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용사] 아세일라를 향해
단 둘이서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신기한 것은 주로 말을 하는 쪽이 제렌 씨가 아닌 아린이라는 점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까지는 안 들리지만 아린의 모습이 평소보다 더 열정적이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나는 무심코 유니를 바라보았다.
정말 무의식적으로 바라본 거라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순간 몰랐지만, 내가 그녀의 정령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가벼운 자기혐오가 들었다.
세상에, 지금 바람의 정령으로 그들의 대화를 훔쳐들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던 건가?
그들이 일부러 자리를 비워서 얘기를 하는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텐데, 나는 고작 내 호기심을 위해 이를 엿들으러 한 것이다.
정신차리자.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못된 마음을 품게 된 거야.
아무래도 최근에 하도 많은 일이 있다보니 나도 모르는 새 내 마음이 조금 더러움에 찌든 것 같았다.
이럴 때일수록 초심으로 돌아가야지.
나는 유니와 단 둘이서 여행하던 시절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무방비하게 내 옆에서 새근새근 잠든 유니….
동굴 속에서 같이 불을 쬐던 그녀의 옷 사이로 드러난 가슴골….
아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추잡한 망상들을 떨쳐냈다.
어쩌면 세리아 말대로 정말 나는 성욕에 사로잡힌 것일지도 몰랐다.
…다음에 한 번 더 세리아에게 부탁해볼까.
지금 생각해도 좀 부끄러운 짓이지만, 세리아는 진심으로 나를 도와주려 했으니 적어도 의미 없는 짓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는 힘들 것 같으니, 아세일라에 도착하면 부탁해보자.
하필 도시가 또 그런 곳이라 괜히 이상한 생각이 들긴 하지만, 오해가 생기지 않게 열심히 설득하면 그녀도 분명 알아줄 것이다.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가 들리길래 고개를 돌렸더니 아린과 제렌 씨가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둘이서 무슨 얘기 했어?”
유니가 의아한 듯 둘을 바라보며 물었다.
앗, 그런 걸 함부로 물으면….
“아, 별 거 아니에요. 제렌 씨가 저희 교리에 관심이 많으시길래 잠시 설명해드렸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가 좀 많았던 것 같군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유니는 종교적인 화제가 튀어나오자 아린의 설교가 생각났는지 질색했다.
그런 얘기였구나.
하긴, 우리들 옆에서 해봐야 휴식에 방해만 되겠지.
일부러 자리를 비웠던 건 그녀 나름의 배려였던 모양이다.
설마 전에 재미없다고 했던 유니의 말을 신경쓰고 있는 건가?
아린의 얼굴을 보니 그녀는 유니의 질색한 표정을 보고 다소 시무룩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다음에 좀 달래줘야할 것 같다.
…재미없는 건 사실이지만.
“교리라… 그렇구나.”
세리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도 별로 설교를 좋아하진 않았던 거 같은데, 교리에 대한 학문적인 호기심은 있는 걸까?
나랑은 여신님과 마왕만큼이나 거리가 먼 얘기다.
대체 그런 딱딱한 얘기의 어디가 재밌다는 걸까?
우리 마을에도 신관이 한 분 계시기는 했지만, 그는 적어도 어린 우리들에게 어려운 교리 얘기를 하시지는 않았다.
마을에서 촌장님을 제외하면 나에게 잘 대해주셨던 유일한 어른이기도 하고.
그래서 자세한 교리는 잘 모르지만, 내 마음속에서 신관들에 대한 이미지는 무척이나 좋았다.
아린 또한 신앙을 대하는 그녀의 성실한 태도는 배울 점이 많았다.
“그럼 출발할까요?”
아린은 유니의 말은 잊기로 했는지 싱글벙글한 표정을 되찾으며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안 쉬어도 괜찮겠어?”
그녀는 제대로 쉬지도 못한 것 같아 조금 걱정이었지만 아린은 걱정 말라면서 쌩쌩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종교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회복된 것일까.
참으로 신관다웠다.
나는 그 뒤로도 종종 그 둘이 같이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 번은 우연히 그들의 얘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종교적 교리에 대한 논답을 주고받고만 있었다.
혹시나 하는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던 나는 그들의 그 알 수 없는 대화에 마음을 놓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의아했다.
갑자기 그가 왜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루엘라와의 승부가 그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킨 것일까?
하긴 그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짐꾼. 이제 마법을 쓸 수 있다고는 하나 평범한 인간이 사천왕과 맞서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목숨이 오고가는 위험한 순간이었던만큼, 그런 극적인 경험을 겪고 내면에 변화가 생겼다면 딱히 이상한 얘기는 아니었다.
다만….
요즘 안색이 어두운 아린이 그와 대화할 때만 밝아지는 것은 왠지 보고있기가 힘들었다.
