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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짐꾼-87화 (87/236)

〈 87화 〉 [용사] 음마의 도시

쭈뼛거리던 그녀는 곧 자신감을 되찾더니 도발적으로, 그리고 관능적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호오! 처음이라더니 아주 능숙하군 그래!”

이 가게의 단골처럼 보이는 영주가 감탄할 정도로 그녀의 움직임은 자연스러웠다.

그래, 누가 저 모습을 보고 오늘 처음 무대에 선 신인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역시 그 홍보문구는 거짓이었던게 분명하다.

그냥 저 에리라는 여자는 아린과 매우 닮았을 뿐인 사람.

그 뿐이다.

“…아린?”

유니가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시끄러운 음악소리에도 묻혀 제대로 들리진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니 예상이 간다.

아린이랑 너무 닮았으니 놀랄 수밖에 없겠지.

잠시 눈을 치켜뜨고 그녀를 바라보던 유니는 나를 바라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뭐라고 얘기하는지 하나도 안 들린다.

내가 못 알아듣자 유니가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귓가에 대고 직접 속삭였다.

“왜, 왜 아린이 저기있어?”

“아냐, 닮았지만 다른 사람이야. 봐, 문양이 없잖아.”

“…그렇긴 한데….”

유니는 쉬이 납득하지 못한 분위기였다.

그야 그렇지.

누가 봐도 저 여자는… 아린이다.

아니, 아린이 아니다.

아린이 저기 서 있을리도 없고, 아린이여서도 안 된다.

유니는 딱딱하게 굳은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물러났다.

무언가 할 말이 많아보였지만, 지금은 그녀를 신경써줄 수가 없었다.

더 찾아야만 했다.

그녀가 아린이 아니라는 증거를.

그래, 아린은 저렇게 천박한 짓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저 여자처럼 자기 겨드랑이를 함부로 보여주지도, 저렇게 음탕하게 허리를 흔들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저 여자를 보고 흥분하는 건, 아린을 보고 흥분하는 것이 아니다.

“크흐, 저 여자 재능이 있군. 남자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어. 어디서 저런 원석을 구했지?”

영주는 만족스러워하며 술을 계속 들이켰다.

그의 바지가 빵빵하게 부풀어있는게 보기 조금 역겨웠다.

“저 여자가 맘에 들었나? 하하, 나도 마찬가질세! 이거 참, 여기에 자주 와야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군그래.”

그는 내 등을 탁탁 두드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왠지 좀 기분 나빴다.

에리는 아린이 아닌데.

다른 남자들이 그녀를 보고 더러운 고추를 세워도 나랑은 관계 없는 일일텐데.

자꾸 아린이 성욕의 대상으로 쓰이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나는 내 하반신에 피가 쏠리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 사람 다음에도 공연을 하는 겁니까?”

문득 그가 했던 말이 신경쓰였다.

자주 오겠다고?

그 말은 그녀가 앞으로도 계속 여기에 나타난다는 뜻 아닌가?

“뭐, 신입이랬으니 그렇지 않겠나. 보통은 하루 쉬고 하루 공연을 하지. 내일은 쉴테니 아마 이틀 뒤가 되겠구만, 껄껄.”

그 말을 들은 나는 확신했다.

그녀는 아린일 리가 없다고.

아린은 이 도시에 계속 머물지도 않을 거고, 이틀 뒤에 다시 이런 곳에 찾을 일도 없을 것이다.

정 의심된다면 이틀 뒤에 그녀가 어디 가는지만 살펴봐도 곧장 밝혀지지 않겠는가.

그래. 역시 아린일 리가 없지.

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

유니는 여전히 찡그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표정이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잠깐 나와 시선이 마주친 유니는 화들짝 놀라더니 인상을 풀고 어색하게 웃었다.

“와아아아!”

“에리! 에리!”

그러는 사이 에리의 첫 공연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마지막에 잠깐 눈이 맞은 것 같았는데, 착각이겠지?

“크으, 최고야, 최고!”

옆에 앉은 영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까지 박수를 치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좋아할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히 대단하기는 했지만.

“후우… 그래.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라고?”

열정적인 환호를 보내며 몸의 열기가 다 빠져나갔는지, 어느정도 진정한 그가 우리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유니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사정을 설명했다.

“흠… 그러니까 이 도시에 정령이 하나도 없다고?”

“네! 이거 정말 이상한 일에요. 자연적으로는 결코 그렇게 될 수가 없거든요.”

“음….”

그는 난감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 건에 대해서는 딱히 짐작가는게 없군. 이 도시에 정령사 같은 건 없거든.”

“혹시 이상한 일은 없었나요? 예를 들면 갑자기 도시가 달라졌다던가!”

“유, 유니….”

너무 노골적인 거 아냐?

영주가 예민하게 반응할까봐 걱정했는데 그는 유니의 말을 듣고는 껄껄 웃었다.

“역시 자네들도 의심하는가? 이 도시가 몽마에게 잡아먹혔다느니 그런 소문들을?”

“앗…! 아, 아니에요!”

유니가 깜짝 놀라 부인했지만, 어색한 태도는 도리여 그의 말이 맞았음을 시인하는 모습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아냐, 아냐. 그리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지. 밖에서 볼 때 우리는 확실히 비정상일테니까. 그렇지만 말일세, 반대로 생각해보라고. 이게 뭐가 문제지?”

