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용사] 착한 사람에게는 보인다
어떻게 여기에?
아니, 그것보다 왜 이런 곳에!
“위, 위험…!”
그가 든 스태프에서 다시 한 번 마법이 쏘아져 나간다.
이글거리는 열기는 루엘라의 몸통 한가운데를 정확하게 맞추며 그녀의 몸을 녹였다.
……그런데 저거, 세리아의 스태프 아닌가?
“…효과 없어요.”
복구하기 시작한 루엘라의 입이 달싹였다.
터엉! 텅!
두 사람의 귀족이 다시 쓰러졌다.
“뭐야?”
제렌은 갑자기 복구하기 시작한 그녀의 몸과, 뼈만 남긴 채 쓰러진 귀족들을 번갈아바라보며 당황했다.
“제 몸은 연약한 인간의 것이지만, 저는 육신이 파괴된 것만으로는 죽지 않는답니다. 주변 사람들의 육체를 먹어치워, 얼마든지 복구할 수 있어요.”
말끔하게 원상태로 돌아온 루엘라가 그를 바라보며 조소했다.
“뭔 개소리야, 시발.”
제 아무리 그라도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는지,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리, 리치에요! 저 사람, 사천왕이라구요!”
세리아가 다급히 소리쳤다.
어라, 그런데 원래 세리아가 그에게 존댓말을 썼던가?
“워어, 시발…. 잘못 끼어들었네.”
그 말을 들은 제렌이 당황하며 한 발짝 물러섰다.
그녀의 스태프를 든 채.
아니, 왜… 왜 그가 이걸 들고 있지?
이 긴급한 상황에서는 별 거 아닌 일이지만, 나는 그 별 거 아닌 일이 미치게 신경쓰였다.
“후우… 그냥 돌아가세요. 당신 하나 정도는 못 본 체 해드리죠. 고작 훔친 마법 정도에 쓰러질 제가 아니랍니다.”
루엘라는 귀찮다는 듯 꺼지라고 손짓했다.
그는 정말 달아날 생각인지 한 발짝 더 물러났다가, 입구 근처에 쓰러진 귀족의 시체를 밟았다.
“어우, 씨, 깜짝야.”
“도, 도망치는 건가요?”
대놓고 발을 빼려는 그의 모습에 아린이 자기 상황도 잊고 황당한 듯 말했다.
그렇지만 제렌과 시선이 마주치자, 자기 상황을 깨달았는지 황급히 세리아 뒤에 다시 숨었다.
“…괜찮아요, 제렌 씨. 여긴 저희끼리 어떻게든 할테니까… 도망치세요….”
유니는 입술을 꾹 깨물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더 이상 무고한 희생자를 늘리고 싶지 않은 걸까.
나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우리도 그녀를 제압하지 못하고 쩔쩔매는데, 그가 추가되었다고 해서 달라질 것 같진 않았다.
“…….”
세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소 미묘했다.
애틋함? 아쉬움?
…그럴 리는 없으니 내 착각이겠지.
“잠깐.”
도망가려던 그는 무언가 깨달았는지 멈칫했다.
“뭘 하든 소용 없….”
퍼엉!
그는 다시 스태프를 겨누고 그녀의 얼굴을 다시 녹여버렸다.
세리아가 움찔하며 몸을 수그리긴 했지만, 그의 행동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세리아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그런다고 안 죽는다니까요? 또 그러면….”
텅!
한 구의 시체가 늘어남과 동시에 그는 또 다시 마법을 발사했다.
“…무슨 생각이죠?”
터엉!
또 한 사람이 쓰러지자 그제야 루엘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 안 죽는다며?”
제렌이 씩 웃었다.
굉장히 사악한 웃음이었지만, 이상하게 든든했다.
“…저는 안 죽지만 주변에 시체들이 늘어나는 건 안 보이시나요?”
“어, 잘 보이는데. 계속 부활해보지 그래?”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그런 짓 해봤자 시체만 늘어날 뿐인데….
주변 귀족들은 얼굴이 굳어 눈동자밖에 움직이지 못하지만, 아마 그들이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면 창백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제정신이에요? 저들이 죽게 내버려두겠다구요?”
“왜, 다 죽으면 곤란한가?”
“큭….”
그 말에 루엘라의 표정이 벌레 씹은 듯 일그러졌다.
“그렇구나… 당신, 이들이 죽으면 곤란하지?”
“…당신이 알 바 아니에요.”
세리아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그녀를 노려보며 묻자, 루엘라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계속할까? 여기 앉아있는 사람들이 죄다 해골될 때까지?”
그제야 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구나.
루엘라는 일부러 그들을 죽이지 않고 마법인지 독인지 모를 방법으로 마비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그냥 방해되는 인간 지도층을 죽일 생각이라면 이렇게 번거로운 짓을 할 리가 없다. 무언가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라면 여기 있는 인간들이 모두 죽어서는 안 됐다.
제렌 씨가 이렇게 내 알 바 아니라며 마구잡이로 마법을 쏘아대면, 그녀는 몸 회복을 위해 더 많은 인간들을 죽일 수밖에 없다.
