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짐꾼] 징검다리
세리아가 만찬회에 참석한지 한 시간.
아니 두 시간인가?
나는 지금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배고프다.
아니 뭔 놈의 식사가 그렇게 오래 걸리지?
하여간 돈 많는 놈들이란.
이 놈들은 꼭 그냥 처먹으면 될 걸 별 지랄을 다 해가며 식사시간을 쭉쭉 늘리는데 도가 튼 놈들이었다.
금방 올 줄 알고 갔다오라 보낸 거였는데, 그게 실수였다.
세리아가 돌아오면 다시 좀 박아주면서 식사나 하려고 했는데 이러면 나도 몰래 만찬회에 참석해서 몰래 좀 집어먹어야겠다.
들켰다간 정말 좆될지도 모르지만, 뭐 안 들키면 되잖아?
나는 빠르게 결정하고 방을 나섰다.
복도는 고요했다.
평소에도 사람이 없어 조용하긴 했지만, 왠지 평소와는 다른 무거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착각… 이라기엔 뭔가 좀 찝찝한데.
이런 류의 직감은 쉽게 넘겨서는 안 되는 문제다.
생각보다 잘 맞거든, 이런 건.
그냥 다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무슨 일인지 한 번 확인해보는게 좋을 것 같다.
어지간해선 들킬 일도 없을 테고, 아무 일도 없으면 그냥 별 거 아니었네 하고 넘기면 된다.
진짜 좀 큰 일이 생겼을 때가 문제긴 한데… 그건 그 때 생각하자.
어차피 만찬회가 어디서 열리는지도 모른다.
탐색할 겸 여기저기 둘러봐야지.
여자들이 쓰는 방이라 복도에는 당연히 아무도 없고, 조금 더 벗어나니 그제야 경비를 서고 있는 병사들이 보였다.
오, 역시 왕궁인가?
병사들이 직각으로 꼿꼿이 선 채 미동 없이 철통경비를 서고 있다.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저런 군기 잡힌 모습, 보기 쉬운 모습은 아니다.
사람이 없으면 아무래도 살짝 풀어지기 마련이니까.
저 눈동자를 보라.
그 무엇하나 허락없이는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겁에 질려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눈동자… 뭐야?
근엄한 그들의 몸과는 달리 눈은 필사적인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어… 뭐지?
저렇게 눈동자가 바삐 굴러가는데 몸은 정말 딱 굳은 듯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라 그냥 못 움직이는 것 같다.
자세히 보니 마력의 흐름 같은 것이 그들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마법이다.
세리아가 쓰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마법.
나는 본격적으로 좆됐다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왕궁 한 복판에서 병사들에게 마법을 쓰겠는가?
적어도 허락을 받고 이러는 건 아닐 테니, 누가 봐도 이건 침입자의 짓이었다.
튈까?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왕궁이 조용한 걸 보면, 다른 사람들은 이 사실을 눈치 못 챘거나 혹은 똑같이 제압당해있다는 소리이리라.
주변을 조금 더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후자가 맞았다.
인형처럼 꼿꼿이 선 채 굳어있는 병사들은 물론이고, 청소를 하던 시종들도 걸레를 쥔 채 굳어있다.
주방에도 들어가봤는데 조리를 하던 요리사들은 자기 요리가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걸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는 못 돌리는 거 같아서 나는 그들이 안 보는 시야 바깥에서 몰래 멀쩡한 음식들을 몇 개 훔쳐먹으며 잠시 고민했다.
이거 진짜 큰일이네.
가볍게 한 바퀴 돌아봤는데 대체 어디까지 마법이 퍼져있는지 모르겠다.
딱 봐도 절대 정면으로는 못 이길 상대다.
그럼 시발 튀어야지.
돈이고 뭐고 뒤지면 끝인데.
나는 혹시 챙겨가야 할 것이 있나 잠시 몸을 더듬거리며 확인했다.
일단 돈은 있고, 예비용 단검도 있다.
이것만 있어도 하루벌어 사는데는 문제 없지.
그러나 내 손에 잡힌 것은 이 둘만이 아니었다.
딱딱한 막대기가 내 손아귀에 잡혔다.
스태프.
세리아가 나에게 바친 그녀의 소중한 스태프다.
세리아.
나만을 위해 봉사하는 충성스러운 노예.
그녀를 버려야 하나?
내가 세리아 같은 년을 이렇게 타락시킬 기회는 아마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 뿐인가? 그녀를 이용하면 아린, 어쩌면 유니까지 내 손에 넣을지도 모른다.
용사 파티의 암컷들을 전부 내 손아귀에?
상상만 해도 가슴 떨리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결국 내가 살아있어야 의미가 있는 일.
죽어버리면 예쁜 노예든 힘이든 무슨 상관인가.
그녀를 포기하고 도망치는게 옳았다.
