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용사] 밤의 도시
밤의 도시 아세일라.
참으로 그 별명에 걸맞는 도시였다.
오랜 여정 끝에 우리는 아세일라에 도착했다.
저 멀리 성문이 보일때까지만 해도 여느 도시들과 다를 바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성문 안으로 한 발짝 발을 들이자마자 마치 다른 세상에 와버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우선은 냄새.
사방에서 진한 향수 냄새가 진동했다.
세리아가 예전에 쓰던 향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독해 코가 금방이라도 마비될 것 같았다.
“으… 용사님, 빨리 들어가죠.”
아린은 특히나 그 냄새에 약한지 코를 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표정이 안 좋기로는 다들 마찬가지였다.
몇 번 와본적 있다던 제렌 씨만이 멀쩡했다.
“숙소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여기서 멀쩡하게 숙박업만 제공하는 곳은 거의 없거든요.”
“여관이 그거 말고 다른 일도 해요? 뭔데요?”
유니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거 왠지, 들으면 안 될 거 같은데….
“그야 당연히 창….”
“빠, 빨리 가죠!”
다행히 더 말이 나오기 전에 아린이 황급히 그의 말을 잘랐다.
“창?”
“별 거 아니에요, 유니. 빨리 안내해주세요.”
고개를 갸웃하는 유니의 등을 떠밀며 아린이 찌릿 그를 째려보았다.
말이 끊긴 제렌 씨는 잠시 우두커니 서있다가 곧 앞장서서 우리를 안내했다.
“확실히 좀 느낌이 안 좋긴 하네. 그치?”
세리아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지만, 이미 세리아는 저만치 앞에 가있었다.
뻘쭘해진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녀들의 뒤를 쫓았다.
거리 자체는 딱히 특별한 게 없었다.
어느 도시가 다 그렇듯 흙먼지가 이는 대로와 누런 건물들.
오직 사람들만이 이상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하나같이 거의 헐벗다시피 한 채로 다니는 사람들.
눈 둘 공간이 없어 난감할 지경이다.
“으읏….”
대체 이게 무슨 꼴인가?
왜 저 옷은 입었는데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지?
거리 한복판에서 저렇게 배꼽과 다리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다녀도 괜찮은 건가?
“어머, 귀여운 일행이네. 놀다 갈래?”
“아가씨들! 기술 좋은 남자 필요 없어?”
대로 한가운데를 걷는 우리의 양옆으로 온갖 호객행위가 난무했다.
그들에게 있어 새빨개진 얼굴로 바닥만 보며 걷는 우리들은 그저 귀여운 장난감인 것 같았다.
“이런 여자 같은 손으로 칼을 휘두르고 다니는 거야?”
한 여자가 갑자기 나한테 다가오더니 뜬금없이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와악! 아, 아니에요!”
뭐가 아니지?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말이 헛나왔다.
“아하하! 뭐가 아니란 거야? 웃겨. 혹시 검이 아니라 이걸 쓰는 쪽인가?”
스윽.
그녀의 손이 아주 자연스럽게 내 바지 속으로 들어온다.
“으, 으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녀를 피해 도망쳤다.
내 뒤로 여자들이 깔깔 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수치스럽고 분했다.
대체 이 정신나간 도시는 뭐란 말인가?
“에, 에릭! 빨리 이리와.”
유니가 험한 꼴을 겪은 내 팔을 붙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여기 좀 이상한 거 같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 도시에 정상인은 아무래도 우리밖에 없는 것 같다.
“와, 오빠는 제법 힘 좀 쓰겠는데? 나 별로 안 비싼데 어때?”
제렌 씨도 나와 비슷한 고충을 겪고 있는지, 화장이 진하고 가슴이 큰 여자 하나가 그에게 접근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꽤 거리가 있는데도 그 냄새가 여기까지 진동할 정도였다.
탁!
그러나 그 여자가 내민 손은 제렌 씨의 가슴팍에 닿지 못했다.
세리아가 인상을 쓰며 그녀의 손을 쳐냈기 때문이다.
“꺼져.”
“흐응, 임자가 있구나? 난 딱히 상관없는데.”
자꾸만 질척거리는 그녀에게 세리아는 스태프를 쑥 내밀며 협박했다.
“여기서 타죽어볼래?”
