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짐꾼] 설득
왕궁에서 있었던 사건이 마무리 된 이후, 용사 파티는 아세일라로 향했다.
진짜? 대체 왜?
얘네는 평생 들릴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아세일라가 어떤 도신가?
창녀의 도시.
긴 말 필요없이 이거 하나면 끝난다.
그런 퇴폐와 향락에 찌든 도시를, 이 어리숙한 용사 파티가 조사하러 가는 것이다.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그리고 동시에 이 기대와는 별개로 나는 본격적으로 아린의 타락을 위한 밑작업을 진행중이었다.
그 결과가 지금 이거다.
“태양은 곧 그 분의 눈이니, 말하자면 새벽은 아직 여신님의 눈이 뜨이기 전인 셈이죠. 각종 죄악이 이 시간대에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잠든 시간은…”
어쩌구저쩌구.
내가 왜 이 헛소리를 얌전히 듣고 있는가.
그야 아린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다.
요즘 아린은 이런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 굉장히 실망한 상태였다.
세리아나 용사는 대놓고 티를 내지 않았지만, 유니는 재미없다며 도망갔다.
아린은 그제야 자신의 설교가 정말 더럽게 재미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앗, 죄송해요. 또 저 혼자 신나서 떠들었네요.”
“아닙니다. 무척이나 흥미로운 얘기였어요.”
아린은 또 주절주절 떠들다 유니의 말이 기억났는지 입을 다물고는 내 눈치를 슬쩍 살폈다.
여기서 정말 더럽게 재미없네 시발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면 안 된다.
흥미롭게 들었다는 모습을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보여줘야하는 것이다.
에휴, 고작 이런 걸 위해 이렇게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해야 하다니.
“그럼 낮 시간에 나쁜 짓을 하면 그 여신한테 다 들킨다는 겁니까?”
“좋은 질문이에요! 이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들 오해하시곤 하는데….”
조금만 참자.
지금은 그녀가 좋아하는 화제로 대화를 하고 있으니 이렇게 화기애애하지만, 아직 그녀와 나는 더 깊은 얘기를 할만큼 친분이 쌓이질 않았다.
그녀가 얼마전까지 나를 거의 적대하고 있던 걸 생각하면 여기까지 온 것도 용할 지경이다.
아마 용사의 달라진 태도가 관계개선에 한 몫 했겠지.
나는 용사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그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잠시 쉬었다가죠.”
용사의 말에 다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누가 봐도 피로에 찌든 얼굴.
왕궁에서 실컷 놀고먹은 부작용이 이런 곳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게 관리 좀 했어야지.
한 번 풀어졌다고 이렇게 정신 못차리는 꼴을 보니 일류 파티로 나아가기는 글러먹었다.
봐라. 나는 이렇게 쌩쌩하지 않은가.
그들과는 달리 열심히 관리를… 하진 않았지.
뭐야, 왜 멀쩡하지?
너무 자연스러워서 눈치도 못챘는데, 요즘 체력이 부쩍 좋아진 것 같다.
지금도 내 등에는 무거운 짐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는데, 아무 것도 안 들고 다니는 파티 일행들보다 내가 더 쌩쌩하다.
뭐 체력이 그들보다 좋은 거야 어찌보면 당연한 거지만, 그래도 이 수준은 좀 상식을 넘은 것 같다.
설마 이것도 문신 때문인가.
아니 뭐 이렇게 기능이 많아?
슬쩍 둘러보니 세리아가 짐을 내려놓고 헥헥 거리고 있었다.
그래, 이제야 내 고충을 좀 알겠냐?
내 짐의 일부를 대신 짊어진 그녀는 입이 댓발 튀어나왔지만 나에게 불평불만을 뱉지는 않았다.
노예가 감히 주인에게 불평을 할 순 없는 노릇.
주인이 짐을 지고 가는데 노예 혼자 편하게 가겠다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딱 그녀의 체력을 고려해서 쓰러지지 않을만큼만 떠넘겨줬다.
체력도 단련하고 나에 대한 복종심도 기를 좋은 기회가 되리라.
그리고….
아까부터 강렬한 시선이 느껴진다.
제길, 한 번이라도 그냥 쉬면 안 되나?
한숨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고개를 돌리자 아린이 별 거 아닌 듯한 척을 하며 나에게 강렬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누가 보면 짝사랑하는 년인줄 알겠구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가 시작한 일인걸.
내 수중에 떨어지기만 해봐라.
여신상에 오줌이라도 싸게 만들어주지.
나는 머지않을 미래를 꿈꾸며 터덜터덜 그녀에게 다가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무엇이 궁금하시죠?”
아린은 방긋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종교 관련해서는 정말 한없이 친절해지는 여자다.
그렇지만 속아선 안 된다. 여기서 속옷 색깔 같은 거라도 물어봤다간 그대로 표정이 썩어들어갈 테니까.
그건 그것대로 볼만하겠군.
