가 이런 거에 서명할 일은 없겠지만, 지금 그녀의 정신은 많이 무너진 상태. 이런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다.

나는 계약서를 빼앗고선 아린에게 잘 보이는 각도에서 갈기갈기 찢었다.

“제, 제렌 씨…?”

“무슨 짓인가!”

그가 펄쩍 뛰었다.

내가 보기에 뛰어오른 높이 중 팔 할 쯤은 진심이다.

“더 이상 그녀를 모욕하지 마십쇼, 사장님.”

먹히나?

시발 좀 촌스럽나?

“앗….”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걸 보니 어느정도는 먹힌 것 같다.

“오늘 있었던 일은 사장님이 거의 억지로 떠밀어서 일어났던 거 아닙니까?”

아니다.

살짝 등을 떠민건 맞지만, 결국 지가 하고 싶어서 한 거다.

“처음에 그렇게 하기 싫어했는데 빨리 하라고 눈치주고, 그러니까 억지로 한 거잖습니까.”

아무도 눈치 안 줬다.

걍 지가 기분 좋아져서 알아서 흔들었다.

“…그렇죠?”

아린은 당황한 얼굴로 내 시선을 피했다.

갈 곳을 잃은 손은 허공을 빙빙 맴돌고, 얼굴은 양심으로 달아올랐는지 새빨갛다.

내 변명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솔직하게 다 밝힐 것인가?

“…마, 맞아요.”

그녀는 타협을 선택했다.

***

“후우….”

내 한숨소리에 아린이 움찔거리며 내 눈치를 봤다.

“…오늘 일은 잊겠습니다.”

“그, 그게… 저… 고, 고마워요.”

아마 왜 내가 여기에 있는지부터 이것저것 묻고 싶겠지만, 아린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당당하게 철면피를 깔고 물어볼 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후후… 아린, 그래도 즐거워보이던데. 우리 몰래 막 가는 거 아니지?”

“아, 아니에요! 세리아 당신은 왜 자꾸 이런….”

아린은 능글맞게 장난치는 세리아에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

그에 따라 자연스레 나와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이런, 부딪히겠습니다.”

난 그녀를 슬쩍 밀어 원래 자리로 되돌렸다.

“아….”

그녀는 그제야 자기가 너무 나와 붙어있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읏, 미, 미안해요….”

그녀의 얼굴에는 수치와 회한이 가득했다.

차마 하늘이 부끄러운지 고개도 제대로 치켜들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그 상태로 세리아를 바라보았다.

세리아는 키득거리며 부끄러워하는 아린을 내려다보며 즐거워하는 중이었다.

얘도 참 성격 많이 더러워졌네.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야할 텐데, 언제 한 번 날 잡고 교육 좀 시켜야겠다.

나와 아린, 세리아 셋이서 돌아가는 길.

길거리에는 천박한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수두룩하지만, 우리 셋은 아무도 거기에 신경쓰지 않았다.

이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나머지는 그녀가 스스로 굴러떨어지길 기다리면 된다.

물론 그녀가 다시 제발로 찾아갈 때까지 약간의 도움은 주겠지만, 아무튼 가게에 찾는 건 그녀 스스로의 판단이어야만 한다.

그래야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기지.

나는 숙소 문을 당당하게 열고 들어갔다.

“응?”

유니가 우리를 먼저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제렌 씨랑 왜 같이 들어와?”

아린, 그 다음에는 유니.

기다려라. 너까지도 언젠가는….

나는 그 날을 기다리며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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