“흥, 질투 많은 여자는 인기 없거든! 됐어!”
제아무리 정신나간 여자라도 마법사와 싸우고 싶지는 않았는지, 그녀는 한 마디 투덜거리고는 사람들 사이로 쏙 숨어들어갔다.
세리아의 협박이 효과가 있었는지 사람들은 우리를 대놓고 음흉한 눈으로 훑어보기는 해도 더 이상 다가와서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저기… 숙소는 아직인가요?”
우리 사이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아린이 제렌 씨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그녀는 마치 오밤중에 묘지를 걷는 어린아이처럼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
역시 그녀에게는 너무 자극이 과한 장소인걸까.
아무리 의심스럽다고는 해도 이런 장소에 온 건 괜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뒤늦은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도착했습니다.”
숙소는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다.
조금 허름하긴 해도 제법 큰 건물이었다.
“여기 주인장과 아는 사이라서요. 부탁하면 편의도 조금 봐줄 겁니다.”
“오오!”
유니가 눈을 빛내며 좋아했다.
이 사람 생각보다 인맥이 넓구나.
나는 새삼스레 감탄했다.
“자, 들어가시죠.”
그는 우리를 익숙한 손짓으로 안내했다.
방은 2개를 잡았다.
제렌 씨와 내가 쓰는 남자방. 그리고 여성진이 쓰는 방.
왕가의 증표 덕분에 숙박비 걱정은 덜었지만, 아무래도 무료로 1인1실을 쓰는 건 조금 내키지 않아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보았다.
방을 잡고난 뒤 우리는 짐을 풀고 조금 더 큰 방인 여성진의 방에 모였다.
원래라면 1층의 로비에 모여 얘기를 나눴겠지만, 솔직히 그런 곳에 더 오래 있고 싶진 않았다.
숙소는 멀쩡해도 거기 머무르는 사람들은 거리에 있던 사람들과 별반 다를게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더 노출이 심했다.
숙소 안이라서 그런진 몰라도 웃통을 벗고 있는 남자도 있었고, 심지어는 훤히 속이 들여다보이는 옷을 입고 있으면서 안에 속옷 하나 입지 않은 여자도 있었다.
나는 그녀의 출렁이는 가슴 한 가운데에 박힌 빨간 무언가를 보고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으으… 여기 너무 이상해.”
유니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제렌 씨만 빼고.
“보고를 듣긴 했지만 여긴 정말… 상상이상이군요.”
아린은 벌써부터 기운이 다 빠졌는지 힘이 없어보였다.
볼이 살짝 빨간 걸 보면 몸상태도 안 좋아보여 걱정된다.
“뭐… 그럼 빨리 볼일만 보고 나가자.”
세리아가 덤덤하게 말했다.
아까 화를 내던 모습이 남아있어서 그런지 조금 언짢아하는 것 같기도 했고, 불쾌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죠. 일단 여기서 저희가 해야할 일은 두 가지에요.”
아린은 우리 모두를 둘러보며 다시끔 우리의 목표를 정리했다.
“하나는 루엘라의 행방을 찾는 것. 여기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어요. 설령 있더라도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진 않을 테니까 솔직히 찾는게 그리 쉽진 않겠죠.”
루엘라가 정말 이 도시에 있을까?
그녀의 이미지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곳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여기를 택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숨어있다고 한다면 적어도 얼굴은 바꿨겠지.
설마 몸도 재생하는데 얼굴 하나 못 바꿀 것 같진 않다.
“또 다른 하나는 이 도시의 이상을 조사하는 것. 여러분도 보셔서 알겠지만 이 도시는 현재 정상이 아니에요. 분명 이렇게 변한데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겠죠. 그걸 찾아야해요.”
이 쪽도 만만치 않기로는 마찬가지다.
확실히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 도시지만, 대체 그 원인을 어떻게 찾아낸단 말인가?
뭘 어떻게 조사해야할지도 감이 안 잡힌다.
“그래서 어떻게 조사할 거야? 설마 이번에도 둘로 나눠서 하자고는 안하겠지?”
유니는 그동안 우리가 인원을 나눠서 조사하던 방식이 불만이었는지 다른 의견이 나오기 전에 먼저 자기 의견을 밝혔다.
