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짐꾼] 주종관계
뭐하는 년이지?
“긴장 안하셔도 돼요. 딱히 무슨 짓을 할 생각은 없으니까.”
“…무슨 말이지?”
일단 부정했다.
확실히 남들이 보기엔 좀 수상해보이는 관계지만, 그것만으로 저런 결론을 낼 수는 없다.
분명 뭔가를 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곧장 꼬리내리고 전부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 색깔… 검정은 당신의 색이니까요.”
“뭐?”
아깐 모른다며?
“처음에는 빨간 색이었죠. 그녀의 주인은 당신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것이 점점 검게 물들더니, 지금은 완전히 까맣더군요. 당신이 뺏어온 거에요.”
“…왜 세리아한테는 모른다고 그랬지?”
“말하면 아닌 척 하면서 충격 받을게 뻔하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루에는 차를 우아하게 들이켰다.
“보아하니 아직 정신은 완전히 길들이지 못한 것 같군요. 어차피 시간문제겠지만.”
“…뭘 알고 있는 거지?”
세리아의 말에 따르면 이 여자는 각인마술이라는 것의 권위자지만, 워낙에 연구가 뜸한 분야라 그녀조차 이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느끼기에 이 자는 우리들의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묻고 싶은 게 있다면 지금 물어봐요.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왜 세리아한테는 모른 체 했지?”
“그녀에게는 알려줄 수 없거든요.”
내가 그녀의 대답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루에는 그에 대해 더 이상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모르겠으면 그냥 받아들이세요. 이건 당신에게도 아직 설명해드릴 수 없어요.”
“…뭐 됐어. 그럼 대체 이 문신은 뭐야?”
협박하면 더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잠깐 그런 생각도 해봤지만 이 여자에게서는 맹수 같은 느낌이 났다.
나 혼자선 절대 이길 수 없는 강자.
이런 상대에게 깝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흠, 뭐라고 해야할까요.”
그녀는 잠시 턱을 괴며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당신들은 뭐라고 생각하시죠?”
“…여신이 내린 축복, 이라고 하던데.”
이런 거까지 말해도 되나 싶지만 세리아가 쫑알쫑알 떠드는 걸 보니 이미 다 말해버린 것 같고, 이정돈 괜찮겠지.
“여신이라… 후후, 여신. 딱히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왼팔을 잠시 바라보았다.
“일단은 감정을 매개로 하는 강력한 복종마법… 이라고만 말해드리죠.”
“복종마법?”
이미 단어에서부터 여신과는 관계가 멀어보이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당신도 어렴풋이 눈치채지 않으셨나요? 마음이 당신에게 기울수록 그녀들의 장미는 당신의 색으로 물들어가고, 육체적인 관계를 맺으면 잊을 수 없는 쾌락을 주면서 주인에게 의존하게 만들죠. 그건 사람을 지배하는 도구에요.”
“그런걸 여신이 줬다고?”
“제 대답은 여기까지인 걸로.”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니 세리아가 이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런, 더 이것저것 묻고 싶었는데.
수상한 년이지만 정보는 이럴 때 최대한 뽑아내야지. 믿을지 말지는 그 뒤의 문제다.
“하나 조언을 드리자면, 그 저주. 내버려두지 마요. 너무 오래두면 욕구뿐만 아니라 성기능 자체가 죽어버릴테니까.”
“뭐?”
“푸는 법은 어렵지 않아요. 그녀가 건 저주는 그녀의 힘으로 풀면 그만이니까요.”
이것까지 알고 있었나?
그녀가 준 정보의 가치는 둘째치고 이 여자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대체 누구지?
“그렇지만 아직은 무리죠? 그런 의미에서 선물을 하나 드릴게요. 저주를 일시적으로 억누르게 만드는 성물인데, 억눌린 기간만큼 폭주한다는 사소한 단점이 있어요.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효과라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라는 점도 명심하시구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 주머니 사이로 무언가를 쏙 집어넣었다.
루에가 주머니에서 손을 빼자 세리아가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뭔가요?”
“아, 그냥 선물을 하나 드렸죠. 저도 귀한 걸 봤으니 그만큼 뭔가 드리고 싶어서.”
나를 향해 싱긋 웃는 루에.
세리아는 이상하다는 듯 내 주머니를 바라봤지만, 내가 살짝 인상을 쓰자 움찔하며 캐묻지 않았다.
주인인 내 심기를 거스르는 것보다는 모른 체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어떻게 정리되었는지,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어보였다.
“읏!”
그렇지만 이 촉감은 좋단 말이지. 성욕과는 별개의 문제다.
내가 엉덩이 사이로 손을 넣자, 세리아는 조심스레 나를 바라보며 항의했다.
“왜 그래요, 세리아?”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흣!”
성적 욕구를 풀기 위해서라기보단 테스트다.
정말 나를 받아들일 것인가?
뭐 결과는 보나마나 뻔했다.
그보다 이 여자, 나한테 빨리 저주를 풀라고 했지.
그런데 당연히 나는 아직 아린의 신성력을 쓰지 못한다.
이 여자는 그것까지 알고서 나에게 일시적인 해결책을 주었다.
그녀에게서 신성력을 훔칠 때까지는 이걸로 버티라는 건가?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퍼주지?
나는 그녀의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흐읏… 괘, 괜찮으니까, 마저 얘기나… 읏, 하죠….”
“후후, 그래요.”
루에는 나를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차를 마셨다.
“오늘은 즐거웠어요, 교수님.”