무언가 고민이 있다면 나한테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어쩌면 그 역할을 제렌 씨에게 빼앗기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계속 마음 속 어디엔가 남아있었다.
“용사님.”
그랬기에 아린이 먼저 나한테 다가와 말을 건 것은 상당히 간만의 일이었다.
“아린, 무슨 일이야?”
나는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는 사실이 무척 기뻤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대답했다.
“딱히 별 일은 아니에요. 그냥 혼자 계시길래요.”
그렇게 말하며 아린은 내 곁에 앉았다.
그녀는 내 검에 묻은 마물들의 체액을 바라보며 말했다.
“많이 더러워졌네요.”
“그러게. 강하지는 않았지만 너무 옷이 금방 더러워지던걸.”
조금 전 우리는 슬라임 무리와 조우했다.
사실 무리라고 불러야할지 그냥 슬라임이라고 불러야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러 마리가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그냥 무리라고 칭했다.
슬라임은 처음 상대할 땐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마물이지만, 대처법을 알고나면 그렇게 어렵지 않다.
물컹한 그들의 표면을 상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슬라임의 내부를 공격해야한다.
겉으로만 봐서는 안에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지만, 그들도 생물인지라 단순하게나마 내장이랄까, 생존에 핵심적인 부위가 존재한다.
그곳을 공격하면 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다.
딱히 공격수단을 갖춘 것도 아니고, 고도의 지능을 갖추고 있지도 않다.
그들이 종종 악의없이 마을을 덮치지만 않았더라면 토벌 대상에조차 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러모로 우리의 잃어버린 실전 감각을 되찾기에는 딱 알맞은 상대였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상대할 때 점액이 많이 튀어 옷이 더러워진다는 것 정도.
그래서 지금 돌아가며 한 명씩 옷을 빨고 갈아입는 중이었다.
제렌 씨야 뭐 애초부터 그들을 상대하지 않았고, 가장 먼저 내가, 그 뒤로는 아린이 씻었다.
지금은 한창 세리아가 옷을 빨거나 갈아입을 시간이었고, 그 다음에는 유니다.
“저희 둘밖에 없네요?”
아린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팔과 팔이 맞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아, 아니… 그, 제렌 씨도 있고….”
“멀찍이 떨어져계시잖아요.”
그렇기는 하지만… 좀 많이 가깝다.
아린은 옷을 빠는 김에 머리도 같이 감았는지 그녀의 머릿결에는 아직 물기가 남아있었다.
그녀가 살짝 고개를 내 쪽으로 기울이자 그녀의 머리카락도 자연스레 내 쪽으로 넘어왔다.
허리에 닿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그, 아린, 좀 가까운데….”
“…싫으신가요?”
아, 아니,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잖아.
내가 당황하자 그녀는 빙긋 웃었다.
“장난이에요. 역시 용사님은 언제나 재밌는 반응을 보여주시네요.”
“그, 그래? 하하….”
아린은 그렇게 말하며 살짝 팔짱을 꼈다.
“읏!”
“요즘 세리아랑… 잘 되시나요?”
그녀의 말에 순간 내 몸이 굳었다.
드, 들킨 건가?
역시 티가 좀 많이 났나?
“…어, 그게….”
“용사님, 사실 세리아는….”
세리아는?
아린이 더 말을 잇지 않자 나는 자연스레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어두운 안색을 하고 있는 아린의 얼굴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린?”
“아, 죄송해요. 아니에요, 잊어주세요.”
세라아에 대해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녀는 나에게 대답을 해주려하지 않았다.
“그녀가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에요.”
“우린 동맹이잖아. 무슨 일 있으면 말해주기로 하지 않았어?”
내 말에 잠시 아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동맹… 후후, 그랬죠 참.”
아린은 마치 추억을 되새기는 사람처럼 미소지었다.
내가 그에 대한 의심을 풀면서 자연스레 뒷조사 같은 걸 할 이유도 사라졌기에, 사실 사라진 것과 다름 없는 동맹이었지만 아직 아린에게는 의미가 있는 말 같았다.
그만큼 나와 있었던 일을 소중하게 생각해주고 있구나 싶어 기쁘기도 했다.
“용사님. 진지하게 들어주세요.”
아린의 표정에서는 일말의 가벼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중요한 말이길래 이렇게까지 무게를 잡고 말을 하려는 거지?
세리아와 관련된 거라면 혹시?
설마… 아니겠지.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그와 많은 대화를 하면서 나는 제렌 씨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얘기는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세리아는….”
꾸욱.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면 어떡하지?
세리아를 의심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게된다면?
불안감이 소용돌이쳤다.
“…여, 여자도 좋아하는 거 같아요…!”
