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용사] 착한 사람에게는 보인다
나는 재빠르게 내 주변을 살폈다.
몸이 굳어있는 귀족들.
그들의 시선은 전부 한 쪽으로 쏠려있었다.
“아, 아아….”
아린은 이미 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았다.
나라도 갑자기 옷이 사라져버리면 당황한다.
하물며 그게 신관인 아린이라면 그녀가 받은 충격은 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리라.
제길, 뭐하러 이런 짓을…!
“이 마물아!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냐!”
“후후… 전 마법을 해제했을 뿐인데요? 저 아가씨에게 직접 물어보지 그래요?”
루엘라는 말도 안되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아린이 처음부터 옷을 안 입고 있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아린이 그런 짓을 할 리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들을 필요도 없는 헛소리.
“어…? 그, 그치만 드레스… 세리아가 고쳐서….”
유니는 혼란스러운 듯 세리아와 아린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세리아는 아린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헐벗은 그녀의 몸을 최대한 가렸다.
“흐, 흐윽….”
“아린… 그, 미안….”
세리아가 작게 속삭였는데, 뭐라고 말했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후후… 왜 부끄러워하시죠? 아까까진 그렇게나 자랑스레 드러내놓고선.”
“교수… 아니, 루엘라! 목적이 뭐야!”
세리아가 정말 진심으로 열받은 표정으로 루엘라에게 스태프를 겨누었다.
“제가 정말 대답해줄거라고 믿고 물어보신 건가요? 당연히 말씀 못 드리죠.”
“뭐하러 굳이 이런 번거로운 짓을….”
잠시 둘이 대치하고 있는 동안, 나는 조심스레 그녀에게 접근하기로 했다.
사실 도박에 가깝지만 나에게는 비장의 수가 남아있었다.
그 해골 사천왕을 상대할 때, 그는 내 왼팔의 문양에서 비치는 빛을 견디지 못했다.
다른 마족들도 우리한테 접근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인간 모습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루엘라 역시 그 빛의 영향을 받지 않을까?
그녀도 사천왕이라면 마족일 테니까.
단숨에 뛰어갈까? 아니면 들키지 않게 조금씩 접근할까?
어느 쪽이든 빨리 정해야했다.
세리아가 최대한 시간을 끌고 있는 지금이 적기.
나는 루엘라에게 뛰어드는 편을 선택했다.
“축복을!”
“히잇…!”
아린의 비명소리와 함께 나는 더 빨라진 몸으로 그녀에게 뛰어들었다.
문양이 빛이 나는 순간은 내가 그녀들의 힘을 빌릴 때.
따라서 나는 최대한 더 빨리 뛰어갈 수 있는 아린의 축복을 빌렸다.
“그렇게 소리지르며 뛰어오면 눈감고도 피하겠네요.”
그녀에게 접근하던 내 몸이 우뚝 멈춰섰다.
손끝은 움직이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마치 내 몸에 딱 맞는 벽 안에 갇혀있는 느낌이다.
뭐지? 여긴 아무 것도 없는데?
“당신들 정말 헨스를 잡은 거 맞나요? 이런 녀석들한테 지다니, 그도 참 한심한 남자네요.”
루엘라는 우리들을 보고선 한숨을 폭 내쉬었다.
내가 봐도 비참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무슨 투명한 벽 같은 것에 붙잡힌 용사.
스태프를 겨누기만 할 뿐 공격할 엄두도 못 내고 있는 마법사와 그녀 뒤에 쪼그리고 앉아 덜덜 떨고 있을 뿐인 신관.
유니는 비교적 운신의 폭이 자유롭지만, 그녀 하나만으로 루엘라를 막을 수 있을까?
“역시 당신은… 부적합해.”
루엘라는 내 쪽을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쏠 거야! 움직이지마!”
세리아가 소리치지만 루엘라는 들은 체도 안했다.
“크읏… 못 할 줄 알고?”
세리아가 분한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주문을 영창했다.
그녀의 특기 마법, 열방출이다.
이글거리는 열기 덩어리가 루엘라를 향해 날아왔다.
그러나 루엘라는 담담하게 손을 뻗어 그 공격을 고스란히 맞았다.
“어?”
치이익!
루엘라의 팔이 순식간에 부글거리며 징그러운 기포가 생기기 시작했다.
저, 저걸 그대로 맞는다고?
아프지도 않은 듯 루엘라는 미소를 지었다.
“세리아. 잘 보세요.”
그리고 그녀의 팔이 기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게 마법의 끝이랍니다.”
피부가, 근육이 육포를 찢듯 낱낱이 분해되더니 곧 어깨부터 다시 재조립된다.
오직 그녀의 새까만 뼈만이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근육이 마치 뱀처럼 어깨부터 기어나와 순식간에 그녀의 팔뼈를 덮고, 그 위를 다시 피부가 뒤덮는다.
아주 잠깐 사이 그녀의 팔은 원상태로 되돌아와 있었다.
터엉!
그와 동시에 테이블 끝쪽에 앉아있던 귀족 하나가 바닥에 쓰러졌다.
옷 때문에 전신을 확인할 순 없었지만, 옷 밖으로 드러난 그의 모든 부위에는 피부와 근육이 없었다.
그 귀족은 순식간에 뼈와 옷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흑마법.”
세리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마법의 길은 길고도 광대해요, 세리아. 인간의 수명으로 그 끝은커녕 중간지점에도 도달할 수 없을 만큼.”
“당신 리치구나.”
리치.
마법을 위해, 인간을 포기한 자.
육신의 껍데기만을 뒤집어 쓴 인류의 배신자가 그곳에 있었다.
“…이, 인간을 포기한 자는 결코 내버려둘 수 없어요!”