“네, 저도 즐거웠답니다. 여러분들도 즐거우셨길 바래요.”
루에 교수는 그렇게 말하며 떠나갔다.
마지막에 나를 바라본 것 같긴 한데, 뭐 그냥 고개만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가 떠나가자 세리아는 불안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 주인님, 죄송해요.”
“응?”
“제가 여러모로….”
“됐어. 말 안했던 나에게도 책임이 있으니.”
그녀는 결국 자신의 꿈을 포기했다.
그녀 자신의 꿈을 이루기보단 나를 위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비로소 세리아에게 노예의 봉사심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 배, 배려 감사합니다.”
“슬슬 들어가나?”
“네에… 하루만 밖에 있기로 약속하고 나온 거라….”
그녀가 가면 뭘 해야하나.
다시 그 숙소에서 하릴 없이 기다리기만 할 뿐.
그렇게 되면 정말 용사마냥 시간을 낭비하는 꼴이다.
“나도 못 들어가나?”
“네? 어….”
“뭐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왕궁인데 괜한 짓 했다가 잡히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투명마법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뭐?”
그렇게 쉽게 된다고?
세리아가 잠깐 설명해줬는데, 왕궁에 딱히 항마결계같은 게 없어 그냥 마법으로 들어올 수 있을 것 같다 했다.
세상에 뭔 놈의 궁전이 그렇게 보안이 허술한가 싶었는데, 대충 마탑과 왕궁 사이에 복잡한 관계가 얽혀있단다.
거기까진 별로 궁금하지 않아서 안 들었다.
아무튼 들어갈 수 있다면 그걸로 됐지.
“저… 그럼 제 방에 오실래요?”
그녀의 얼굴에는 약간의 기대감이 서려있었다.
“좋아, 안내해.”
그래, 이왕이면 썩어빠진 침대보단 왕궁 침대가 더 좋지.
***
그녀의 방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내 주머니에 그녀가 넣고 간 정체불명의 물건이었다.
꺼내보니 목걸이였다.
가로로 직선이 하나 그어져있고 그 밑에는 원 하나가 그려져있다.
어디서 본 거 같긴 한데, 이게 뭐지?
“아, 교회 목걸이네요.”
얌전히 바닥에 무릎꿇고 앉아있던 세리아가 목걸이를 알아보고 말했다.
“뭐? 교회 목걸이?”
이런 걸 왜 줬지? 목에 걸라는 뜻인가?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목걸이를 자세히 살폈다.
“그런데 좀 이상하네요. 모양이 반대에요.”
그러네.
새벽의 여신을 믿는 그 종교쟁이들과 친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문양만큼은 본 기억이 있다.
직선과 그 위에 그려진 원.
조느라 제대로 안 들었지만 전에 무슨 사제가 말하기로는 직선은 대지를, 원은 태양을 상징한다고 했다.
떠오르는 태양, 즉 새벽을 상징한다고 그랬던가.
그런데 이건 반대였다.
대지 아래에 태양이 있으니, 지는 태양 아닐까?
“들고 있으면 왠지 큰일 날 거 같은데요, 주인님. 루에 교수님이 이런걸 주셨나요?”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딱히 여기가 종교에 엄격한 국가는 아니라지만, 이건 누가봐도 신자들을 엿먹이는 문양이었다.
그 신관년이 내가 이거 걸고 있는 거 보면 눈깔 뒤집히겠는데.
죽지만 않을 수 있다면 한 번쯤 보고 싶은 광경이었다.
“이걸 걸면 저주를 잠깐 해소할 수 있다고 하더군.”
“네? …그 아린이 건 저주요? 교수님이 그걸 왜 알고 계시죠?”
그러게. 나도 궁금한데.
그렇지만 쪽팔리게 노예한테 나도 모른다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이건 주인의 위엄과 관련된 문제였다.
퍽!
“건방지게 일일이 묻지 마라. 누굴 위해 내가 이런 걸 받았다고 생각하냐?”
할 말이 없으니 괜히 세리아 배를 걷어차며 적당히 말을 돌렸다.
“케흑…. 가, 감사합니다, 주인님.”
목걸이니까 목에 걸라고 준 거겠지?
설마 성욕이 거세됐다고 고추에 칭칭 감는 머저리 같은 구조는 아니라 믿고 싶다.
“와서 걸어봐.”
“네엣….”
그녀는 좀 아팠는지 배를 살살 문지르며 무릎으로 기어와 조심스레 내가 건넨 목걸이를 받아들였다.
목걸이를 걸고 나서도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설마 진짜 꼬추에 거는 그런… 아, 시발, 그런데 이년 향수 냄새가 왜이렇게 꼴리지?
“꺄앗!”
나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채를 들어올리고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주, 주인님…?”
“가만히 있어봐.”
그녀의 살내음과 은은한 향이 뒤섞여 잠들어있던 내 욕구를 일깨웠다.
“후우, 침대 위에 올라가서 엎드려.”
“앗, 주인님 설마…!”
지금이라도 폭발할 것 같다.
내가 며칠 참았지? 이틀? 사흘?
“무도회 당일까지 방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생각하지마. 알았어?”
누가 찾아오면 투명마법으로 좀 숨어있고, 식사는 2인분씩 가져오라고 시키면 된다.
방이 다르니 용사나 다른 년들한테 방해받을 일도 별로 없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찬스.
무도회 당일에는 두 발로 못 걸어다니게 만들어주지.
“네, 네엣♥”
세리아는 기대감에 손을 덜덜 떨었다.