그렇지만 나는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잠시 스태프를 만지작거렸다.
…만찬회장은 바로 옆이겠지?
안에 들어가보진 않았지만 가장 큰 방이 주변에 있었으니 아마 거기일 것이다.
문이 활짝 열려있었지만 안으로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아 발걸음을 돌려 주방으로 왔다.
내가 주방을 나서서 반대로만 나가면 그걸로 끝이다.
용사 파티와는 작별이지만 적어도 뒤지지는 않겠지.
여기 있으면 아마 높은 확률로 무사하진 못할 것이다.
저 침입자가 날 죽이지 않더라도 내가 숨어든 게 발각되면 처형당해도 할 말이 없으니까.
그렇지만….
“에이 시발.”
짜증나네.
노예 주제에 주인을 번거롭게 하고 말이야.
나는 주방을 나와 활짝 열린 문으로 한걸음 다가갔다.
노예는 주인에게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
따라서 주인은 노예의 모든 것을 소유한다.
그리고 나는 독점욕이 매우 강하다.
그럼 내 노예에 함부로 손을 대는 새끼를,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잖아?
아마도 의미 없을 투명마법은 이미 풀었다.
내가 쓸 수 있는 마법은 내 눈으로 목격한 그녀의 마법 뿐.
이길 수 있나?
아마 못 이긴다.
그렇지만, 젊고 머리좋은 여마법사를 노예로 부렸던 인생이라면 그리 나쁜 인생만은 아니겠지.
나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딱 봐도 수상해보이는 미친년을 향해 내가 아는 가장 센 마법을 갈겼다.
***
와, 시발 어떻게 살아있지?
내가 생각해도 스스로가 조금 대견스럽다.
아는 놈들 만나면 자랑해야지.
내가 사천왕과 싸워서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이 몸의 번뜩이는 재치와, 야수 같은 행동력이 일구어낸 결과물이었다.
루에 교수였던가, 존나 수상해보이는 년이라고는 생각했는데 설마 사천왕일줄은 몰랐다.
하긴 그 쯤 되니까 한눈에 막 다 간파하고 이런 거겠지?
솔직히 그녀를 이겼다고 하기엔 힘들고, 그냥 그 쪽에서 포기하고 물러난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내가 나름 대가리를 굴려가며 대처를 잘 하긴 했는데, 솔직히 그냥 그 여자가 문답무용으로 나한테 마법 한 방 쐈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왜 나를 안 건드렸지?
그녀는 마치 내가 죽어서는 안 되는 인물인 것처럼 행동했다.
내 어설픈 허세에도 넘어가주고, 짜증은 냈지만 나에게 해코지를 하지도 않았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수준이지만 솔직히 엄청 찝찝하다.
누군지도 모르는 년한테 그런 이상한 기대 받아봐야 기쁘지 않다고.
예쁘긴 했지만 대가리가 터져도 복귀되는 년과 붙어먹고 싶진 않다.
박살난 얼굴조각들이 다시 허공에 둥실 떠올라 한 데 뭉치는 광경은 진짜 꿈에 나올까 무서웠다.
심지어 그 대가는 다른 사람의 목숨.
존나 평생 쫓기고 살기 딱 좋은 위험한 마법이다.
뭐, 익혀두면 여러모로 좋을 거 같긴 한데….
뚜벅뚜벅.
지하로 내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나는 쓸데없는 상상을 접고 긴장했다.
또 누구지?
나한테 쌍욕 박으러 온 귀족 나으리 친구인가?
그러나 발걸음이 익숙했다.
세리아군.
그녀는 간수와 잠깐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나한테 다가왔다.
“주인님…! 태자가 저희 편을 들어줬어요! 곧 풀려나실 거 같아요.”
“오, 그래?”
태자가? 왜 굳이 날 도와줬지?
나는 그를 포함해 식탁에 앉아 옴싹달싹 못하는 귀족들을 모조리 판돈으로 걸고 도박을 했다.
성공했으니 이렇게 사지 멀쩡히 살아있지만, 그 대가로 귀족들이 몇 명 더 죽어나가긴 했다.
그거 때문에 내가 여기 있는 거기도 하고.
“태자가 말이 통하는 인물이라 다행이에요. 주인님 아니었으면 다들 죽은 목숨이었는데, 은혜도 모르는 것들이 감히….”
세리아는 진심으로 분하다는 듯 화를 냈다.
솔직히 그녀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힘써줄 것이라고는 예상 못했다.
감옥에 갇힌 지금이 세리아 입장에서는 나에게서 도망칠 절호의 기회였고, 가만히 내버려두면 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평생 감방에서 썩으며 죽어갈 예정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나를 살리기 위해 정말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며칠전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순종적이지는 않았는데, 그 변화에 내가 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내 앞에서 대가리 박고 에릭을 매도하게 만든게 효과가 있었나?