아무튼 원래라면 또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종교적 질문을 던져야할 차례지만, 슬슬 가벼운 화제전환 쯤은 시도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판단하고 슬쩍 운을 띄웠다.
“오늘은 마물들이 좀 많군요.”
“네? 아, 그렇죠. 사실 저는 하는 일이 별로 없어 이럴 때마다 좀 미안해진답니다. 그래서 궁금하신 점은?”
그녀는 그런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도 말라는 듯 단칼에 잘라버리고 화제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그다지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이렇게나 허무하게 막혀버리니 조금 당황스럽다.
이렇게 되면 그냥 솔직하게 밀어붙여야겠군.
돌려말하는 것보다는 이게 더 효과적일지도 모르겠다.
“섹스를 밤에 하는 것도 여신님의 눈을 피하기 위해섭니까?”
“…네?”
아린의 미소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대낮부터 섹스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지 않습니까. 다들 새벽에 섹스를 하는데, 그 말은 곧 사람들이 섹스를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섹스는 생명을 만드는 신성한….”
“아, 알겠어요! 알겠으니 강조하지마세요!”
아린이 빨개진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섹스 말입니까?”
“으읏… 네….”
아린은 숫처녀마냥 섹스란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재밌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아, 숫처녀 맞지.
생각해보니 남자랑 자본 적도 없으면서 돌멩이나 스태프 같은 걸로 자위하는 세리아가 미친년이었지, 아린은 정상적인 축이었다.
미친년이랑만 붙어먹다보니 나까지 이상해질 뻔했네.
지금부터라도 조금 거리를 두는 걸 생각해봐야겠다.
“…그, 그건… 생명을 만드는 행위를 소중히 여기라는 뜻이에요.”
역시 나 같은 생각을 한 놈이 제법 많았는지, 그에 대한 대답도 이미 교회는 가지고 있었다.
섹스는 아기를 만드는 신성한 행위고, 그렇기 때문에 그저 쾌락을 위해 행해서는 안 된단다.
이를 대놓고 드러내는 건 아직 올바른 성적 가치관이 확립되지 않은 어린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어쩌고… 아무튼 하지말란 소리였다.
나름 열심히 준비된 답변이었다.
제대로 안 들어서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뭐하는가.
이미 말하는 사람부터가 그걸 지키지 못하는데.
“그런데 신관님. 그럼 보지에 자지를 처넣는….”
“마, 말을 좀….”
거참 귀찮게 하는군.
“여자 구멍에 남자 걸 집어넣는….”
“…….”
살짝 째려보긴 했지만 말리지는 않는다.
이정도가 한계인가.
단어만 달라졌지 내용은 그대론데?
참 이해할 수 없는 기준이다.
“그런 짓이 아닌 경우에는 왜 그런 겁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아린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한 것 같았다.
“뭐, 마조히스트나 사디스트 같은….”
표정을 보아하니 뭔지 모르는 얼굴이다.
나중에 하나씩 가르쳐줘야겠군.
“…아니면 노출증 같은 그런 거 말이죠.”
“흡….”
눈에 띄게 당항하는 아린.
숨길 생각 있는 거 맞지?
“왜 그러십니까?”
“아, 아, 아니에요, 아무 것도!”
아린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동요한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이런 걸 하면 기분 좋아지는 사람들이 있던데, 이건 아이를 만드는 것과는 관련도 없으면서 왜 그런 겁니까? 여신님이 왜 이런 걸로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었죠?”
“그건 그… 여신님이 내리시는 시련….”
아린은 스스로도 자신이 없는지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저번에도 이 얘기를 했었지.
내가 세리아인 척 하고 있었을 때.
그땐 조금 더 당당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한 걸 보니 자기가 듣기에도 어설픈 변명이라는 걸 느낀 모양이다.
하지만 넘어가주지.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것도 아니니까.
“음, 그렇군요. 시련이라. 이해가 됐습니다.”
“…저, 정말인가요?”
“네.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셨나요?”
“아뇨, 그, 맞아요….”
오히려 내가 단박에 납득하자 그녀가 더 이상하단 표정으로 쳐다본다.
그럴 거면 말을 하지 말던가.
내가 멋대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거리자 아린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
나는 굳이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저, 저기….”
“네?”
아무 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나는 순박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질문을 들어주었다.
“바, 방금 하신 얘기… 정말인가요?”
“뭐가 말입니까?”
아린은 좀처럼 말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다 간신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다른 걸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들이 있다고….”
“아, 마조히스트랑 사디스트 말입니까?”
“그, 그거 말고도….”
“노출?”
아린은 흠칫하며 알기 쉽게 반응한다.
누가봐도 참 노골적이지만 나는 끝까지 모르는 척 했다.
“뭐, 저는 잘 모르는 얘기지만 그런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고 하더군요. 저희가 이번에 가는 아세일라에는 그런 사람들이 특히나 더 많죠.”
“그, 그렇군요….”