세리아 뒤에 숨어있던 아린이 고개만 들고 용기를 내어 외쳤다.
“뭐라구요? 잘 안들리는데 일어나서 말해주시겠어요?”
그런 그녀를 루엘라는 히죽거리며 비웃었다.
“읏… 으읏….”
“아린! 들을 필요 없어!”
아린이 울먹거리며 정말 일어나려하자 나는 그녀를 말렸다.
“괘, 괜찮아, 에릭!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유니가 그렇게 소리치자 아린의 몸이 환한 빛이 감싸였다.
“흐응… 다시 옷이 생겼네? 축하해요, 신관 아가씨.”
빛의 정령인가? 빛이 아린의 몸을 둘둘 감싸고 있었다.
살짝 눈이 부시기는 하지만 이걸로 아린의 수치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감내할 수 있다!
“다, 당신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아린은 용기를 내어 일어났다.
여전히 옷을 안 입고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남들이 그녀의 맨몸을 볼 일은 없어졌다.
“아, 아린, 그냥 내 뒤로 와….”
세리아는 왠지 불안한지 자꾸 그녀를 자기 뒤로 숨기려했다.
“괜찮아요, 세리아. 유니가 있으니… 괜찮아요.”
루엘라는 재밌는 걸 보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빛으로 막는다고 다가 아닌데. 정령사 아가씨도 아직 미숙하군요.”
그녀가 박수를 치자, 모든 불이 꺼졌다.
천장의 샹들리에, 테이블의 촛불, 그리고 아린의 몸을 감싼 빛무리마저.
이 방 안의 모든 빛이 루엘라의 곁에 구 형태를 이루며 모였다.
“…아, 읏….”
아린은 일어난 상태 그대로 굳어버렸다.
빛이 사라졌지만, 창문 밖은 아직 그리 어둡지 않다.
그녀의 몸은 환하지는 않아도 어슴푸레한 빛에 비쳐 오히려 그 존재를 더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있었다.
빛이 사라져버린 그녀의 몸.
신관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몸이었다.
그녀를 위해 고개를 돌려줘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못이라도 박힌 듯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마 주변의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이리라.
수십쌍의 눈동자가, 아린의 나체를 응시하고 있었다.
“히, 히야아악…!”
빛을 가둘 수는 있어도 빛의 정령을 가둘 수는 없다.
루엘라의 주변을 떠다니는 빛무리의 일부가 그녀의 곁을 떠나 다시 아린의 몸을 감쌌지만, 이미 이 곳에 있는 모두는 그녀의 나체를 실컷 감상한 뒤였다.
아린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하하하, 혹시 이거 보여줄려고 일부러 일어났어요?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음습한 취미가 있으시네?”
“아, 아아….”
“그만해!”
참다못한 유니가 빽 외쳤지만 루엘라는 그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어때요, 세리아? 진짜 마법을 목도한 기분은?”
“…당신이 이런 쓰레기일 줄은 몰랐어.”
“유감이네요. 당신이라면 진가를 알아볼 줄 알았는데. 아직 이른 걸까요?”
잠시 세리아를 아쉽다는 듯 바라본 루엘라는 고개를 돌려 귀족들이 앉아있는 테이블을 향했다.
“그럼 저도 이만 제 할 일을 해야겠죠.”
그들에게… 무슨 짓을 할 생각인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절대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죽일 생각이라면 이렇게 번거로운 짓을 할 리가 없다.
분명, 그냥 죽이는 것보다 더 끔찍한 짓을 하려는 것이다…!
“크, 으윽…!”
“무리에요, 당신의 힘으로는 풀지 못해요.”
그녀의 말대로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이 벽을 부수거나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콰드득!
바닥이 솟아오르며 그녀를 가뒀지만, 그다지 효과적이진 않았다.
루엘라는 마치 자신이 수많은 생명체들의 집합체인 양 자신의 몸을 잘게 나누더니, 유니의 정령이 만들어낸 흙더미를 피해 다시 하나로 뭉쳤다.
쿠웅!
다른 귀족이 다시 그녀의 재생에 희생되었다.
“히… 히익….”
“섯부른 짓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거에요. 가만히 계세요.”
유니는 자기 때문에 사람이 죽자 기겁했다.
“…유니, 이리와.”
세리아가 겁먹은 유니를 불러 달랬다.
우리들은 무력하게 그녀를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진 건가?
우리의 힘은 그녀에게 미치지 못했다.
유니와 아린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나는 무엇인지도 모를 것에 갇혀 옴싹달싹 못하고, 세리아는 그녀를 노려보기만 할 뿐 선뜻 덤비질 못한다.
세리아보다 더 뛰어난 마법사를, 그녀 혼자서 이길 수 있을까?
심지어 싸울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그녀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막을 수가 없다.
우리의 완벽한 패배.
내 손에서 힘이 서서히 풀려간다.
내가 약해서… 지고 말았다.
내가 더 강했더라면.
그녀를 막을 수 있었을까?
문득 내 왼팔이 빛을 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능력을 쓰지도 않았는데, 팔에서 제멋대로 빛이 나더니, 전신에 활력이 돌았다.
강인한 힘이 느껴진다.
이깟 벽 쯤은, 단숨에라도 부숴버릴 수 있을 듯한…!
“어머, 다른 손니….”
퍼엉!
온 몸에 힘을 주고 벽을 부수려던 바로 그 순간, 루엘라의 머리에 무언가가 충돌하더니 그녀의 목 위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어?”
마법이었다.
세리아의 열 방출 마법.
그렇지만 세리아가 쓴 마법은 아니었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출입구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출입구에 누가 있는가?
출입구에는, 그 남자가 있었다.
“…제렌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