아니면 울고불다 기절할 때까지 절정시킨게 그렇게 기분 좋았던 걸까?
아무튼 세리아는 나에게서 도망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완벽하게 내 어장 안에 갇힌 물고기가 된 것이다.
세리아는 슬쩍 간수 쪽을 살피더니 나한테 목걸이를 내밀었다.
“주인님, 이거….”
“푸흐흐….”
귀여운 년 같으니라고.
내가 목걸이를 받아들자 그녀가 부끄러운 듯 볼을 살짝 물들였다.
이런 위험한 목걸이를 들고 돌아다닐 순 없으니 그녀의 방에 두고 왔는데, 눈치껏 챙겨온 모양이다.
하긴 내가 없는 동안 많이 달아올랐겠지.
난 목걸이를 차고 바지를 휙 내렸다.
“가, 간수도 있는데….”
“그래서 안 할거야?”
세리아가 힐끔힐끔 간수의 눈치를 본다.
그는 여기서 제법 떨어져있는데다가 딱히 감옥 안에까지 신경을 쓰고 있진 않았다.
나밖에 없는데다가 세리아의 신원까지 보증되었으니 안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뭐 나한텐 잘 된 일이지.
내 자지가 벌떡 일어서자 세리아는 손을 뻗어 내 성기를 애무했다.
“하앗… 따뜻해요.”
“면회는 얼마나 가능하지?”
세리아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내 자지를 위아래로 흔들면서 우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곧 가야해요…. 아직 혐의를 완전히 벗으신게 아니라서….”
“흐흐, 맛은 못 보고 가겠구만? 아쉬워서 이를 어째.”
“으읏… 기다릴게요….”
스윽스윽.
처음에 날 노려보며 억지로 할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그 땐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자지를 어느 정도의 세기로 쥐어야하는지도 잘 몰랐는데, 지금은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좋아해줄지를 필사적으로 궁리해 가장 기분 좋은 부분을 딱 좋은 강도로 자극해준다.
정성껏 나에게 봉사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게 만드는 좋은 대딸이었다.
나는 그녀의 대딸을 받으며 장난삼아 말했다.
“정 못참겠으면 용사한테 가서 넣어달라고 하지 그래.”
“…에, 에릭은 작아서 별로에요….”
“풋, 크흐흐!”
아, 이런. 너무 웃으면 들키는데.
그렇지만 순간적으로 들어온 그녀의 반응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렇게 내 교육의 성과를 확인하니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있나?
“크흐, 용사 놈도 불쌍하군. 이런 음탕한 암컷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함부로 손도 못대고 말이야.”
“아응… 주인님 말고 다른 남자는 필요없어요….”
내가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자 그녀는 창살에 몸을 딱 붙이며 나에게 다가왔다.
창살에 눌려 그녀의 조그만 가슴이 평소보다 더 튀어나왔다.
“그럼 노예는 어때.”
“노예… 말인가요?”
“더이상 용사가 네 남자는 될 수 없지만, 충성스러운 노예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딱히 큰 의미를 두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그 잘난 용사를 깎아내리는 재미에서 던진 말이었다.
“그치만 저는 이미 주인님의 노예인데….”
“노예가 노예를 둘 수도 있는 거지.”
내 말을 듣던 세리아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뭐, 그냥 해본 말이야.”
“네, 주인님. 한 번 해볼게요!”
묘하게 의욕적이다.
“어? 음… 그래. 열심히 해봐.”
뭐 좋은게 좋은 거지.
한 발 가볍게 뽑은 뒤 나는 세리아를 목걸이와 함께 다시 올려보냈다.
왕태자가 내 편을 들어줬다는 말은 사실이었는지 그로부터 이틀쯤 지나자 간수가 곧 석방될 것 같다고 귀띰해줬다.
세리아는 그 사이에도 몇 번 더 나를 찾아오며 봉사해주고 갔는데, 한 번은 나한테 용사 노예화 작전의 성과를 보고하기도 했다.
“듣기로 수도에 도색서적이 많다던데 찾아서 공부해보기로 했어요. 기다려주세요, 주인님.”
나는 그냥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고 용사가 어떻게 되든 내 노예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상관 없는데, 그녀가 이렇게까지 열의를 불태우니 왠지 내가 부추긴 것 같아 미묘한 심정이었다.
굳이 말릴 이유는 없으니 응원이나 해줬다.
잘만 되면 나도 재밌는 걸 볼 수 있을 테니까.
세리아는 그 외에도 다양한 얘기를 해줬다.
바깥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등등.
그리고 그 중에는 무척이나 재밌는 얘기도 있었다.
“…그 말 사실이겠지?”
“네. 두 번이나 확인했어요.”
그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듯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린에게는, 노출증이 있는 게 분명해요.”
퓻, 퓻!
그녀의 말에 맞춰 뿜어져나온 정액이 세리아의 얼굴과 손바닥 위에 착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