그녀의 의견에는 나도 찬성이다.
다른 도시도 마찬가지지만, 특히나 이 도시에서는 우리 파티원들을 저 위험한 거리에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
“우리 다같이 돌면 시간이 오래 걸릴텐데?”
“그래도….”
세리아의 말에도 설득력은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녀들만 보내는 건 반대다.
너무 위험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한 곳 아닌가.
“난 아린이랑 세리아랑 같이 다니고 싶단 말이야!”
툴툴거리는 유니의 말에 둘은 잠시 놀라더니 곧 웃음을 지었다.
“저희도 마찬가지랍니다.”
“응. 당연하지.”
셋이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니 내가 다 기쁘다.
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자 제렌 씨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한 마디 보탰다.
“그럼 세 분이서 같이 다니면 되겠군요.”
난 잠시 셋이 같이 다닐 모습을 생각해봤다.
예쁜 여성 셋이서 남들과는 다른 복장으로 바깥을 돌아다닌다면…?
혹시 모를 가능성들을 하나씩 검토해보고 내가 소리쳤다.
“안돼!”
절대 안 된다.
보나마나 이상한 남자들이 꼬일게 뻔하다.
“차라리 그럴 거면 나도 같이…!”
“그래서야 다같이 다니는 거랑 똑같지 않습니까.”
…그 말대로다.
이래서야 그냥 다같이 다니자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잠깐, 그런데 같이 못 다닐 이유도 없잖아?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우리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아린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했다.
“아린, 그래서는 조사 속도가….”
“어차피 따로 다닌다고 금방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도 도시에 들릴 때마다 둘로 나뉘는 게 아쉬웠거든요.”
유니도 아린에게 찰싹 달라붙으며 동의의 의사를 격렬하게 밝혔다.
“뭐, 그거야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러면서 잠시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하자.”
사실상의 결정권자인 세리아마저 동의하자 더는 아무도 이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
***
그렇게 조사를 시작한지 사흘째.
우리는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히히, 찌찌 만지게 해주면 알려주지.”
세리아는 헐벗은 남자의 천박한 말투에 조용히 스태프를 집어들었다.
“어어… 그 마법사였어? 미, 미안!”
그러자 남자의 얼굴이 실시간에 창백해지더니 후다닥 도망쳤다.
대체 이게 몇 번 째인지.
여기 사람들은 다들 하나같이 뭐랄까, 성욕에 지나치게 솔직했다.
저 남자처럼 거의 벗고다니는 건 이미 일상이고, 골목길만 지나도 남녀의 신음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심지어 여기 있는 가게들 중 대부분은 성인용품점이고.
“하아….”
세리아는 스태프를 다시 허리춤에 걸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말고도 우리 모두 며칠간 반복되는 똑같은 문답에 지쳐있는 상태였다.
뭔가를 물어보려고 하면 자꾸 이상한 요구를 하고, 그럼 세리아가 또 그들을 내쫓는다.
얼마나 이 짓을 반복했는지 벌써 도시 전체에 우리에 대한 소문이 쫙 퍼졌을 정도였다.
굳이 그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 도시에서 멀쩡하게 옷을 입고다니는 건 우리들 정도밖에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지만.
“…이제 어디가서 물어볼까?”
유니가 잠시 망설이다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딱히 가볼만한 곳도 없었고, 있다 하더라도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이대로는 안 돼.”
세리아는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며 그렇게 단언했다.
“그렇기는 한데 다른 방법이 있나요?”
아린은 여전히 이 도시 분위기에 적응을 못했는지 새빨간 얼굴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덕분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건 나 아니면 세리아가 거의 맡아서 했다.
유니는 수색담당이니까.
“음….”
세리아도 딱히 대안이 있던 건 아니었는지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
나도 같이 생각해봤지만 좋은 생각이 떠오르진 않았다.
“후우… 대체 왜 이런 곳에….”
아린은 한숨을 쉬다 무심결에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들더니, 그 내용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 종이를 다시 내려놓았다.
“뭐였어?”
“…이, 이상한 광고요.”
가끔 가게 앞에 붙어있던 그런 광고들인 것 같았다.
가게 이름은 다 달랐지만 적혀있는 내용들은 다 비슷했는데, 새로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구인공지였다.
물론 그다지 멀쩡한 가게들은 아니었다.