그럼 정작 그녀의 목표가 실패로 돌아간다.
사람이 죽는다는 공포에만 휩싸여 거기까진 미처 생각을 못했다.
…지독하게 잔인한 전술이었다.
그만큼 효과적이기도 했지만.
“하아… 같은 인간들이 죽어나가는데 아무런 죄책감도 안 드나요?”
“뭐라는 거야, 시발. 내가 더 중요하지.”
“…당신 용사 파티의 일원 아니에요?”
루엘라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제렌 씨는 픽 웃었다.
“미안한데, 난 그냥 짐꾼이거든.”
“…으읏!”
루엘라는 그를 곧장이라도 죽여버릴 듯 노려보았다.
…잠깐. 확실히 좋은 전략이지만, 이건 너무 위험하다.
확실히 귀족들이 다 죽으면 그녀 입장에서도 곤란하지만, 그 전에 제렌 씨 본인이 죽어버리면 그만 아닌가.
설마, 자기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던진 도박수인가?
그는 짐꾼을 하기 전까지 하루종일 도박장에서만 살았다고 했다.
분명 이런 아슬아슬한 내기에도 익숙할 터!
별 볼일 없는 그가 자신의 특기를 최대한으로 발휘해 마왕의 최측근인 사천왕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숭고한 희생정신에 나는 감동할 것만 같았다.
“어차피 남의 것을 훔쳤을 뿐인 마법. 제가 금방이라도 당신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수 있다는 건 아시는지?”
“…그, 그러든지.”
그 말에 왠지 그가 겁먹은 것 같지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는 죽을 각오를 하고 이 자리에 섰으니까!
“하아… 알고 이러는 건지, 모르고 나대는 건지.”
루엘라는 짜증난다는 듯 자기 머리를 긁적였다.
“좋아요. 물러나죠.”
이겼다!
그의 도박수가 먹힌 것이다!
왜 그를 안 죽이는 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그녀가 포기했다는 사실이다.
“역시 당신이….”
루엘라는 제렌 씨를 보고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대신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당신은 너무 약해요. 그를 이길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그 말을 마치고 그녀는 창문을 깨고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저 높이면 즉사 아닌가?
순간 당황했지만 어차피 저게 본체는 아니라 그랬으니 어찌되든 상관없는 거겠지.
정말 소름끼치는 전술이었다.
어차피 실패하더라도 잃는 건 몸뚱이 하나뿐.
그녀의 본체에는 아무런 타격이 가지 않는다.
…이런 상대를 도대체 어떻게 쓰러뜨려야 하지?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마비되었던 귀족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 콰당!
“으, 으아악!”
“태자님! 이게 대체 무슨!”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볼썽사납게 오줌을 지리는 자도 있었고, 죽은 시체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덜덜 떨면서 태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음.”
태자는 굉장히 할 말이 많아보였지만, 이미 귀족들이 온갖 추태를 벌이고 있어서인지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짧게 말했다.
“일단, 저 신관분 옷부터 입혀드리게.”
“흐, 흐윽….”
아린이 세리아의 망토로 몸을 가렸다.
***
당연한 얘기지만 만찬회는 곧바로 중지되었다.
왕궁은 발칵 뒤집혔고, 덕분에 우리들도 더 오래 붙잡혀 있게 되었다.
제아무리 사천왕이라지만 고작 그녀 한 명에게 왕궁의 경비가 뚫린 것이다.
그녀의 목적이 다른 데 있었기에 목숨을 부지한 것이지, 자칫 잘못하면 왕가와 귀족들이 통째로 씨가 말라버렸을 대사건이었다.
마법사들은 철저한 조사 끝에, 루엘라가 강력한 구속마법을 사용했던 것으로 결론지었다.
왕궁의 경비병들도, 만찬회에 참석한 귀족과 왕태자까지 동시에 묶어버린 강력한 마법이었다.
확실히 일개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마법의 수준은 아니었고, 세리아의 말대로 그녀는 리치로 판명되었다.
이 일로 인해 위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왕가의 매우 강력한 항의로 앞으로는 왕궁 전체에 항마결계를 설치할 예정이라고 한다.
세리아의 말에 따르면 마법 없이는 함부로 거동하기도 힘든 늙은 원로마법사들을 위한 조치라던데, 더 이상 그런걸 배려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게 되었다.
솔직히 그 결계가 있었다고 루엘라를 막을 수 있었을까? 하는 심정은 들지만, 뭐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사실 우리 입장에서는 그보다 제렌 씨가 더 문제였는데, 대체 어떻게 알고 나타났는가는 둘째치고 그의 처우를 놓고 상당히 말이 많았다.
그 덕분에 루엘라가 물러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그녀를 공격한 바람에 귀족들이 몇이나 더 죽어버렸다.
유족들은 그를 처벌해야한다고 날뛰었다.
나는 이에 대해 뭐라고 말을 하기가 난감했다.
내가 대처만 잘 했어도 안 죽었을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동시에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있었는가?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렇지만 확실한 건, 나라면 그 방법을 결코 택하지 않았으리라는 것 뿐이다.
세리아는 굉장히 화를 냈다.