그 모습을 상상해봤는지 아린의 얼굴이 빨개졌다.
“…제, 제렌 씨가 생각하기에는 어떤 거 같으세요?”
“저 말입니까?”
“네, 네…. 이런 거에 대해 잘 아실테니….”
이거 나 욕하는 거 맞지?
내가 얼굴을 살짝 찌푸리자 아린이 화들짝 놀라 변명했다.
“아, 아뇨! 딱히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죄송해요!”
자기가 무슨 말을 뱉는 지도 모를만큼 몰려있다는 뜻이니 잘 됐다.
“뭐, 자기 취향이 그런 걸 어쩌겠습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이상해보여도 자기가 즐거우면 그걸로 된 거죠. 저번에도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신앙은 딱히 즐거움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랬죠.”
그녀는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인가.
그녀의 믿음과 자신의 성적 취향 사이의 충돌.
아린의 사고관에서 노출 같은 불건전한 행동은 무조건 지양해야할 짓이다.
교리를 들고올 것도 없이 누가 봐도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행동.
올바르게 자란 그녀에게 그런 일탈행위는 죄악과도 동일시되는 것이겠지.
그렇기에 약간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쉽게 넘어올 것이다.
계속 자신의 본성을 부정할 논리만을 찾고 있으니, 양 쪽 모두를 챙길 수 있는 그럴싸한 소리를 들으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괜히 혹하게 되는 것.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그 길을 열어주기로 했다.
“그리고 어쩌면 또 도움이 될지도 모르죠.”
“도움이요?”
“네. 어쨌든 남들에게 피해만 안 끼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너무 심하지 않은 수준에서 그 욕구를 적당히 풀어주면 기분도 풀리고 개인적으로도 즐겁고, 뭐, 그런 거 아닐까요.”
그녀는 내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올바르지 못한 짓이잖아요.”
“여신님이 뭐 언제 옷벗고 돌아다니지 말라고 직접 말하기라도 했답니까? 멀리 갈 것 없이 아세일라만 봐도 사람들이 거의 헐벗고 돌아다닙니다. 그럼 그들은 다 죄인입니까?”
“음….”
아린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말해놓고 생각해보니 용사 파티는 지금 아세일라 사람들이 수상하다고 찾아가는 중이었다.
아니, 그럼 네 맞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오면 어떡하지?
그럼 내가 할 말이 없어지는데.
엉성한 논리를 들켜서 쪽팔림을 당하기 전에 나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가, 간단한 것부터! 쉬운 것부터 하는 것도 괜찮겠죠. 뭐… 그, 노출이라면 가볍게… 속옷을 안 입어본다던가…?”
“네? 소, 속옷을요?”
상상도 못해봤는지 그녀가 말을 더듬거리며 자기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 그치만 들키면 어쩌죠…?”
아니, 지금 자기 얘기 하는 거 아니라는 설정이잖아.
벌써 그것마저 잊어버린 건가.
좀 당황스러웠지만 이걸 지적하면 모처럼 쌓아올린 기회가 다 날아가므로 나는 당연히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겉옷을 벗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들키겠습니까?”
내가 자신하는데, 용사놈은 어지간해선 눈치 못 챌 거다.
그 정도로 눈치가 좋았으면 세리아가 홀라당 넘어가는 와중에도 이렇게 덤덤할 리가 없지.
세리아는 알면서도 티를 안 낼 거다.
내가 그렇게 시킬 거니까.
결국 유니만 조심하면 되는데….
얘는 솔직히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여자라 반응을 유도하기도 좀 곤란하고.
뭐, 그녀에게 들키면 그냥… 운이 없다고 여겨야지.
“음… 그, 그럴까요…?”
“뭐, 솔직히 팬티 같은 걸 안 입고 다닌다고 해서 누가 알기나 하겠습니까? 속을 훔쳐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그렇죠….”
아린은 약간 홀린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내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그럴싸하다 정도로만 여겨도 성공이다.
얼추 대화가 마무리된 시점에서 왠지 인기척이 느껴지길래 곁눈질해봤더니, 용사가 은근슬쩍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신경쓰이나 보군.
의심할 빌미를 만들어줄 필요는 없지.
“얘기가 좀 길어졌군요. 다른 것도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네? 아, 물론이죠! 뭐가 궁금하시죠?”
그렇게 우리는 재미없는 종교수업을 가졌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아린은 가끔씩 속옷을 입지 않게 되었다.
옷 사이로 살짝 젖꼭지가 튀어나온다거나, 오늘치 속옷이 그대로 가방 안에 들어있곤 한다는 걸 세리아가 몰래 관찰하고 알려준 사실이다.
생각보다 잘 먹혔네.
만족스럽기 그지 없는 결과였다.
이러면 아세일라에서는 조금 더 재밌는 상황을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은데.
시야의 저편에서 조금씩 아세일라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기대감을 품고, 아세일라를 향해 열심히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