“후후, 관심있으십니까?”
“히익!”
누군가가 바로 옆에서 말을 걸자 아린은 화들짝 놀라 내 쪽으로 달려왔다.
나와 세리아가 뒤늦게 반응했다.
“어이구, 저 그런 사람아닙니다! 그러니 무기 좀 내려놓으시지요.”
“…누구야?”
세리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미 몇 번이나 시달린 그녀는 더 이상 여기 사람들을 배려해주지 않았다.
“그거, 방금 아가씨가 읽어봤던 가게 주인입니다요. 후우… 역시 듣던대로 굉장한 미모군요.”
키가 작고 통통한 아저씨가 아린을 위아래로 훑어보자, 그녀는 내 뒤로 쏙 숨었다.
세리아의 표정은 당연히 한 층 더 험악해졌다.
“돼지구이 되기 싫으면 그냥 가던 길 가지 그래?”
“어이구야… 정말 소문 그대로군요.”
그는 세리아의 기세에 눌려 살짝 움츠러들었지만 물러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린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붙였다.
“아가씨, 어떠십니까. 저희랑 함께 일해보지 않겠어요? 아가씨라면 분명 업계 최고가 되실 수 있을 겁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도 뭐하지만 저희 가게는 아세일라에서 가장 크고 대우도 제일…”
“꺼져.”
세리아는 정말로 주문까지 외워가며 진심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허억… 오,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그런 가게 아닙니다!”
“마, 맞잖아요…!”
그가 필사적으로 변명하자 내 뒤에 숨어있던 아린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소리쳤다.
“어, 어떻게 그런 걸로 돈을 벌 생각을 하시는 거죠!”
“아, 아니, 그 정도면 충분히 건전….”
그 순간 내 눈에 유니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그 종이를 주워드는 모습이 들어왔다.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내려가던 유니의 눈동자가 중간에 딱 멈추더니, 곧 내 쪽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내용인데?
나는 그녀에게 말없이 신호를 보냈다.
유니와 함께 보낸 날이 몇 년인데, 이정도 의사소통은 말없이도 가능하다.
내 눈빛을 받은 유니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자기 옷을 가리켰다.
옷? 옷이 뭐?
유니는 내가 이해를 못하자 잠시 고민하더니 망설임도 없이 자기 옷을 휙 들어올렸다.
덕분에 그녀의 배꼽이 그대로 바깥에 노출되어버렸다.
군살 하나 없는 가는… 아니, 이상한 생각은 말자.
유니는 다시 자기 옷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람들 다니는 거리에서 대체 무슨 생각이지?
나는 당황해 그녀를 말리려고 했지만, 이내 그것이 곧 그녀가 보내는 신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옷을 벗어? 그게 저기 적혀있던 내용인가?
옷을 벗는다. 같이 일을 하자.
…스트립쇼구나!
아니, 지금 아린한테 그딴 걸 권유한단 말이야?
나는 아린을 내 뒤로 숨기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아니, 그러지 마시고 한 번만….”
퍼엉!
세리아가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그 남자의 발 바로 옆 부분을 미세한 강도로 터뜨려버렸다.
흙먼지가 사방에 휘날렸다.
“으윽… 새, 생각이 바뀌시면 언제라도 찾아오시길! 이 거리에서 제일 빨간 건물입니다!”
그는 도망치는 와중에도 꾸역꾸역 아린의 손에 자기 명함을 쥐어주었다.
“그럼 이만!”
남자는 접근했을 때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졌다.
“휴우, 그거 빨리 버려.”
세리아는 골이 아프다는 듯 머리를 감싸쥐며 손짓했다.
“기, 길가에 버릴 수는 없어요.”
아린은 당혹스러워하는 와중에도 꿋꿋이 자기 신념을 고집했다.
하긴, 아까도 그래서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웠던 거겠지.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저런 불결한 종이가 그녀에게 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
“그럼 나한테 줘. 내가 태워버리게.”
세리아가 손을 내밀자 아린은 당황한 얼굴로 그녀와 자기 손의 명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뭘 고민해?”
“…태, 태워도 재가 남으니까….”
이상한 곳에서 고집스럽다.
“도, 돌아가서 버릴게요!”
아린은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 조심스레 명함을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