그는 화를 내거나 우리를 쫓아내는 대신 도리여 질문을 던졌다.

뭐가 문제냐니, 그야 이건… 음….

“여신님께서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하셨던가? 아니, 그 분은 단 한 번도 이런 밤놀이를 부정하신 적이 없네. 전부 후대 사람들이 해석하고 덧붙이면서 생겨난 금기일 뿐이지.”

그런 건가?

자세히 배워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답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처음 들었다는 표정이군. 그럴만해. 나도 이 사실을 수녀님께 듣기 전… 응? 아, 술이라고? 고맙네.”

그는 한 여자가 건넨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크흐… 무슨 얘기 중이었지? 아, 그래, 그… 음… 이상하다, 좀 피곤하군.”

뭐라 더 얘기를 하려던 그는 급격히 피로가 몰려오는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으음, 그래… 그… 아무튼 그걸세. 정령 어쩌고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우리 도시는 떳떳하네. 교회가 버젓이 운영되고 있다는게 그 증거 아니겠는가…? 애초에, 이건 전부 수….”

말하면서 점점 비몽사몽해져가던 그는, 결국 말을 하다말고 고개를 푹 숙이더니 곧장 잠들어버렸다.

“마, 말하면서 잠든거야?”

“그런가봐…?”

당황한 유니가 내 팔을 잡아당기며 자기가 본 게 맞냐고 물었지만, 그건 되려 내가 묻고 싶은 소리였다.

“죄송하지만 두 분, 영주님이 많이 피로하신 관계로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비용은 저희가 지불할테니 먼저 나가주십시오.”

호위를 서던 여성이 정중한 태도로 우리를 밖으로 내쫓았다.

조금 갑작스럽지만, 이미 영주가 잠들어버린 마당에 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린 어리둥절한 채 그대로 숙소에 돌아왔다.

***

숙소에는 우리 둘 말고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네?”

가게 안에 둘의 모습이 안 보이길래 미리 도착했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안 돌아왔나?

방에도 없는 걸로 봐선 정말 아직 안 돌아온 것 같다.

찾으러 나갔다가 괜히 엇갈리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무슨 일이 생긴게 아니라면 금방 올 테니까.

끼익.

아니나 다를까, 오래 기다리지 않아 문이 열렸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돌렸지만, 나타난 건 둘이 아니라 셋이었다.

세리아, 아린, 그리고 제렌 씨.

어? 왜 셋이지?

“응? 제렌 씨랑 왜 같이 들어와?”

“아, 그….”

“오다가 만났어.”

세리아가 조금 당황해하는 아린 대신 대답했다.

“이야, 간만에 좀 놀러 갔는데 두 분이 딱 계시지 뭡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하하.”

“제, 제렌 씨!”

아린이 당황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무척이나 당당했다.

“왜 그렇게 놀라, 아린? 우린 얘기만 하고 왔잖아.”

“…….”

세리아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용사님. 그거 아십니까? 천의 얼굴에 신입이 들어왔는데, 신관 아가씨랑 정말 비슷하게 생겼더군요. 보셨으면 정말 깜짝 놀라셨을 겁니다.”

“……그렇군요.”

표정 관리가 안 된다.

아린의 얼굴을 보면 자꾸 그 여자가 생각난다.

어두워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린과 너무나도 닮은 그 여자가.

“그래도 아쉽더군요. 더 이상 무대에 오를 일은 없다고 하니.”

“네? 그게 무슨….”

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주변 사람들이 반대했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얼굴이 팔리면 안 되는 사람인 것 같던데… 화려하게 데뷔해놓고 아쉽게 됐습니다.”

“흐읏….”

그의 말에 아린이 흠칫했다.

평소라면 별 생각 없이 넘어갔을 텐데, 자꾸만 의심이 쌓이니 그 사소한 동작 하나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오늘이 마지막.

그 말은 더 이상 아린이 ‘에리’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단이 없어진다는 것 아닌가?

안 된다.

그러면 내 가슴 속 의심을 풀어낼 수단이 없어진다.

의심을 풀지 않으면… 나는 평생 아린을 의심하며 살지도 모른다.

“크윽….”

“에릭? 왜그래?”

유니가 인상을 찌푸린 나를 보며 물었다.

제길… 또 동료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은데.

“아, 에릭. 그보다 너희는 뭐 알아낸 거 있어?”

“…어, 뭐? 아, 그… 딱히 없어….”

세리아가 적절히 화제를 돌려준 덕분에 유니에게 해줄 변명을 찾지 않아도 됐다.

나는 우선 주어진 화제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럼 아무래도 우리가 정답을 찾은 것 같네. 아린, 설명해줘.”

“…네? 아, 뭐, 뭐라고 하셨죠?”

아린은 굉장히 지쳐보였다.

표정도 멍하고 몸도 축 늘어져 있는데다가 지금 하는 얘기를 듣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휴우… 아냐, 내가 할게.”

세리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역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에릭. 이 도시는 이미 마물에게 점령당했어.”

그렇지만 내 의심 따위, 현실 앞에서는 한낱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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