제렌 씨에게 화낸 것이 아니라, 귀족들에게 화를 냈다.
그녀는 앞뒤정황을 하나하나 따져가며 이게 당시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수였다고 귀족들 앞에서 따박따박 쏘아붙였다.
다소 의외일 만큼 필사적인 그녀의 변호에 힘을 실어둔 건 놀랍게도 왕태자였다.
그 또한 세리아의 의견에 동의하며 책임지고 죽은 자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베풀겠다고 약속했다.
나름의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정말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세리아와 제렌 모두 별 피해 없이 마무리되었다.
내 짧은 인상으로는 아마 진심이 아니었을까 싶다.
“에릭 넌 화나지도 않아?”
세리아는 그래도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침대에 앉은 채 발을 까딱거렸다.
“주… 제렌 씨도 우리 동료잖아. 난 당연히 네가 날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미안.”
어쩌면 그녀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제렌 씨 덕분에 사건이 원만히 해결되지 않았는가?
죽은 사람들이야 동의를 못할지 몰라도, 솔직히 우리가 나섰다고 더 잘 해결됐을 것 같지는 않다.
나는… 거의 포기했었으니까.
그가 등장하기 전 잠깐 이상한 힘이 솟구친 것 같았는데, 결국 아무 것도 못하고 끝나는 바람에 그게 뭐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에릭은 우리가 소중하지 않은 거야?”
“아, 아니야! 너희 모두 소중한 동료야!”
“그럼 왜 그를 도와주지 않았어?”
“으… 그건….”
그녀의 말에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솔직히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짐꾼을 처음 구할 당시, 그는 우리 파티원이 아니니까 확실하게 선을 그어야한다고 주장했던 건 그녀 아니던가.
그런데도 그에게 소중하다던 자기 스태프까지 선물하고, 필사적으로 그를 변호하며 같은 파티원으로 여기는 그녀의 지금 모습은 좀 이질적이었다.
물론 계속 그와 같이 파티를 꾸리다보니, 자연스레 그와도 정이 들었겠지.
나도 그를 완전히 부외자로 내치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이게 이렇게까지 내가 죄인으로 몰려야 할 일인가?
“후우… 뭐, 됐어. 어쨌든 무사히 끝났으니까. 솔직히 난 그가 처벌이 아닌 보상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그렇지.”
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적당히 맞장구만 쳐줬다.
지금의 그녀는 왠지 진심으로 화난 것 같아 조금 무서웠다.
“그래서, 에릭. 오늘 내가 널 왜 불렀게?”
“어? …이거 때문 아니었어?”
그래, 내가 지금 그녀의 방에 있는 건, 세리아가 나를 불렀기 때문이다.
오늘은 우리가 수도에 머무는 마지막 날.
마지막으로 왕궁에 머무는 날이기도 하다.
그런 중요한 날에, 그녀는 단 둘이서 할 얘기가 있다며 나를 초대했다.
“잊어버린 거야?”
“어… 그, 잠시만….”
시무룩한 그녀의 표정에 나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되짚었다.
뭐지? 무슨 약속이라도 했었나?
“역시 까먹었구나.”
“그… 미안!”
조금 더 머리를 굴려보려던 나는 결국 솔직하게 사과했다.
“괜찮아. 빨리 사과했으니까 이번엔 넘어가줄게.”
“고, 고마워.”
뭔가 이상한 느낌도 들지만, 아무튼 약속을 내가 잊어버린 거라면 내 잘못이다.
“기억 안 나? 너 그 때 아린이랑 둘이서 이상한 짓 했잖아.”
“윽….”
덕분에 기억났다.
아린이 나한테 자기 드레스를 자랑했던 그 때가.
이게 그렇게까지 잘못된 일인가 싶으면서도, 나는 왠지 떳떳하게 굴 수가 없었다.
뭐를 잘못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무언가 잘못한 것 같은 그런 찝찝한 느낌이었다.
그 때 세리아가 뭐라고 했었지?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거야. 이 변태.’
설마… 그 책임을 물으려는 건가?
“아무래도, 내 생각엔 에릭이 너무 여자를 밝히는 거 같아.”
“…응?”
그… 그런가?
“아린한테 이상한 짓 하려고 했잖아. 아니야?”
“아니, 그건… 으….”
사실 따지고 보면 아린이 먼저 보여준 거 아닌가?
그렇지만 왠지 이 사실을 말해버리면 비난의 화살이 그대로 아린에게 날아가지 않겠는가.
안 그래도 만찬회 때 일로 충격을 적잖이 받은 모양이던데, 여기에 기름을 붓고 싶진 않았다.
“…마, 맞아…. 내 잘못이야.”
나는 눈을 딱 감고 그녀를 위해 내가 희생하기로 했다.
“…흐응. 역시 그랬구나. 이 변태.”
“윽….”
왜지?
그녀가 나를 욕하자 살짝 움찔해버렸다.
“역시 에릭의 성욕이 문제인 거 같아.”
“아, 그, 그건….”
세리아는 팔짱을 끼고선 나를 내려다봤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내가 그런 생각 못하게 도와줄게. 바지 내려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