“…응?”
무슨 말이지?
내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아린이 괴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 저번에… 아, 딱히 별 일은 아니었어요! 아무튼 저번에 알았는데… 세리아가 아무래도 그, 그런 쪽에도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어… 여자한테도 관심이 있다고?”
“네, 네! 아무래도 용사님은 이 사실을 아셔야할 것 같아서….”
아린은 이 말을 하고 옷자락을 꾹 쥐었다.
친구의 비밀을 제3자에게 털어놓는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걸까.
“그래? 몰랐네.”
“그렇다고 너무 세리아에게… 네?”
“응?”
내가 왜 그러냐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자, 아린도 똑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제 얘기 들으셨죠?”
“응. 세리아가 여자도 좋아하는 거 같다는 얘기 아냐?”
“어… 네.”
“뭐,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얘기긴 했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아무래도 그녀는 내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걱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말을 꺼낸 것 같은데, 사실 불필요한 걱정이었다.
누가 뭐래도 이미 나는 그녀와 이어졌으니까!
일종의 여유라고나 할까.
아린이나 유니에게 밝힐 수는 없지만, 우리는 육체적 관계를 맺음으로서 연인은 아닐지라도 그에 준하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요즘 세리아에게 더 마음이 기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세리아 또한 나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을 테니, 설령 그녀가 여자를 좋아한다고 해도 내가 더 우선시될 것이라는 사실 자체는 달라지지 않는다.
“생각보다 덤덤하시네요.”
아린은 의외라는 듯 놀랐다.
“뭐, 그야 당연하지. 세리아랑은 이미….”
“……이미?”
아차.
기분이 들떠 그만 말실수를 했다.
황급히 입을 닫았지만 이미 아린의 눈은 가늘어진 상태였다.
“그게 무슨 말이죠, 용사님?”
“아, 아니, 그게….”
큰일났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내 말실수로 아린이 마음의 상처라도 받는다면 나는 죄책감에 몸부림치고 말 것이다.
그녀와 나를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해야했다.
“이미… 이미 들은 얘기거든! 응, 맞아!”
“그러셨나요?”
미, 미안해 세리아….
“응… 하하, 저번에 어쩌다보니 그 얘기가 나와서….”
“휴, 그럼 괜한 고민이었네요.”
아린은 허탈하게 웃었다.
확실히 그녀의 안색이 좋아진 걸 보니, 적어도 상황을 수습하는데는 성공한 것 같았다.
“응? 내가 뭘?”
“햐앗!”
등 뒤에서 들린 세리아의 목소리에 아린이 화들짝 놀라 나한테서 떨어졌다.
어, 근데 방금 옷 위로 가슴 가운데서 뭔가가 솟아있던… 아, 아니겠지….
잘못 봤을 것이다.
그녀는 벌떡 일어난 뒤 흘깃 내 시선을 살피면서 팔짱을 꼈다.
마치 가슴을 가리려는 듯한 모양새였다.
…우연이겠지.
“아린! 나 다 봤어! 에릭이랑 사이좋게 붙어있었지!”
“아, 아니에요.”
세리아 뒤로 유니가 삐죽 튀어나왔다.
“그보다 아린, 내 얘기 중이었어?”
“네? 아, 그…. 별 얘기는 아니었어요.”
“흐음… 뭐 그래.”
세리아는 그녀와 내가 자기 얘기를 하든 말든 크게 신경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유니도 우리가 했던 대화내용보다는 아린이 나한테 붙어있었다는 사실을 더 신경쓰는 것 같았다.
“배신! 배신이야! 아린도 우릴 배신했어, 그치 세리아?”
“응? 아, 그렇지 응.”
“뭐야, 그 미적지근한 태도!”
아린은 무사히 화제가 넘어가자 그녀들에게 안 보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니는 부루퉁한 얼굴로 아린을 바라보다 뒤늦게 떠오른 듯 손에 쥐고 있던 걸 그녀에게 내밀었다.
“맞다, 아린! 속옷 말려서 가져왔어!”
“…네?”
“유, 유니!”
얼어붙은 아린과 당황한 세리아.
나는 자연스레 아무 것도 못 본 것처럼 그녀들에게 등을 돌렸다.
“응? 남은 속옷이 없으니 빨리 말려달라며.”
“…유, 유니이…!”
“앗.”
뒤늦게 눈치챘는지 유니가 조용해졌다.
침묵.
나는 등을 돌린 채 딴청을 피웠다.
아린이 말없이 무언가를 받아들고 구석으로 걸어갔다.
“아, 아하하….”
유니의 어색한 웃음소리만 숲속에 울려퍼졌다.
잠깐, 그럼 아까 내가 본 건 정말…….
못 본 걸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